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란 상지대 교수는 한국 시단에서는 전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를 쓰는 시인으로, 시사적인 글을 쓸 때는 『말의 귀환』에서 보여줬듯 냉철한 논객으로써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김정란 교수가 이번에 발표한 책은 시집도, 칼럼집도 아니고 판타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 판타지.
제목은 『두룬』이다. 청소년을 주된 독자로 썼다고는 하지만 총 3권이라는 분량에서 나타나듯, 만만한 작품은 아니다. 청소년 독자를 염두에 둔 작품이니만큼 구조나 문장은 최대한 단순하게 하면서도 그 속에 넣은 주제는 묵직하게 썼다. 이 작품의 주제는 주인공 ‘두룬’의 삶으로 나타난다. 두룬의 삶 전반부는 많은 영웅 신화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를 따른다. 비범한 출생,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 고난 극복. 그렇지만 두룬의 삶 후반부는 반전이다. 영웅은 타락하고, 남은 삶을 속죄하는 데 바친다.
두룬이 타락할 때 독자는 우리 신화 속 존재인 도깨비를 만난다. 타락하기 전 두룬은 뛰어난 야금술사이자 연금술사였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도깨비의 기원을 대장장이 신으로 본 것이다. 김정란 교수는 『삼국유사』의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를 『두룬』의 출발점으로 꼽았다. 거기에 대장장이였던 석탈해 설화와 조선 시대 이후 도깨비 이야기를 녹아냈다. 이렇듯 『두룬』은 가볍게 읽으면 흥미로운 역사 판타지, 좀 더 깊게 읽으면 신라와 조선의 정신문화를 볼 수 있는 작품인 셈이다.
두룬, 속죄하는 영웅
시작한 계기는 실용적이었습니다. 2006년에 과가 생겼는데 학교에서 지원받아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외부 프로젝트를 따야겠다고 해서 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하는 프로젝트에 응모했습니다. 응모 과제가 OSMU(One Source Multi Use) 기획 인력을 키우기에요. 멀티유즈를 하려면 원소스가 있어야겠죠.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만들어보라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1권 분량으로 생각했는데 늘어났어요. 이런 게 직접적인 원인이긴 했지만, 그 전부터 판타지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 왔어요. 『해리포터』나 『나니아 연대기』가 문학적인 작품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정서를 고양하는 힘이 있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구체적인 계기가 생기니까 자연스레 만들어졌죠.
책에 들어간 삽화가 아름답습니다. 분량도 적절하여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삽화 때문에 오히려 책이 늦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쓰기로 했던 삽화가가 중간에 못하게 됐어요. 출판사에서는 삽화 없이 내자고 했는데, 아쉽더라고요. 기왕 늦어졌으니 기다리자 해서 거의 2년을 기다렸어요. 1년은 먼저 약속했던 삽화가를 기다리느라, 나머지 1년은 책에 실린 삽화를 기다리느라 보냈죠.
주인공인 두룬부터 시작해 길달, 지웅, 도토리, 야차 등 타락하는 인물이 많은데요. 두룬 같은 경우는 타락했으나 속죄하고 원래 자신을 찾아가려고 하죠. 왜 이런 인물을 그렸나요.
우리사회를 바라보면서 느낀 고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상을 버릴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지켜가는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매도해요. 그런 사람이 상층부를 장악했어요. 이런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게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인물을 많이 등장시켰어요.
역시 판타지라고 해도 현실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네요. '작가의 말'에서 한국에는 고백과 속죄의 전통이 약하다고 지적했는데요.
우리사회에 보편 원리가 없어요. 가치가 보편적인 층위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 발생해요. 그래서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 동네 사람이면 괜찮다고 용서해버리죠.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타락할 수밖에 없고 잘못해도 사죄하지 않아요. 왜 우리나라는 잘못에 관대할까요, 이렇게 해서 사회가 건강할 수 있을까요? 권력, 힘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번도 과거를 반성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부분에 관해서 평소에 느꼈던 감정이 있었고, 그래서 속죄하는 영웅을 그리고 싶었죠.
학교에서 신화를 강의하는데, 서양 신화에서는 참회하는 영웅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웅이 헤라클레스죠. 참회를 해야 비로소 진정한 영웅이 되는 걸 보면서 왜 우리 신화에는 이런 유형의 영웅이 없을까 싶었어요.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갖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몰락하고, 몰락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영웅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주제를 쓰느라 이야기가 길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정리하자면, 두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수한 한국적 기원을 가지는 이야기를 규모 있는 서사로 만들고 싶었어요. 또 한편에는, 한국 문화에 없었던 새로운 영웅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국, 속죄하는 전통 없어
세월호 참사만 해도, 누군가가 제대로 잘못을 시인하고 속죄하는 모습은 없는 것 같은데요.
온갖 사람이 그래요.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해서 한 번도 정식으로 사죄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아요. 핑계 대서 모면하고, 언론이 덮어주고, 그렇게 넘어가죠. 제가 한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성공한 쿠데타'라고 말해요. 불합리하고 부당한 짓을 저질렀어도 성공하면 덮어준다는 거죠. 굉장히 병든 사회죠.
고독과 속죄가 기독교 전통에서 강조하는 덕목이잖아요. 요즘 교수님의 신앙은 어떤지.
저는 신앙을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교회에 안 갈 뿐이죠. 그렇다고 교회 가는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교회에 가는 걸 중요하다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나 같이 신앙이 있어도 안 가는 사람이 있고요. 신앙의 본질은, 교리가 아니라 내면적 존재가 명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예요. 교리는 세세한 부분에서 갈릴 수 있어요. 예컨대 동정녀 잉태설이 사실인가 상징적 비유인가, 이런 거죠. 어느 것이 맞다고 믿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가죠.
책의 주제와도 관련 있네요.
그렇죠. 두룬이 아무 것도 얻는 게 없어요. 그냥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뿐.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유화는 신라 여신은 아닌데요. 이런 설정에도 숨겨진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유화는 고구려 신이죠. 배경이 신라인데, 무리한 설정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어요. 알면서도 이런 설정을 취한 이유는 삼국시조 중에서 여신으로서 위상을 갖고 있는 게 유화인 까닭이에요. 신라에도 알영이라는 여성이 박혁거세 신화에 등장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크지는 않아요. 이뿐만 아니라 한국에는 여신 대부분이 원형에서 많이 몰락한 상태입니다. 삼국 여신 중에서 본래 여신의 위상을 잘 갖고 있는 여신이 유화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유화를 등장하게 했죠..
도깨비, 한국에 살아남은 드문 신화적 존재
『두룬』에 등장하는 인문학적 통찰력이라 한다면, 도깨비 계보를 야금술에서 연금술로 이어지는 연장선에서 찾는다는 점일 텐데요. 도깨비의 종교사적, 신화적 의의에 관해 설명해 주신다면.
도깨비 원형이 무엇인지는 모르죠. 저도 『두룬』에서 추정해 본 것에 불과해요. 학자마다 의견이 많은데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건 없죠. 저는 도깨비를 대장장이 신으로 보는 게, 설득력 있다고 본 거죠. 이야기를 만들게 된 근거이기도 했고요. 도깨비라는 존재의 의의라 한다면, 견고한 유교사회에서 신화적 존재는 대부분 사라집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존재가 도깨비죠. 민속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는 민간설화를 보면, 지배자의 신이라기보다는 민중의 신이었죠.
책에도 그려졌지만 도깨비가 털이 많고 뿔을 갖고 있잖아요. 이런 도상학적 의의는 뭘까요.
도깨비뿐만 아니라 괴물이 전반적으로 그런 모양이죠. 털이 많고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도깨비를 대장장이 신이 아닐까, 이렇게 봤는데 대장장이 신이 대개 괴물이에요. 그리스 신화에도 헤파이토스는 절름발이에 추남이잖아요. 대장장이가 갖고 있는 힘이 막강하거든요. 막강하니 사람과 떨어진 존재로 그려지는 거죠. 실제로 아프리카의 한 설화에서는 대장장이만 모여 사는 마을이 있어요.
혹시 영화로 만든다면, 배역을 생각해 보셨나요.
야차는 강동원이 맡으면 좋겠는데요. 강동원은 미남이면서, 악인으로 변하면 무섭게 변할 것 같은 같은 매력이 있죠. 그리고 두룬은 원빈. 그 배우 다 데려오려면 제작비가 감당이 될까요. (웃음) 여성 배역은 잘 모르겠네요.
창작하면서 영감을 받는 곳이 신화라고 말씀하셨는데, 신화가 가진 매력, 어떤 게 있을까요.
신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논리적이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본질적인 이야기입니다. 『두룬』에서 연금술을 그렸는데, 연금술이 가장 처참한 부분과 영광스러운 부분을 같이 드러내는데요. 신화도 그래요. 고결한 부분과 추악한 부분을 다 보여주죠. 문학 시작할 때는 신화를 알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문학과 신화가 맞닿아 있더군요. 신화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심성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악마이기도 하고 천사이기도 하죠. 이런 인간의 양쪽 극단을 보여주는 게 신화입니다. 그러니 신화를 공부하면 할수록 인간을 향한 이해는 깊어집니다.
가벼움도 좋지만 진지함도 필요해
요즘 학생은 어떤가요.
제 시절에 비하면 아무래도 가볍죠. 전반적으로 어른이 되는 시간이 늘어난 세상이잖아요. 사회적 분위기가 이러니 가볍다고 나무랄 건 아니죠. 그래도 좀 진지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만들어온 덕목이 있는데, 그냥 갖다 버리기에는 아까워요. 이런 덕목을 등한시하지 않나,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교수님이 대학생 시절에는 실존철학이 유행했고, 문학 쪽으로도 불문학, 영문학, 독문학 두루 읽지 않았나요. 가벼워지는 사회 분위기가 점점 책을 안 읽는 세태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아예 없지는 않겠죠. 현대 작가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지만,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작가도 좀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 시기가 인류가 굉장히 깊이 내려갔던 때에요. 그런데 지금은 마치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던 거처럼, 부담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가 옳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작가도 좋지만, 대체로 가볍죠. 문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고 덜 인문학적이에요. 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가를 젊은 세대도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 작가가 대단한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향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걸 잃어버릴 거예요.
깊이 내려갔다고 표현하셨는데, 양차 세계대전 전후를 일컫나요.
그렇죠. 인류가 그 시기에 굉장히 깊은 인간 실험, 정신 실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인류가 문화적 성과를 냈다고 봐요. 이런 작품들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무게나 잡는 것처럼 매도 당하는 건 잘못이에요. 우리가 손해 보는 거죠.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데, 물론 하루키가 좋은 작가이긴 하지만 노벨상을 받을 작가는 아니지 않나요.
문화콘텐츠 강의하면서 한국의 문화콘텐츠 전반에 고민 많이 할 것 같아요.
한국 문화콘텐츠는 단기적으로 보면 가벼운 재치, 플랫폼을 다루는 기술적 능력은 장점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화 콘텐츠 경쟁력은 인문학에서 나오죠. 인문학을 제대로 가르쳐야, 지속적인 경쟁력을 가진 문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한 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겠죠. 저는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전달하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어요.
요즘 관심사는?
이번 학기에 삼국유사 강의를 했는데, 학생들이 의외로 재미있어 합니다. 그리스로마신화 강의할 때보다 더 반응이 좋아요. 민족의 근원이라는 게 만만하지 않구나, 이런 생각을 하죠.
그리스로마신화와 달리 삼국유사는 한국의 이야기니까,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을 직접 찾을 수도 있을 텐데요. 추천할 만한 장소가 있다면.
낙산사. 낙산사는 의상과 원효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의상이라는 인물과 원효라는 인물의 대조적인 성격을 상상해 보면 재밌을 거예요. 낙산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일화 하나하나가 주옥 같아요. 인터뷰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는 없겠고 하나만 꼽자면, 여성성이에요. 여성성을 두고 의상과 원효의 해석이 다른데, 이런 이야기를 알고 낙산사를 찾으면 우리의 정신사를 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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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룬김정란 저/김재훈 그림 | 웅진주니어
〈불의 지배자 두룬〉은 신라 시대 죽은 진지왕과 도화녀 사이에서 태어난 비형이 귀신 길달을 물리치는 ‘비형랑 설화’(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도깨비에서부터 연금술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다양한 신화적 이야기를 놀라우리만치 조화롭게 버무려 탄생시킨 한국형 장편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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