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 저/조영일 역 | b(도서출판비)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일본의 근대문학이 자유민권운동의 실패라는 퇴행적 현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썼다. 정치적 실천의 좌절이 지식인들로 하여금 “내면”과 “풍경”으로 후퇴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6~70년대 대중운동의 실패로 일본에서 유사한 현상, 즉 정치에서 미학으로 후퇴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된 90년대 말 한국 역시 유사하게 정치적 실천의 목표의식을 상실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영화로, 문학으로 즉, 정치에서 미학으로 물러서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책은 탈주의 시대인 90년대에 대한 암묵적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었다. (근대) 문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가라타니 고진은 당연한 과정처럼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고 문학평론을 넘어 사회이론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을 거쳐 저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세계사의 구조』는 역사를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도식적인 틀에 짜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가라타니 고진이 『세계사의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내놓았다는 근작 『철학의 기원』은 이런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소노미아, 아름다운 무지배 상태
『철학의 기원』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핵심 주장은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폴리스들에 이소노미아라는 무지배의 상태가 존재했다는 것이며 철학의 기원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 이오니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새로운 주장은 전적으로 이소노미아에 대한 해석과 그것이 이오니아에서 비롯했다는 데 있다.
이소노미아는 ‘같다’는 의미를 가진 ‘이소(iso)’와 ‘노모스’의 합성어이다. 흔히 법으로 번역되는 ‘노모스(nomos)’는 자연을 의미하는 ‘피직스’에 대비되는 말로 인간적 질서, 즉 법, 규범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소노미아는 주로 법과 규범ㆍ권리에서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가라타니 고진은 데모크라시와 달리 지배 자체를 극복하는 대안적 모델로서 이 ‘무지배’라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발견한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 이소노미아는 아테네에서 참주정이 전복된 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 의해 성립된 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되었고, 헤로도토스 시대까지는 데모크라시와 같은 의미의 말로 여겨졌다. 이소노미아에 지배의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솔론의 체제도 훌륭한 법(질서)이라는 의미의 ‘유노미아(eunomia)’라고 불렸다. 그래서 이소노미아는 시민에게 차등적 권리를 부여한 솔론의 유노미아에 대비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데모크라시라는 말은 페리클레스 사후 시민전체가 아니라 하층민들의 지배라는 의미로 변형되었고, 그 무렵 이소노미아는 더 이상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지 않았다.
저자는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이 스스로 일하는 사람들의 동등한 연합체였다고 추정한다. 이오니아는 전통적인 씨족사회에 얽매인 본토와 달리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소노미아 같은 원리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오니아의 평의회들은 자유로운 상공업자들의 평의회였기 때문에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달리 군사적 성격이 약하고 노예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리스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오니아 같은 타지로 떠난 것은 그가 묘사하듯 자유로운 개인이 주인 없는 광활한 땅에 가서 땅을 평화롭게 나누어 갖는 그런 낭만적인 과정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 폴리스들의 식민지 개척단이 성인남자들로만 구성된 군사단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이 사는 곳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도시를 세웠다. 식민도시 건설은 면밀히 계획된 집단적 이주였고, 그 자체로 학살과 전쟁의 과정이었다. 때문에 이오니아 사회를 전쟁도 노예도 없는 목가적 사회라는 가라타니 고진의 묘사는 근거가 없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대체로 귀족들의 과두정치에서 참주 독재를 거쳐 이소노미아 또는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체제로 넘어갔다. 폴리스가 성립되기 전부터 그리스 본토에는 좋은 땅을 차지한 토지귀족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전차와 같은 우수한 군사 장비를 갖출 수 있는 능력을 기초로 공동체의 정치적 지배력을 획득했다. 이들은 대개 신들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귀함을 내세우며 아레오파고스 회의와 같은 귀족회의를 통해서 폴리스를 지배했다.
세계를 신들의 피조물이 아니라 운동하는 무한한 물질로 본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의 주장은 사실 신들을 조상으로 내세운 토지귀족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에 반해 사회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지배체제를 옹호한 보수적인 사상가들은 세계의 물질성이나 운동성을 부정하려 했다. 이오니아에서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사회 전반이 물질과 운동에 대한 논쟁으로 시끌벅적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상운동을 이소노미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처럼 토지귀족의 지배가 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아이디어들이 왜 나왔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 철학의 계승자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이오니아의 철학, 이소노미아의 원리를 계승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본다. 그러나 이오니아학파의 진정한 계승자는 저자 스스로 인정하듯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와 그의 제자들이 비판해 마지않은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은 대개 이오니아나 그 문화를 이어받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폴리스 출신들로 이오니아학파의 사상가들에게 직접 사사 받은 경우가 많았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에 대해 소피스트들이 외국인들이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에게 진짜 철학을 가르칠 수 없어서 실용적인 지식만 전수했다는 다소 궁색한 논리를 펼친다.
그는 소피스트들이 돈을 받고 지식을 팔았다는 플라톤의 중상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며 소피스트들이 부유한 자들에게 지식을 팔았다고 곳곳에서 강조한다. 그러나 『소피스트 운동』을 쓴 조지 커퍼드가 지적하듯이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같은 귀족 출신의 소크라테스 제자들이 소피스트들을 비난한 것은 돈을 받고 지식을 팔았다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돈을 받으면 “누구에게나” 지식을 전수했다는 데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지혜와 덕이 전수될 수 있다고 믿는 교육자들이었고 진리는 다수 대중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 상대주의자였다. 아테네 귀족들이 소피스트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던 것은 그들은 통치자의 자질인 덕(德), 그리스 어로 탁월함을 뜻하는 아레테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레테는 원래 그리스 귀족들의 군사 지도자적 성격에서 기원했고 정신적인 것만큼 신체적이고 혈통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레테를 가진 자들이 폴리스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바로 귀족정, 즉 최우수자 정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주로 말과 논리의 힘에 의해 이러한 탁월함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아레테를 가르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그것을 보다 전문적인 지식의 영역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메논』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병자는 결코 전문적으로 훈련된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비유를 들어 공직자를 추첨으로 선택하거나 대중들의 투표에 의해 선택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은 페리클레스 이래 데모크라시라 불렸던 아테네 정치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자가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소크라테스가 민회가 아니라 광장에 나가 여성, 노예 같은 데모크라시에 소외된 자들에게 이야기하며 이소노미아를 회복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데모크라시에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볼 때, 그가 주로 어울린 사람들은 여성이나 노예는커녕 명문귀족의 자제들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명성을 얻은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그려져 있듯이 그가 당대의 유명한 소피스트들을 도장 깨기 하듯이 찾아다니며 논쟁을 걸고 조롱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한테 달라붙어 귀찮게 한다고 하여 “등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데모크라시와 소피스트들을 미워하던 명문귀족가의 자제들은 환호하며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하게 만든 고발장은 두 가지 죄목으로 그를 고발했다. 공인된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은 구실에 불과했지만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두 번째 고발은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당시는 스파르타가 세워놓은 귀족들의 과두정이 시민들의 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데모크라시가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귀족의 자제들이었고 이들 중에는 과두정의 지도자 크리티아스나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를 넘나들며 국정을 농단한 알키비아데스 같은 체제에 위협적인 인물들도 많았다. 그가 시민혁명으로 가까스로 회복된 데모크라시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소노미아를 지향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격한 극우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끝
가라타니 고진은 이오니아 사회와 이소노미아라는 원리를 통해 자신이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 사회의 원리를 보여주고, 그것을 지탱하는 “철학의 기원”을 다시 잡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공업자들의 평의회로 표현된 이소노미아는 마르크스의 코뮤니즘보다는 프루동 류의 소소유자들의 연합사회를 연상시키며 그의 최근 지향점이 어디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데모크라시를 현대의 자유민주주의에 대입시키고 이소노미아를 평의회에 대입시키지만, 안타깝게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데모크라시가 가리키는 것은 오늘날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같은 일반적인 레토릭과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에 데모스는 전체 시민이 아니라 재산 없는 최하층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고, ‘통치하다’의 뜻의 ‘-아르키’에 비해 ‘-크라시’라는 접미사는 (권력을) 움켜쥔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래서 아마도 데모크라시는 당시의 그리스 귀족들에게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와 비슷한 어감으로 들렸을 것이다. 아테네의 데모크라시가 여성, 노예, 외국인을 배제했고 제국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한계지만 코뮌이나 소비에트에 더 가까운 것은 아테네의 데모크라시였다. 그래서, 『철학의 기원』은 가라타니 고진의 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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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기원가라타니 고진 저/조영일 역 | b(도서출판비)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2012)은 [세계사의 구조](2010) 이후 약 2년 만에 씌어진 역저이다. 세계가 주목한 대작 [세계사의 구조]에서 간략적으로 다룬 ‘철학의 기원’과 ‘민주주의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작이다.
이정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사회활동 틈틈이 추리소설, 교양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정해진 원고 분량를 훌쩍 넘기며, 수많은 고유명사를 흩날리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말투가 경직되는 그는 진정한 90년대 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