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가 된 알렉스 카츠의 <꽃>
〈Cymbidium Yellow on Red〉, 단 한 송이로 완성한 회화의 정점.
글 : 홍경한 (미술 평론가)
202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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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작가 알렉스 카츠


알렉스 카츠(Alex Katz, 1927~)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퀸스 세인트 올번스에서 자랐다. 1950년대 초 뉴욕의 쿠퍼 유니온과 메인주의 스코히건 회화학교에서 수학하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카츠는 1954년 뉴욕 맨해튼 소재 소규모 화랑인 로코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해당 갤러리는 당시 뉴욕 아트씬에서 신진 작가들에게 중요한 발표 기회를 제공하는 전시 공간이었으며, 카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개인전은 공식적인 예술가로의 선언이었다. 카츠는 미국 현대미술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꾸준히 ‘구상 회화의 지속 가능성’을 실천했다. 미국 미술계가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 등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1950년대는 물론,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가 문화 현상으로 폭발하던 1960년대를 거치면서도 특정 그룹이나 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독자적인 구상회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그때부터 이미 형태적으로는 구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낯설 만큼 비서사적이었다. 당대 유행하던 미술 흐름의 중심에서 한 발짝 벗어나 항상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추상적 경향 사이에 위치했으며, 매 시기마다 대안적인 시선을 제공한 ‘경계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계성은 그의 위치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다.


작업 중인 알렉스 카츠, 2021. Photo: ⓒ Juan Eduardo 출처: Harper's BAZAAR


작업 세계의 변화와 <꽃> 시리즈의 등장


카츠의 주요 작업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극적으로 크롭 된 인물의 대형 캔버스 혹은 다중 패널 작품들로 발전했다. 당시부터 그는 알루미늄 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컷 아웃이라는 이름으로 회화와 조각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도 이어갔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는 스스로 ‘환경적’이라고 규정한 대규모 풍경화에 집중했다. 5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다뤄온 인물화도 의미 있는 범주에 들었다. 그의 아내이자 뮤즈였던 에이다의 초상화 등이 대표작이다. 대체로 추상과 재현의 양면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사실주의에 입각해 있다.


풍경과 인물 못지않게 눈여겨봐야 할 작업은 <꽃> 시리즈이다. 풍경화와 인물화에서 보여준 그의 독특한 조형 언어가 꽃이라는 소재를 통해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꽃> 연작은 그의 화사(畫史)를 가로지르는 결정판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알렉스 카츠의 작업에서 꽃이 핵심 주제로 등장한 건 1966~1967년경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계산하면 얼추 약 60년 가까이 된다. 그룹 초상화 <론 파티(Lawn Party)>(1965)에서 느꼈던 움직임, 다시 말해 집단 초상화의 감각적 부재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시발점이었다. 영감을 준 건 경력 초기부터 매년 수개월씩 머물렀던 메인주의 목가적인 시골 풍경이다. 특히 들판에 아무렇게나 핀 채 빛에 발화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야생화는 그 부재를 메울 수 있는 최고의 소재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꽃 대신 주로 화가와 시인 등의 예술가, 그리고 그를 둘러싼 동료들의 사회적 세계를 묘사했다. 1980년대에는 패션모델들을 주제로 한 초상화에 집중했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는 다시 풍경화로 돌아갔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카츠는 약 35년의 ‘공백’을 깨고 재차 꽃을 주제로 한 작업에 공을 들였다. 공백기 동안 카츠는 다양한 주제와 기법을 실험했다. 더불어 그의 회화적 어휘와 기술적 숙련도는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갔다. 보다 대형화 되었고 회화적인 스타일로 변모했다. 이윽고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풍경화에 대한 관심은 새천년을 맞이함과 동시에 만개한 꽃들이 캔버스 전면을 뒤덮는 카츠만의 독특한 작품들로 재탄생했다.


론 파티 Lawn Party(1965) © Alex Katz. Collection of the Museum of Modern Art 출처: Financial Times


<꽃> 시리즈의 조형적 특징

 

알렉스 카츠는 익숙한 대상을 통해 낯선 시각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현대 회화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색했다. 그 중에서도 훗날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 <꽃> 시리즈는 실재하는 어떤 식물이라기보다는 회화가 지닌 생명력의 은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사에서 흔하게 접하는 정물화가 아니라 회화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미학적 실험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카츠의 후기 양식을 대표하는 주제로 자리매김한 <꽃> 시리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 과감한 단순화와 평면성이다. 과거 네덜란드 정물화나 오늘날의 꽃 그림의 다수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정물화는 꽃의 형태, 질감, 배치 등을 섬세하게 묘사하지만, 카츠는 그러한 묘사를 거부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꽃을 정물이 아닌 인물화처럼 다뤘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대담한 클로즈업과 평면적 색채 기법을 적용했고, 인물 초상화에서 보여준 강렬한 존재감을 꽃에게도 부여했다. 복잡한 구조는 지워냈으며 색 면(color field)에 근접한 평평한 색채 덩어리와 단순한 윤곽선만을 남겼다.


꽃잎의 질감과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했고 꽃이라는 ‘작은’ 대상을 캔버스 전체에 클로즈업시켜 확대했으나 생명력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래픽 아트와 광고 포스터의 조형문법이 적용됐다. 광고판의 대담한 색채 블록, 영화와 텔레비전의 크로핑 기법, 그래픽 디자인의 단순화된 형태가 그것이다. 주요 작품 중 하나는 <붉은 바탕의 노란 심비디움(Cymbidium Yellow on Red)(2020)이다. 심비디움은 난초과에 속하는 꽃이다. 린넨에 유채로 그린 이 작품은 꽃 자체가 아닌 꽃을 본 순간의 감각을 표현했다는 게 적절하다. 감상자에게는 즉각적이고 지각적 자극을 이끌어내는 카츠 회화의 전형이다. 다만 이 그림의 경우 군락을 이룬 식물의 유기적 배열이 아닌 한 줄기 단독 식물로 표현되어 있는데다, 병렬적 평면 배치가 많은 여타 꽃 그림에 비해 중심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드문 사례에 속한다. 


Cymbidium Yellow on Red(2020), SeoulAuction: 2024.09.11 Lot. 52 출처: SeoulAuction


실제로 <장미 꽃봉오리(Rose Bud)>(2019)와 <노란 진달래(Azaleas on Yellow)>(2021)처럼 한두 송이만 등장하는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무리 지어 있다. <노란 튤립(Yellow Tulips)>(2014)이나 <흰 장미들(White Roses)>(2014), <여름 꽃(Summer Flowers)>(2018) 연작 등만 봐도 그렇다. 이는 정물화의 고전적 방법론에서 탈피해 일상적 사물을 낯설게 보게 하는 ‘시각적 전환’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독립된 조형 언어로서의 색채다. 카츠의 색채는 자연을 재현하려는 충실함에 앞서 작가 자신의 감정과 형식에 부합하는 선택이라는 게 맞다. 즉, 그에게 색은 자연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시각적 충격과 구조적 조화’를 위한 수단이다. 시각적 충격과 구조적 조화는 색의 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카츠는 형상과 색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첫 번째 붓질이 마르기 전에 마지막 붓질을 가하는 웻-온-웻(wet-on-wet) 기법을 사용하며, 유화 물감이 기름과 섞임으로써 발생하는 불완전한 선명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보색을 배치한다. 이것이 그의 꽃 그림들이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무리지어 등장하는 꽃들, Red Dogwood I(2020), Sotheby's Hong Kong: 2022.04.27 Lot. 1129 출처: Sotheby's


회화의 지속 가능성을 증명하다 


1970년대 이후 서구 미술계에는 회화 매체 자체가 퇴조했다. 설치,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아트, 디지털 아트 등이 범람하면서 많은 작가들은 ‘회화의 죽음’이라는 자조 섞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카츠는 1950년대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개인전과 그룹전을 통해 구상회화 작업을 지속하며 회화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변함없이 증명해 왔다. 그는 회화가 감정이나 서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도 정서적 충만감과 조형적 충격을 동시에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카츠는 회화를 감각적이고 지적인 매체로 지속시킨 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1927년생이니 올해 그의 나이 97세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살아있는 경험과 명확한 시각은 변한 게 없다. 카츠는 지금도 꽃의 본질을 통해 사물에 보다 깊게 다가설 수 있다고 여긴다. 여전히 복잡한 개념과 상징의 세계 대신 시각적 명료성과 간결성을 추구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부터 작가는 메인과 뉴욕의 스튜디오를 오가며 아름다운 계절과 풍경을 기록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전시 활동도 활발하다. 2022년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을 포함해 2024년 여름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어 롯데뮤지엄(2018)과 대구미술관(2019)에서의 전시에 이어 2021년에는 서울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테이트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 모마 미술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등 전 세계 100곳이 넘는 국·공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카츠는 인상주의 작가들 마냥 꽃에 밝은 색상을 부여하는 자연의 빛과 대기를 직접 포착하며 작업한다. 인상에 잡힌 꽃은 우선 사진에 담고, 이후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큰 캔버스로 옮겨져 재구성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꽃을 어떻게 보는가를 해석하고, 그것을 회화적 문법으로 번역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그의 꽃들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제안한다. 꽃이라는 소재가 갖는 자연의 시간성, 형태의 다양성, 색채의 변이성을 최대한 추상화하고 회화의 언어 아래 놓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꽃은 분명한 구상성을 띠면서도 일종의 기호로 받아들이게끔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거치며 진화한 2010년대 이후의 시리즈는 이제 독자적인 장르가 됐다.


뉴욕 스튜디오에서 작업중인 알렉스 카츠, New York City, 2024. Photo: Naeem Douglas 출처: MoMA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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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 (미술 평론가)

미술 평론가, 전시 기획자. 미술전문지 월간 <미술세계>, <퍼블릭아트>, <경향아티클> 편집장을 거쳐 강원국제비엔날레 예술총감독(2017~2018), DMZ문화예술삼매경 예술감독(2021~2022)을 지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2018~2022), 대림미술관 사외이사(2015~2019) 등을 역임했다. 현재 <경향신문>과 <메트로신문> 고정 필진이다. 《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2017)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