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변영주 감독의 <밀애>
<밀애>의 아이디어는 상당히 재밌다. 보통은 미흔 부부의 관계를 보며 ‘꽉 쥐어 잡힌 쪽’을 남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밀애>는 다르게 주장한다. 아냐. 어쩌면 미흔도 꽉 쥐어 잡혔는지 몰라!
글ㆍ사진 홍준호
201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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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이 아니라 클래식>의 마지막이 될 작품을 생각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라? 그러고 보니 여성 감독의 영화에 관해 한 편도 쓰지 않았네? 원래 마지막을 장식할 작품 후보로 올려놨던 몇 편이 전부 남성 감독들의 것이었다. 근데 위의 생각을 하는 바람에 그것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여성 감독의 작품으로 넘어갔다.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봐도 여성 감독의 수는 많지 않다. 한국의 경우에는 장편영화계에서 5~60년대에 <미망인>을 만든 박남옥과 남편인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감독생활을 겸했던 배우 최은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서 작품을 볼 수가 없는 홍은원과 황혜미 감독 정도만 있었던 걸로 알려졌다. 80년대가 되어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을 만든 이미례 감독이 데뷔했는데, 그 이후로 새로운 여성 감독이 만든 장편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90년대 중반을 넘어서야만 했다.


임순례, 이정향 감독과 더불어 90년대에 출연한 변영주 감독은 장편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만들다 2002년에 장편 극영화 데뷔를 한다. 그건 바로 전경린의 소설인 (팬들도 온전하게 제목을 기억하기 힘들어 한다는!)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원작으로 한 <밀애> 라는 작품이었으며, 홍보를 위한 캐치 프레이즈는 다름아닌 ‘격정 멜로’ 다. 그에 걸맞게, <밀애>는 초장부터 주인공 미흔 (김윤진) 의 정신세계가 산산조각 나는 묘사를 보여준다. 미흔의 남편 (계성용) 이 벌여놓은 불륜의 흔적이 도입부에서 한 방에 들통나고, 애꿏은 그녀의 머리만 불륜녀의 당당하고도 격정적인 공격에 의해 ‘까인다’. 이후로 미흔은 두통을 달고 산다. 그녀를 치료하고자, 혹은 평생을 한 마디도 못하고 쥐어 잡혀 살게 됐다고 보는 게 옳은 남편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전원적인 남해도로 이사를 가게 된다.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수순은 또 다른 불륜이다. 미흔은 치료 차 방문한 병원에서 의사인 인규 (이종원) 에게 섹스를 수단으로 하는 게임을 하나 제안 받는다. 두 사람 중 먼저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을 조건으로 걸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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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애>의 아이디어는 상당히 재밌다. 보통은 미흔 부부의 관계를 보며 ‘꽉 쥐어 잡힌 쪽’을 남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밀애>는 다르게 주장한다. 아냐. 어쩌면 미흔도 꽉 쥐어 잡혔는지 몰라! 생각해보니 말 된다. 작품 속에서 그녀도 남편과 진작에 갈라서야 했다고 자책하지만, 결국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식이 있어서 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두려웠는지 모른다. 남자에게도 딱히 유리할 것은 없지만 여자는 그보다 더 많이 불리하다. 작품은 불륜을 소재로 한 그저 그런 작품들과는 다른 위치와 시선을 이 때 획득한다.


이 작품이 등장하기 몇 년 전인 90년대 말의 한국은 유난히 성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었다. 덕분에 남성중심의 한국사회가 여성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뒤떨어지게 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예시로,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보고 나온 남자 관객들이 “정말로 여성들이 자기네들끼리 있을 때 저렇게 농도 짙은 이야기를 하는가?” 라고 묻지 않았다던가. 사실 2015년이 됐지만, 이후로 크게 나아진 거 같지도 않아 보인다. <밀애>에서 보여지는 미흔과 인규의 섹스 시퀀스에서, 전희에 몰입하고 또 쾌감을 느끼는 인규의 모습을 신경 써서 담아내는 카메라가 내 입장에서도 신기하게 보였으니 말이다. 작품의 카메라가 남자의 등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의 반응을 본다!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남성의 반응을 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남성 중심으로 흘러왔던 한국사회에서 작품의 이런 표현 방식은 말 그대로 ‘틈새’에 가깝다.


<밀애>에는 미흔이 그 ‘틈새’ 를 찾아내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 있다. 남해도에서 운전하던 그녀는 시골길에서 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거기서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한 사건의 현장을 둘러보게 된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 싸인 초가집의 모습인데, 도시화 되어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힘든 시골인지라 상당히 기이하다. 마치 또 다른 세계로 이끄는 토끼굴을 발견한 앨리스처럼 그녀는 그 곳을 누비다가 돌아온다. 이후 미흔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이런 밀회를 즐겨도 걱정 안 되냐고 되묻는, 자신이 해야 할 법한 말을 대신 하는 인규. 그리고 휴게소를 운영하는 여인 은연을 만나 연대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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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과 친구가 되는 미흔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각자 처한 상황은 다르고, 그로 인해 내리는 결정도 다르지만, 두 여자는 같은 이유로 서로 아파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불륜이 부정적일지, 긍정적일지는 경험하는 당사자가 알 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개인에게는 ‘새로운 경험’ 일 수 있으며 사회적인 통념으로 볼 때는 대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밀애>는 불륜을 통해 발생하는 로맨스를 정말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사랑을 조건으로 한 섹스 게임을 하며 되려 활력을 얻는 미흔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로 인해 결국 파국을 맞게 되는 두 사람의 모습 역시 외면하지 않는다. 불륜은 불륜이니까.


작품의 개봉 당시 평가들을 보면 꽤 호불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볼 때 (나쁜 의미로) 인상적이었던 평은 <씨네 21> 박평식 평론가의 별점 20자평였다. ‘새 애마부인이 노라를  흉내내며 지르는 ‘높은 목소리’’ 라는,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였던 <낮은 목소리>까지 인용한 아주 촌철살인의 가혹한 비판이었다. 글쎄? <밀애>의 미흔이 과거 한국에 존재했던 수많은 ‘부인’들의 또 다른 후예라고 보지는 않는다. 애마부인마저도 그토록 자유적이라서 내복, 혹은 나체차림으로 말을 타고 달렸지만 결국 말미에 이르러 용서와 화해와 이해를 구한 바 있다. (스포일러인가?) 그러나 미흔은 남편에게 굳이 용서를 구하려 들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죄값을 인정한 후 오롯이 지고 간다. 그마저도 우리가 전부터 봐 왔던 진부한 자아 찾기 정도가 아니겠느냐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파국과 더불어 미흔은 좀 더 전투적인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이 덕에 작품은 신파와 진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다.


<밀애>가 감동적인 건 나름의 각성을 하는 과정에서 느낀 행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부분에 있다. 미흔은 억눌러 왔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문을 찾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여는 열쇠는 불륜이었다. (이건 그냥 소재니까 윤리적인 논쟁은 접어두기로 하자.) 문을 통해 나가니, 앨리스처럼 아예 다른 세상으로 간 건 아니지만, 그녀는 세상과 그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여태껏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이 꽤나 이상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작품의 말미. 출판사를 경영했던 누군가의 아내였던 미흔은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횡단보도 중앙에 홀로 서 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많고 적은 쪽에 휩쓸리지 않은 채, 그렇게 서 있다.


<밀애>는 ‘자극적’ 이면서 ‘자유’ 롭다. 흔히 전자의 뒤에 붙는 표현은 ‘방종’ 이 자연스러워 보이며, 자유가 양립하긴 힘들다. 그러나 작품은 더 각박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의 초상을, 거부감 대신 해방감의 감정으로 섬세하게 전환시키는데 성공한다. <밀애>가 <애마부인>과 동일하게 평가 되어지는 것이 부당한 이유다. 동시에 이는 미흔을 연기한 김윤진의 연기력과 더불어 변영주 감독의 역량의 증명이기도 하다. 비록 개봉 당시 흥행성적이 썩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장편 극영화의 세계로 향해 날아오른 변영주 감독의 첫 비행기가 고른 착륙장은 기존 것과 꽤 색달랐다. 12년이 지났지만 김윤진과 변영주의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이종원의 경우에는…하도 이런 역할을 많이 해서. 근데 그 중에서도 괜찮지 않나 싶다. 크하하. 이렇게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의 마지막 글을 끝내고자 한다. 끝!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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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변영주 #밀애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
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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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5.01.26

남성중심의 한국사회가 여성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뒤떨어지게 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시기는 2015년에도 여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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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우산

2015.01.24

밀애 최근 영화거 아닌걸로 아는데요. 보진못했구요.자극적임에 각인되기 쉬운 성인영화가 좋은 평으로 남아있다니 궁금해지네요.김윤진씨 영화 자주 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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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em

2015.01.22

불륜 당사자가 나타나 여주인공을 몰아부치는 장면에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들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영화가 새롭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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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http://sega32x.blog.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