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달리기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 만을 바라보면서 달린 적이 있다. 그때 이어폰에서 리 오스카의 ‘San Francisco Bay’가 흘러나왔는데, 그 순간 나는 그 노래를 완전히 이해했다.
글ㆍ사진 론리플래닛매거진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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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이천희.jpg

PHOTOGRAPH : LEE CHUN-HEE

 

여행지에서 달리기

 

요즘은 아이패드로 손쉽게 외국 잡지를 구독할 수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외국 잡지를 정기 구독하려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들었다. 우편 요금이 구독료보다 비싼데다 잡지가 발간된 후 받아보기까지 시일도 오래 걸렸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내가 정기 구독한 잡지가 바로 <러너스 월드(Runner’s World)>다.


마라톤 전문 월간지긴 하지만, <러너스 월드>에는 다른 스포츠 잡지와 달리 엘리트 선수에 대한 기사가 많지 않다. 대신 날마다 달리기를 즐기는 일반인을 소개하거나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기사가 많다. 애당초 조깅을 즐기고 이따금 풀 코스 마라톤에 도전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창간한 잡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러너스 월드>는 라이프스타일 잡지처럼 느껴진다. 지면에서 소개하는 러닝화는 동네 스포츠용품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평범한 것이고, 대회에 대비한 식단 레시피도 거창하지 않다. 초심자를 위한 팁도 매번 등장하는데, 그 조언은 내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달리기에 관한 모든 격언은 삶에 대한 충고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기사를 잘 읽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시간이 흐르는 체감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스마트폰 같은 걸 열심히 들여보다 보면 이번 호를 미처 다 읽지도 못했는데 다음 호가 나오곤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는 디지털 버전을 구독하기 때문에 적어도 과월 호를 쌓아놓고 난감하게 바라보는 일은 없다는 점이랄까. 읽지도 않을 잡지를 산다는 찜찜한 기분은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정기 구독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사진 때문이다. 매월 목차를 보면, ‘동기 부여’에 관한 기사가 빠지지 않는데, 이는 초심자가 매일 달리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탄수화물 섭취보다 마음 가짐이 중요한 까닭이다. 그렇게 굳은 다짐을 하게 만드는 데는 사진이 글보다 낫다. 멋진 몸매로 땅을 박차고 나가는 선남선녀의 사진을 보고서도 소파에 누워 TV만 들여다보고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수록된 사진만 훑어본대도 <러너스 월드>를 정기 구독하는 보람은 충분한 셈이다.


이번 10월호만 봐도 그렇다. 펼치자마자(사실은 앱을 열자마자) 뉴욕 마라톤의 한 장면을 부감으로 찍은 사진이 나온다. 교통이 통제된 대교 위를 러너가 가득 메우고 있다. 알고 보면 태그호이어 광고인데도 달리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러너스 월드>에는 기사와 광고를 막론하고 이런 사진이 가득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섹션은 ‘레이브 런(Rave Run)’이다.


2면에 걸쳐 큰 화보를 싣는 레이브 런은 전 세계 다양한 지역을 달리는 러너의 모습을 소개하는 코너다. 예를 들어, 지난 8월호에서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는 두 러너가 등장했다. 9월호에 찾아간 곳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였다. 이 앵커리지 화보처럼 광활한 대자연을 배경으로 혼자 달리는 러너의 모습을 담는 게 레이브 런의 기획 의도다. 10월호에는 미시건 호수를 따라 절벽 위를 달려가는 여성 러너의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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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 LEE HAN-KOO


여행 가방을 꾸릴 때마다 러닝화를 빼놓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런 사진 때문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은 꽤 근사한 경험이 될 테니까. 그러나 막상 여행지에 가면 러닝화를 신을 기회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일단 지난 호에서 말했다시피, 소설가로 여행을 가면 술 마실 기회가 너무 많다. ‘달리기에는 역시 호수공원이 최고지.’ 취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동기 부여가 되려야 될 수 없다. 지리가 낯설다는 것도 문제다. 하루 이틀 머물러선 길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달려보면 알겠지만, 30분만 뛴다고 해도 의외로 긴 거리를 이동하게 된다. 적어도 2킬로미터는 왕복할 수 있는데, 문제는 차림새다. 달리기 복장이라면 기능성 셔츠에 반바지가 전부. 이런 복장으로 호텔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갔다가 무엇을 만날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결국 달린다고 해도 호텔 피트니스 센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몇 번의 달리기는 성공적이었다. 지난여름, 일본 미나미아소에서 아소산을 바라보면서 달린 길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인상적이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그대로 <러너스 월드>에 보내도 좋을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 만을 바라보면서 달린 일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이어폰에서 리 오스카(Lee Oskar)의 ‘San Francisco Bay’가 흘러나왔는데, 그 순간 나는 그 노래를 완전히 이해했다.


때로는 러닝화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 년 전, 단풍으로 물든 내장산에 갔을 때가 그랬다. 어차피 길이 막혀 자동차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운전자가 따로 있었기에 나는 차에서 내렸다.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원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그늘 아래를 달린다는 건 다시 누리지 못할 사치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달렸다. 아직까지는 내장산 단풍 아래를 다시 달려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사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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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10월 [2015]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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