고종석,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 문장에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지 마라. 장르에 따라 다른데 예술작품은 수사에 의한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수사를 많이 사용해도 좋다. 정보 전달을 위한 글에서는 간결할수록 이해하기 좋다.
글ㆍ사진 김이준수
201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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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사체가 발견됐다며 시끄럽다. TV, 신문 등을 통해 뉴스가 쏟아진다. 그것을 둘러싼 의혹이나 의심은 차치하고, 그에 대한 호칭(유병언씨)이 귀에 걸린다. 죽은 사람에겐 ‘씨’를 붙이지 않는 게 원칙이라는 『고종석의 문장』의 조언 때문이다. 물론 아직 추정일 뿐, 고인이 됐다는 확증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죽은 사람에게는 ‘씨’를 안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작고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생전에 서로 알았던 사람이 언급할 때는 씨를 붙이는 게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만, 아무튼 고인에게는 씨를 안 붙이는 게 원칙이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고종석의 문장』196쪽)  

 

작가만남-고종석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 고종석 선생을 호명했다. 지난 7월 11일이었다.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고종석의 문장』 출간기념 저자 고종석과 함께하는 직문직답의 시간이 열렸다. 묻고 답했다. 테크닉 이상의 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비판적인 글쓰기를 한다면, 여러 사람의 생각을 넣고 중립적으로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비판적인 글쓰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비판이라는 말 자체에 중립은 들어갈 수 없다. 다만 비판을 할 때 사실 자체를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날조하거나, 있는 사실을 없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사실에 근거해서 비판한다면 당파성 혹은 정파성이라 부르든, 이념이라 부르든, 비판은 어느 쪽에 편을 들어야 한다. 내 경우, 글을 쓸 때 예전부터 눈길을 둔 대상은 소수자였다. 소수자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수가 비슷해도 여성이 남성보다 소수자다. 질적 소수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노동자와 자본가를 보면, 숫자는 노동자가 많아도 노동자가 소수자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한국에서 전라도 사람 등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조건에 의해 소수자가 되는 사람들을 나는 편애한다. 편을 드는 건 정당하다. 비판은 편을 드는 것이다. 편을 들지 않는 비판은 묘사다. 글 쓰는 사람들이 소수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건 큰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작가뿐 아니라 기자 등도 포함한다. 나는 소수자를 옹호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을 옹호했다. 나는 비판을 하면서 중립성을 지킨 적이 없다. 대부분 소수자 편을 들었다.

 

아름다운 글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써 놓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글이 있다면?

 

미학자들이 책을 몇 권 써야할 주제인데(웃음). 아름다운 글은 두 가지 축이 있다. 논리와 수사다. 우선 논리에 어긋나지 않게 써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데, 습득해야 할 기술이 논리와 수사학이라면 그 중에 앞선 것은 논리다. 논리는 글에 명료하게 기여하고, 수사학은 아름다움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수사가 너무 지나치면 좋지 않다. 화장도 적당하면 아름답지만, 과하면 그렇지 않다. 예술작품에서는 아름다움의 요소가 무척 중요하다. 글도 예컨대 논설문이나 시, 소설, 에세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수사학이 중요하다.

 

수사는 짧게 말하면, 비유다. 비유에는 2개가 있다. 은유와 환유. 은유는 사물의 유사성에 기초를 둔 비유다.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한 것이다. 청와대는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임명을 강행하기로 했다. 이 문장에서 청와대는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이나 대통령 주위에서 결정을 돕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것이 인접성이다. 또 모차르트를 좋아해, 라고 말하면 모차르트를 좋아한다거나 성격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뜻한다.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부분은 수사이며, 수사는 비유이며, 은유와 환유는 적당히 하면 좋다.

 

최근 개정판이 나온 내 책이 있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보니 참 아름답게 썼다는 생각이 들더라. 다른 책들도 아름답다(웃음). 보다시피 내 외양을 보면 ‘미적 자본’이 없다. 그래도 글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신문의 논설을 쓸 때도 그렇고, 에세이를 쓸 때나, 심각한 글을 쓸 때도 그랬다. 그건 각자 사람의 취향일 것이다.

 

글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심이다. 그래서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일기를 썼다. 자신을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이후 일기를 써보지 못했다(웃음). 그래도 일기를 쓰는 건 무척 좋은 일이다. 자신만을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다. 자신을 알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진심을 담을 수 있을까. 간단히 정의할 수는 없다. 여러분은 많은 아름다운 책이나 글을 읽었을 것이고, 저자를 만나봤을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자서전, 회고록, 자전적 소설이든 사람은 자기애가 있어서 그 글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수행과정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 미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그래서 글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는 사람보다 꽃이 더 아름답다. 사람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하루에 몇 백 명씩 죽어간다. 인간의 마음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은 좋은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고, 옆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곤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본능이 글쓰기에 개입돼 자신의 가장 추악한 부분이나 비루한 부분은 차마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글에 감동받았다고 해서 저자를 똑같이 바라보지 마라. 거의 실망할 것이다.

 

작가만남-고종석

 

글쓰기를 하고 있다.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것이 문장에서 단정적인 것을 요구하더라. 나는 모호하거나 질문 식의 문장을 주로 쓴다.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여 모호함이 독자에게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차이점에 대해 듣고 싶다.

 

선택의 문제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세상이 보이는 대로만 보일까.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뿐 아니라 배우자를 완전히 알 수는 없는 경우도 많다. 글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회의주의자다. 명확한 사실도 일단 의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쓴 비평적 글에도 ‘~한 듯하다’, ‘~싶다’는 글이 많다. 그러나 출판이 되면 달라지지.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조금이라도 회의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

 

출판사가 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글을 완벽하게 다듬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힘 있는 소구를 할 수 있는 지다. 두 가지 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할 것이 확실하다’ 혹은 ‘~한 듯하다’ 나는 양쪽 다 쓰긴 하는데, 후자가 독자들에게 생각거리를 준다. 저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다른 쪽으로 생각해볼 순 없을까 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쪽을 선호한다. 정치에 관한 글은 독자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지지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줄 필요는 없다. 즉 글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확신을 가지는 글은 좋은 편이 아니라고 본다.

 

글쓰기 원칙에서 예외를 둔 것은 없는가?

 

일본말에 가깝지 않은 말을 사용한다. 어떤 문장에도 문체를 위해서라면, 표준국어, 교과서적 국어는 뺐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적’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내 스타일이라는 자신감이 든다면 써도 좋다. 표준적이란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틀에 박힌 글이나 문법적으로 어긋나지는 않으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글이 있다. 자신의 문체를 가지겠다는 야심을 가지는 것이 좋다. 독자에게 ‘아, 이 작가가 쓴 것이구나’하는 스타일을 가진다면, ‘~적’을 빼라, 무엇을 빼라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필사하는 것이 좋다는데, 글쓰기에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필사가 글쓰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는 필사 할 시간에 좋은 글을 많이 되풀이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기성작가들도 습작시절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필사 했다고 하는데 필사할 만큼 좋은 책이라면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의심해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이런 표현을 이렇게 바꿀 수는 없을까, 이 문단을 다른 문단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와 같이. 비평적 글읽기가 글쓰기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필사가 도움이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나라면 하지 않겠다. 너무 고통스럽잖아(웃음).

 

학교에서 문학동아리 면접에서 떨어졌다. 문학의 효용성에 대해 듣고 싶다.

 

철학자이면서 희곡작가인 (장 폴)사르트르의 『구토』 이야기를 해보자. 이 책에 대해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구토』는 굶어죽는 나라를 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구토』는 한 아이가 이 세상, 지구상의 어느 한 곳에서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을 스캔들로 만들고, 사람들은 ‘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문학을 통해 알게 된다. 문학이 직접적으로 유용하다는 말도 맞겠으나, 한 독거노인이 외로워서 혹은 굶어서 죽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이를 스캔들로 만들고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문학적 감수성이다.

 

실용문을 쓸 때 군더더기 없는 글쓰기를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 문장에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지 마라. 장르에 따라 다른데 예술작품은 수사에 의한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수사를 많이 사용해도 좋다. 정보 전달을 위한 글에서는 간결할수록 이해하기 좋다. 중언부언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한 문장을 빼거나 품사도 빼도 말이 된다면 빼라. 부사가 여러 개, 형용사가 여러 개인 경우, 이것들을 빼도 원래 글이 주고자하는 정보량이 같다면 빼도 된다. 자기가 원래 쓴 글에서 수사를 빼도 정보량이 같다면 좋은 문장이다.

 

소재 발굴 작업을 따로 하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하나?

 

2년 전 절필 선언 후 그런 일이 없지만, 요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국내외 사이트를 검색해본다. 소재는 다른 것 없다. 중요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쓰지 않았다면 소재가 된다. 쓰고 싶어 미치겠다 싶어서 쓴 글은 거의 없다(웃음). 기억을 되돌아보려고 하고, 술을 마시다 보면 떠오르기도 하는데 술을 금지하지 않은 것은 사회적으로 위험하다(웃음).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를 보다 보면 떠오르는데, 개인마다 다르지 않을까. 꼭 써야겠다는 소재가 있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인 것 같다.

 

작가만남-고종석

 

글을 쓸 때 처음과 현재 글쓰기 능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하다.

 

글쓰기 강좌를 한 것은 확신이 있어서인데, 음악, 수학은 천재성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있지만 글쓰기는, 말을 담는 재주도 어느 정도 타고 나겠지만, 훈련되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본 적도 없다. 시험을 리포트로 대신하겠다는 수업이 제일 싫었다. 그야말로 우연히 신문사가 직장이었기 때문에 글을 쓰게 되었다. 막상 써보니 써 지더라. 글쓰기를 두려워했지만 글이 술술 나가네(웃음). 책을 많이 읽었던 경험도 도움이 됐다. 글쓰기의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좋은 글을 되풀이해서, 비판적으로 많이 읽는 것이다. 읽다보면 좋은 글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회의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글을 읽을 때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잘못 쓴 것은 아닌지, 잘못된 내용은 없는지 비판하면서.

 

왜 트위터를 하고, 팔로우 수를 ‘0’으로 해 놓은 이유가 있나?

 

트위터를 한 지 2년 정도 됐다. 처음에 친구의 권유로 시작해서 지금은 거의 중독 수준이다. 친구들은 그만하라고 조언하는데, 절필하고 나니까 다른 방법이 없다. 말이나 글로써 세상을 표현하고 싶어서 트위터를 한다. 앞으로도 계속 할 것 같다. 트위터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팔로우를 0으로 했다. 팔로잉 했던 트위터의 글이 자고 일어나면 엄청나게 쌓인다. 이걸 읽으면 2시간은 걸리더라. 리스트를 만들어서 특정한 누군가하고만 얘기하긴 싫고, 팔로우를 0으로 하면 어떨까 싶었다. 순수하게 내 할 말만 하기 위해 팔로우를 0으로 했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의 억압과 글에 대한 피드백에 대해 잘 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글쓰기에 관심이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글쓰기 교육이 가능할까?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왜 갑자기 사람들이 글쓰기를 많이 하게 되었을까? 예전에는 특정한 신분, 즉 귀족만 글을 썼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작가들, 기자들, 학자들만 글을 쓸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권이었고 책을 낸다는 것은 영향력이 엄청났다. 그러나 인터넷이 만들어 진 후 글쓰기에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모든 사람들이 글 쓰는 사람이 됐다. 글쓰기의 자격이 필요하다거나 글 쓰는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면 대중적 글쓰기가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글을 쓰고 모든 사람들이 읽게 됐다. 그러므로 글쓰기, 글 읽기 교육이 필요하다. 

 

장르에 따라 글 쓰는 태도가 달라지는지, 詩를 즐겨 읽는지 궁금하다. 

 

신문에서 칼럼을 써 달라고 하면 쓰고 다 맞춰서 쓰는 편이다. 소재에 따라 장르의 적합성을 정하지는 않는다. 詩를 좋아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중에서 단어를 고르는데 가장 고민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한국어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좋은 詩를 많이 읽고 밑줄을 긋고 읽어라. 詩라는 장르는 산문보다 수사를 압도적으로 많이 쓰는 장르다. 詩를 이해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한국어를 쓸 수 있다. 모국어의 엑기스가 들어 있는 것이 詩다. 詩가 대중화 돼 있는 것이 노래인데 한국의 대중가요 가사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해외 대중가요의 가사가 시적인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좋아하는 시집을 꼽으라면, 20세기 근대시가 쓰인 이후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이다. 『화사집』을 읽고 감흥이 없다면 한국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시집이 많은데, 『화사집』을 읽으면서는 환각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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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고종석| 알마
이 책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 고종석의 글쓰기 강의를 녹취 정리한 것으로, 공학적 측면을 넘어선 글쓰기 기술의 심원한 풍경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고종석은 매 강연의 절반 이상을 인문 교양과 언어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데 할애했다. 이는 좋은 글쓰기가 글쓰기 자체의 전문 지식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깊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이 과정에서 현대 언어학의 주요 개념 및 이론, 한국어의 언어학적 특징, 한글의 원리와 의미, 근현대 역사, 정치/시사 상식 등 핵심 교양 강의가 요령 있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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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고종석의 문장 #글쓰기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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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우산

2014.07.24

간결한 문장이 좋다.는 말을 듣곤 했어요. 좋은 글을 쓰고 싶을 때는요. 주절대는 장황설보다,
요점있는 짧은 말이 더 효과적인 것처럼요. 그럼에도 때로는 디테일이 필요한 장르가, 그런 상황이 요구된다면 또 달라지겠죠? 쓰고 또 써야되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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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돌

2014.07.23

자기글을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하다니.. 대단히 실망스럽네... 딴건 모르겠고 소설은 쓰지마셈... 그건 평균이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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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보석

2014.07.23

나이가 들수록 글쓰기가 점점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정말 부러워요. 아니 주눅이 들어서 글쓰기 한번 해보고 싶어도 자신감까지 떨어지곤 합니다. 무엇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는것이 중요한것 같아요. 좀더 좋은 글을 잘 쓰기 위해 비판적으로 많이 읽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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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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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간결하면서도 냉철한 글로 유명한 고종석은 이 시대 유명한 저널리스트이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과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언어학 석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했지만 문학이나 저널리즘에 관심을 가진 그는 24세에 한 영어 일간지의 기자가 된 이 후 지금까지 직업적 저널리스트 생활을 해 왔다. 좋아하는 작가는 애거서 크리스티, 에릭 시걸, 존 그리셤 같은 영어권의 대중 소설가이고, 저널리즘에 대한 취향이 까다로운 그가 선택한 신문은 르몽드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정도이다. 그를 정서적으로 압도한 최초의 책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눈물을 훔쳐내며 읽은 심훈의 『상록수』이며, 그를 지적으로 압도한 최초의 책은 고등학교에서 내쳐져 자유롭던 열 일곱 살 때 골방에서 담배 피우기를 익히며 읽은 노먼 루이스의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다. 그는 자신의 문체에서 에릭 시걸과 김현과 복거일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에서 칼 포퍼와 김우창과 강준만을 느낀다. [코리아타임스], [한겨레신문], [시사저널] 등지에서 스물 두 해 동안 기자 노릇을 한 그는 2005년 봄 [한국일보] 논설위원직을 끝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의 멍에와 명예에서 벗어났다. 현재 도서출판 개마고원 기획위원으로 있다. 나이에 걸맞은 가장 노릇을 못하며 살아온 터라, 그는 더러 자신이 객원남편, 객원아비, 객원자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득 자신을 객원한국인이나 객원인류로 여길 때도 있다. '객원'의 비정규성과 느슨함이 베푸는 자유의 감촉을 그는 무책임하게도 흐뭇해하는 편이다. 언젠가 페르시아어로 '루바이어야트'를 읽어보는게 꿈이다. 특별히 집착하는 기호품은 디스 플러스 담배와 붉은 포도주와 아스피린이다. 지은 책으로는 사회비평집 『서얼단상』, 『바리에떼』, 『자유의 무늬』,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경계 긋기의 어려움』, 문화비평집 『감염된 언어』, 『코드 훔치기』, 『말들의 풍경』, 한국어 크로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어루만지다』, 『언문세설』, 『국어의 풍경들』, 역사인물 크로키 『여자들』, 『히스토리아』, 『발자국』, 영어 크로키 『고종석의 영어 이야기』, 시 평론집 『모국어의 속살』, 장편소설 『기자들』, 『독고준』, 『해피 패밀리』, 소설집 『제망매』, 『엘리아의 제야』, 여행기 『도시의 기억』, 서간집 『고종석의 유럽통신』, 독서일기 『책 읽기, 책 일기』, 에세이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등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C'est tout)』, 『어린 왕자』를 우리 말로 옮겼다. 주저主著 『감염된 언어』는 영어와 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