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가 트라우마로 되는 이유는 표현이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정아 교수는 강연을 시작하자마자 다소 무거운 주제를 꺼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상처가 생기면 그걸 말로 표현하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것조차 상처가 되어서 심리적으로 그것을 억누른다고 해요.”
우정아 교수는 트라우마 혹은 상처가 생겼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나 논리적인 서사 구조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미술가들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오늘 강연의 문제의식은 미술가들이 어떤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상실과 트라우마를 표현해내고 극복하는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은 더 이상 미술품과 만나는 공간이 아니다
“니콜라 브리오라는 프랑스의 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는 1998년 『관계성의 미학』이라는 책을 냈어요.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 미술 작품의 시대적인 흐름을 ‘관계성의 미학’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내잖아요. 근데 이제는 그들이 만드는 것이 미술품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정아 교수는 이와 같이 말하며 미술은 이제 독립된 사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회적 맥락 안에서 미술이 된다고 말했다.
“관계성의 미학’이라는 것은 관객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해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고 일시적으로 그 공간에 모여 있었을 뿐이지만,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집단이 됩니다. 이전의 미술품들은 작가가 다 완성을 한 작품을 전시실에 놓고, 우리는 감상을 합니다. 관객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받아들이고 오겠죠. 그러나 이 관계의 미학에서 생겨나는 의미는 작가가 제어할 수가 없어요. 누가 올지,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정아 교수는 동시에 이러한 현상이 미술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미술도 사회가 만들어 낸 생산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가들도 산업사회에 종사하는 직업인이죠. 근데 물건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사회 전체에서 변화한 것처럼 미술가들이 미술작품을 만드는 방식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이 쓴 책 중에 『체험의 경제』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은 과거에는 상품을 만들어냈지만, 산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서비스업이 중시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 서비스 이후에 소비자가 원하고 기업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체험이라는 것이죠.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뛰어난 손재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미술가였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애써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 사이에서 의미를 창출해내는 사람들도 미술가가 된 것입니다.”
현대인의 기억법,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
“관계의 미학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가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우정아 교수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오리지널이 좋으세요, 아니면 짝퉁이 좋으세요? 잃고 싶으세요, 가지고 싶으세요? 당연한 질문이죠? 우리는 오리지널이 좋고 당연히 소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소유할 것이라면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없어지는 건 무의미하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가치의 위계질서입니다. 그런데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작품을 보면 전혀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납니다.”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작업은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종이 더미를 쌓아놓은 작품을 선보이면서 ‘Veterans Day’와 ‘Memorial Day’라고 제목을 지었습니다. 이날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현충일 같은 공휴일입니다. 미국은 이날들에 큰 세일을 해요. 펠릭스는 그것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기리며 물건을 산다는 것이죠. 이게 자본주의의 본질 같은 것이에요.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펠릭스는 그에 대답합니다. ‘내가 쌓아놓은 종이 더미들, 원하는 만큼 가져가.’ 그렇게 되면 쌓여있던 종이는 점점 없어집니다. 그렇게 다 없어져 갈 때쯤이면 사람들이 한 번씩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작가가 바라는 것이었죠.”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는 이후에는 사탕 더미를 쌓아놓기 시작했다고 우정아 교수는 말했다.
“펠릭스의 사탕 작품들은 사탕의 종류에 따라서 제목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탕 작업들이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을 달고 있어요. 예를 들어 아버지의 초상, 이런 제목을 가진 사탕 더미가 있다면 작가의 아버지가 좋아하던 맛의 사탕이 아버지의 몸무게만큼 쌓여있습니다.”
우정아 교수는 이를 통해 관객들이 사탕을 가져가는 행위가 매우 특이해진다고 설명했다.
“나는 가지고 싶으니까 사탕을 원하는 만큼 가져서 빨아먹는데, 그게 어찌 보면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사람이 좋아하던 사탕을 내가 먹고, 그것이 녹아서 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우정아 교수, 문제적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제가 지금까지 관계라고 말하며 설명해 드리니까 굉장히 아름다운 것만 상상을 하실 텐데요. 사실 관계라는 것이 늘 그렇게 유쾌하고 아름답지는 않죠. 그래서 이번에는 문제적인 작가들에 대해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정아 교수는 대표적인 작가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꼽았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여성 퍼포먼스 작가이다.
“아브라모비치는 1971년 굉장히 특이한 퍼포먼스를 합니다. 자신이 방에 서 있고, 그 앞에 탁자를 놓고 그 위에 여러 물건을 올려놓습니다. 거기에는 장미꽃도 있고, 쇠사슬, 칼, 총까지 있습니다. 작가는 그 앞에 가만히 서 있고, 관객들은 탁자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 작가에게 아무 행동이나 해도 됩니다. 작가가 정말 가만히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관객들은 작가의 몸에 장미 가시를 찔러 넣고, 옷을 다 찢고, 총을 쏘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우정아 교수는 이 관객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아브라모비치는 늘 이렇게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넣어요. 그런 상황에서 과연 자신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는 평범한 사람들이 미술이라는 아름다운 대의를 지니면 하면 안 되는 일들을 남에게 쉽게 행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문제적 작가로 우정아 교수는 산티아고 시에라를 꼽았다.
“산티아고 시에라는 낙후한 지역에 가서 불법 이주 노동자들 같은 사람들을 돈을 주고 고용해서 그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문신을 하거나, 미술관에서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게 만듭니다.”
우정아 교수는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작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시죠?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착취하고 물질화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우리는 미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고 싶은데, 시에라의 작품을 통해서는 불편함과 부당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에라가 하는 이야기는, 이게 사회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미술관 밖에 경비원도 지금 8시간째 서 있는데, 저 사람들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행동에만 분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우정아 교수는 산티아고 시에라의 작품처럼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품들의 의미가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시에라의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사람들을 활용하는지를 미술관 안에서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의 목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다, 프란시스 알리스
“오늘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는 프란시스 알리스입니다.”
우정아 교수는 강연실 앞 화면에 커다랗게 ‘Maximum Effort, Minimal Result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성과를)’라는 문구를 띄웠다.
“알리스의 목표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목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Loop’라는 작품입니다. 멕시코에 티후아나라는 도시는 미국의 샌디에이고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고 해요. 근데 알리스는 티후아나에서 샌디에이고로 가기 위해 전 세계를 거치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쓸데없는 일이죠?”
하지만 우정아 교수는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굉장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티후아나로 넘어가는 일이 참 별일 아닙니다. 근데 샌디에이고 고속도로에 가면 굉장히 특이한 표지판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낙석 주의나 야생동물 출현 주의가 쓰여 있어야 할 표지판에 불법 이민자를 주의하라는 표지판이 있죠. 샌디에이고의 사람들은 야간도주해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멕시칸 가족을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리스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국경을 건너는 것이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알릭스처럼 완전히 돌아가는 것만큼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이렇게 우리가 우리 사회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합니다.”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프란시스 알리스의 작품은 ‘믿음이 산을 옮길 때’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페루의 리마의 국경 지대에 있는 모래 산이 있는데, 자원봉사자 500명을 모집해서 그들이 온종일 삽질을 하여 모래 산을 옮기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삽질이죠. (청중 웃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바로 남미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잘 살아야지 하면서 산업화, 근대화하고 발달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합니다. 프란시스 알리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데 왜 변하는 게 없지? 그러면 우리가 처음부터 목표 설정을 잘못한 건 아닐까?”
“알리스가 ‘믿음이 산을 옮길 때’ 작품을 진행하면서, 모래 산이 옮겨가긴 했대요. 10cm 정도? 바람 한 번 불면 돌아갈 정도겠네요.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이 결심했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열심히 하는 것. 그리고 다 하고 나서 함께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죠. 알리스는 이 작품을 통해 남미가 처한 현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개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잠깐이나마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일시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강연 내내 현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작가들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우정아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만큼은 현대미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점을 제시했다.
“프란시스 알리스는 ‘믿음이 산을 옮길 때’에 참여했던 500명의 젊은이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전파될 때 자신의 믿음이 전해져서 변화가 일어날 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술은 사실 상당히 이상적이에요. 따라서 사람들이 관계를 만들고, 가치를 공유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처럼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비전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미술관 안에서 우리끼리 즐기고 도취해 있다가 끝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분명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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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 우정아 저 | 휴머니스트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잃어버린다-현대미술로 읽는 상실과 트라우마 우리는 늘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고 가족이 죽기도 하며,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기도 한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상실’과 그 이후 찾아오는 ‘트라우마’를 예술 행위로써 애도하고 증언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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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영(예스24 대학생 리포터)
좋은 책, 좋은 영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