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쓸 때 체크리스트를 이용한다. 어째서 체크리스트를 이용하는지,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 8주 동안 강의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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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를 책임지기
저는 시를 어떻게 쓸지 미리 계획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구상 단계에서 항상 체크리스트를 활용합니다. 쓰는 도중에도 체크리스트를 봅니다. 시를 다 쓰고 나서 스스로 쓴 것을 평가할 때도 사용합니다. 제 체크리스트를 공개하겠습니다. 시를 쓰기 전의 체크리스트와 완성한 뒤의 체크리스트는 시제(예:쓰는가? 썼는가?)만 다르고 항목이 전부 동일합니다.
1. 누구에게 주려고 썼나?
2. 무엇을, 왜 썼나?
3. 화자는 무엇(누구)인가?
4. 화자는 언제, 어디에서 말하고 있나?
5. 어떤 판단들이 충돌하여 역설을 만들고 있는가?
6. 화자 혹은 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7. 화자의 말하기 방식(형식)은 무엇인가?
8. 화자의 말하기 방식을 어떻게 배치하였는가?
9. 내가 쓴 것이 왜 시인가?
저는 체크리스트에 답변을 아주 세세하게 작성합니다. 어떤 답변은 가끔 에세이 한 편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번 수업에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남이 내 시를 읽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내 시를 제대로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수업에선 체크리스트를 이용해서 여러분 스스로 자신이 쓴 시를 직접 평가합니다. 무엇이 잘 됐고, 무엇이 잘 안되었는지 합평 시간에 발표합니다.
자기가 쓴 시를 남들 앞에서 조목조목 설명하는 게 조금 낯설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돕겠습니다. 제가 제가 늘 하는 일이니까요.
- 2023년 7월 12일에서 9월 6일까지 진행했던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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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래동화 중에 바보가 여행을 떠나는 얘기가 있다. 세상 경험을 하겠다고 떠났던 건지, 심부름이었는지,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 얘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바보의 아내는 아주 현명했고, 여행을 떠나는 바보에게 복주머니 몇 개를 쥐여주었다. 위험이 닥치면 순서대로 하나씩 열어보라고 당부했다. 내 생각엔 체크리스트가 바로 시 창작에서의 복주머니다. 체크리스트는 복주머니처럼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때는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작품을 어떻게 써나갈지 사전에 치밀하게 구상했다고 해도, 시를 쓰기 시작하면 계획한 것을 대부분 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체크리스트가 시 쓰기의 즉흥적인 즐거움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뭘 쓰기로 했지? 어떻게 쓰기로 했지? 철저히 계획대로 쓰기 위해 계산적으로 굴다 보면 흥이 나질 않는다. 물론 구상한 것을 오롯이 구현해야만 하는 시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에서 가장 멋진 부분은 나도 모르게 써진 것들이다.
그러나 시 쓰기의 여정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다음 행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까 했던 말을 표현만 바꿔가며 반복하고 있습니까? 제자리에서 맴도는 기분입니까? 위험합니다. 잠시 책상에서 일어나세요. 일어나라니까요? 조급함 때문인가요? 미련이 남아서인가요? 조금만 더 집중하면 갑자기 나아질 것 같습니까? 아마 생각처럼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을 믿어보세요. 쓰고 있는 시가 고장나면 시 밖으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디로 나가야 하냐고요? 체크리스트가 있잖아요! 바로 이때를 위해서 미리 체크리스트를 작성한 것입니다.
시 창작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보통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당신이 그 시를 왜 쓰기 시작했는지 까먹었기 때문이다. 체크리스트로 돌아가면 2번 항목에 무엇을, 왜 쓰고자 했는지 적혀 있다. 동기를 잊었다면 원동력을 잃은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자.
두 번째 경우, 시에서 이미 할 얘기를 다 했는데 뭔가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구상 단계에서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였는데 막상 구현을 해놓고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여기 포함된다. 잠시 후퇴하여 체크리스트를 활용해보자. 예컨대, 화자 혹은 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해보는 것이다.
시인은 종종 자신이 쓴 문장에게 철저히 부정당해야 한다. 시인이 너무 전능하다면, 시 속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데 아무런 불편도 겪고 있지 않다면, 어쩌면 시 속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나를 방해한다면, 말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고 말해야 하는 것도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체크리스트를 이용하여 새로운 맥락을 추가할 수 있다.
이밖에도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 이 글에서 내 체크리스트의 묘미를 전부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항목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수업으로 만들어도 좋고, 실제로도 그렇게 수업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끝내기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체크리스트의 가장 중요한 기능 하나만 말하고 마무리하겠다.
나는 체크리스트를 참고하여 시를 포기한다. 쓰기 전에 포기하고, 쓰다가 포기하고, 다 쓰고 나서 시를 버린다. 체크리스트는 내가 시에서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알려준다. 하지 못했으면 하지 못했다고 알려준다. 그러면 나는 미련 없이 시를 새로 쓴다. 시 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종종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에 있다. 화자는 무엇(누구)인가? 화자는 언제, 어디에서 말하고 있나? 화자의 말하기 방식(형식)은 무엇인가? 질문해도 만족스러운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나는 종종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시의 화자여야 했음을 안다.
이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은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니다. 그가 할 말은 내가 해온 말과는 다르다. 그러니 나는 새로 써야 한다. 체크리스트는 미련을 버리게 하는 심판관이 되어준다. 종종, 네가 쓴 시에 만족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려주기도 한다.
당신이 당신만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를 썼으면 좋겠다. 새로 썼으면 좋겠다. 아아, 새로운 시를 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승일
200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데뷔. 시집으로 『에듀케이션』,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 산문집으로 『지옥보다 더 아래』가 있다. 2016년 현대시학 작품상. 2024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