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준 “즐겁고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충분하다”
저에게 맞는 삶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건네는 질문 중의 하나가 ‘어떻게 용기를 받았습니까?’인데, 사실 거창한 용기가 아닌 당연한 반사작용이었습니다. 간절히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걸 이루어 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싸워야 합니다.
글ㆍ사진 민재원(예스24 대학생 리포터)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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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저녁, 조병준 작가의 옥상 정원에서 『기쁨의 정원』 출간 기념 독자와의 만남이 있었다. 199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후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따뜻한 슬픔』 등을 쓴 조병준 시인은 약 2시간에 걸쳐 『기쁨의 정원』의 주요 배경이 되기도 하는 그의 소담스러운 정원에서 꾸밈없는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옥상 정원에 독자들을 초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자들을 집으로 모신 건 처음이네요. 이따금 블로그를 통해 왕래가 잦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더 친해지면 집으로 초대하곤 했지만. 8년 만에 신간이 나왔으니 재미나게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는 마음에, 그리고 책의 카피가 ‘내 정원으로 놀러 오세요’이니 초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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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가꾸어낸 기쁨의 정원


책은 ‘옥상 정원’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작가가 보살피는 꽃을 비롯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주축이 된다. 식물에 대한 그의 보살핌과 애정을 통해 그의 원예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의 원예 실력은 어떻게 터득했을까.


“당연하게도 쉽게 터득할 수는 없었죠. 무작정 심고 돌보며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식물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옥상 정원을 만들면서 시작했어요. 흔히 말하는 ‘초짜’였고 평소 매뉴얼을 보는 성격이 아닌지라 꽃도 무작정 기르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 보니 처음엔 수많은 꽃이 죽어 나갔어요. 어떤 식물은 흙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물을 주어야 하는데 무작정 물을 주기만 해서 뿌리가 다 썩어버리기도 했죠. 그래도 조금씩 기르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로 주면 되는지 차츰 알고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어요.”

 

작가는 이화마을의 옥상 정원이 있는 그의 집에서 자라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그만큼 추억이 많은 ‘고향’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그는, 유년시절과 지금 동네의 모습에 대한 차이를 이야기했다. 특히 서서히 모습이 바뀌는 이화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기억나는 유년 시절의 집이 이 집뿐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이 동네 원주민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복덕방 아저씨는 저를 ‘어이, 조사장’하고 불러요.(웃음) 골목의 모습은 어렸을 때보다 많이 바뀌었어요. 그래도 지금 옥상에서 아래쪽으로 보이는 단층집은 신축을 못 하기 때문에 (이화마을 아래로) 내려가는 골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요. 원래 올라오는 길에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옛날 양복점, 세탁소, 채소 가게가 있는 정도였는데, 벽화가 그려진 쪽은 많이 바뀌었어요. 전망이 좋은 곳에는 카페가 잔뜩 들어서고, 조금 소란스러워진 거죠. 얼마 전에는 근처에 살면서 바느질하시던 분이 낡은 집을 사서 작업실 겸 카페로 만들었더라고요. ‘큰일 났다, 다들 바뀌는구나’ 싶었어요. 자꾸만 모습이 변하니까.”

 

작가는 독자들에게 씨앗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각기 다른 꽃의 씨앗을 주면서 원하는 씨앗을 가져가라며 호쾌하게 웃었다. 꽃을 심고 기르며 정원을 가꾸는 나름의 방침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알려주었다.


“정원은 부지런해야 해요. 특히 7, 8월에 비가 오지 않으면 하루에 두 번씩은 물을 줘야 하거든요. 그리고 제일 힘든 것은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를 씨앗을 관리하는 거예요. 몇몇은 어릴 때 살짝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지금 따로 화분에 기르는 범부채, 나팔꽃이 그렇게 자리 잡았어요. 옥상까지 찾아온 녀석들이니 ‘어디 한 번 잘 살아 봐라’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내어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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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준 시인이 보았던 세상


『기쁨의 정원』이 출간되기 전 그의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작가는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과연 그의 여행은 어떻게 시작하여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집밖을 나가는 것은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었어요. 중학생 시절 했던 일이 버스를 타고 종점으로 가는 것이었거든요. 종점이었던 그 시절의 면목동, 수유리는 외진 시골이었어요. 제가 사는 동숭동과 너무나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좋았어요. 일종의 방랑기였죠. 대학생 시절에는 어머니와 장사를 하느라 돌아다니지 못하다 군대 가기 전, 난생처음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 울산 등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따지자면 그것이 최초의 여행이었네요. 이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 번씩 갔다 오다가 만 나이 서른이 되면서 직장을 옮기고, 한 달 가량의 여유가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깥 나라 여행을 해보자 싶었어요. 그래서 한 달만 인도 여행을 간다고 떠났다가 석 달 반 만에 돌아왔어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도 한 번 고삐가 풀리니 묶을 수가 없더라고요. 무엇보다 첫 여행에서 삶의 방식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거죠. 그래서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싶었어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지만 작가의 행동을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는 없다. 주어진 안정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과연 작가는 어떻게 과감히 안정된 직장을 그만둘 만큼의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저에게 맞는 삶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건네는 질문 중의 하나가 ‘어떻게 용기를 받았습니까?’인데, 사실 거창한 용기가 아닌 당연한 반사작용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자면 이런 거예요. 수영을 못 하는데 물에 빠졌어요. 물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누구라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겠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만족하고 지낼 수 있는 건 아직 그만큼 물이 차오르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그게 결코 나쁜 건 아니에요. 즐겁고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충분해요. 다만 저에게는 그것이 발버둥 쳐 나와야 했던 것이고. 간절히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걸 이루어 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싸워야 합니다. 그것을 행했을 뿐이죠. 저는 하고 싶고,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아요.”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정원을 구경한 작가는 책을 통해서도 외국인 친구의 정원을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정원에 피어난 식물을 하나씩 알려주며 우리나라의 정원과 유럽 국가의 정원 풍경의 차이를 알려주었다.


“우리나라는 정원을 가꿀 때 식물과 꽃의 종류별로 따로 자리를 정해요. 반면 유럽의 정원은 마치 한 번에 씨앗을 흩뿌린 것처럼 자리의 구분 없이 함께 키우더라고요. 그래서 마치 야생 들판처럼 보여요. 이건 정원뿐만이 아니라 꽃다발을 만들 때도 차이가 나요. 그들은 꽃다발을 만들어도 여러 꽃을 뒤섞어서 만들어요. 작게 보면 정원을 가꾸고 꽃다발을 만드는 문화일 수 있지만, 크게 보면 그들의 섞임의 문화로 볼 수 있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단일종 중심으로 주연과 조연을 따로 만드는데 그들은 주연과 조연의 차이가 없이 어우러지니 한편으로는 왠지 부러웠어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책 제목 『기쁨의 정원』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과연 제목을 어떻게 정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책에 수록된 글 「나는 내 친구의 정원을 훔쳤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제목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제목은 스위스 친구 아르노의 정원에서 따왔어요. 햇빛이 드는 정원이 무척 예뻤어요. 자그마한 산속의 시골 마을이니 온 동네가 정원이었어요. 아르노의 집에 머무르면서 낮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지치면 정원으로 돌아와 쉬었어요. 그러다 시가 떠오른 거죠. 「기쁨의 정원」이라는 시를 금방 쓰고, 이걸로 책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즈음 아르노의 다락방에서 작업하면서 『정당한 분노』를 썼더니 탈진해버렸거든요. 그래서 『기쁨의 정원으로 조금은 쉴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하자 싶었어요. 2008년에 기획하는 과정에서 그 시를 통해 제목이 쉽게 나왔어요. 두 번 생각할 일 없이 정한 거죠."

 

"사실 책을 낼 때마다 제목이 항상 힘들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지만 제목은 꼭 제가 붙어요. 유일하게 제목을 짓지 못한 책이 있어요.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라는 책인데, 원래는 『길에서 만나다』라는 제목이었어요. 책이 절판되었다가 2005년에 예담 출판사를 통해 재판을 했는데 한 번 절판 된 책은 제목을 같이 가져올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제목을 계속 쓰고 싶었지만 새로운 제목을 위해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제목을 정해주었어요.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라고. 그 외에는 전부 내가 지었어요. 혹자는 ‘그 재주로 카피라이터 하지 그랬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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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준 시인이 말하는 글과 치유, 그리고 자유와 청춘


작가의 글을 읽으면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이따금 독특하고 솔직한 표현으로 눈길을 끌기도 한다. 그의 글을 통해 감명을 받은 한 독자는 그가 글을 쓰는 목적과 그 목적이 변함이 없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80명 중 저 혼자 작가가 되길 원했어요. 동화책 읽으면서 그때부터 ‘이런 책을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었고, 문학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썼어요. 그때 읽은 책, 만화들이 그게 저를 키운 8할이었죠.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에도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체질이 조직에 속하질 못해 고등학생 때 문예반에 들어갔다가 1년 만에 나오고 대학생 때에도 문학반에 들어갔다가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어요. 서열, 선배, 줄 서기를 천성적으로 못 하는 거죠. 그래서 항상 ‘독고다이’로, 글쓰기는 글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어요.”

 

사실 배울 것은 단 하나인 것 같아요. 글을 왜 쓰는지 고민하고 그 글이 세상에 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글을 잘 쓰는 방법’은 오직 두 개예요. 많이 읽고, 많이 쓰기. 대신 이건 테크닉을 기르는 방법이고, 정말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용감해지기. 이걸 못하면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야 해요. 자기검열을 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거든요.”

 

작가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가 겪은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 그는 고통의 시간을 정원을 가꾸면서 벗어나고 아픔을 치유했다. 분명 쉽지 않았을 극복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일종인 진공상태, 탈진상태로 지냈어요. 사람이 우울증에 빠지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하잖아요. 옥상으로 올라와 물을 주는 것조차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식물들이 다 죽었어요. 1년 가까이 멍하게 지냈는데 한 친구가 집에 찾아와 고등어로 추어탕을 한 솥 끓여 주고 꽃도 몇 송이를 챙겨왔어요. ‘살아야지. 살려면 생명을 길러야지.’ 하더라고요. 그 순간에 반성을 하고,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을 고쳐먹고 생활하기 시작했어요. 참 고마운 친구죠.”

 

작가가 가졌던 아픔의 시간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던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기쁨의 정원』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만큼 유독 끈끈해 보이는 작가와 그의 어머니의 유대감에 대해서 말을 이었다.


“옛날 엄마들이 첫아들에 대해 끔찍하게 아꼈죠. 어머니가 시집온 지 9년 만에 낳은 연년생 형님이 있었지만 가난 때문에 잃었어요. 그다음 아들이었던 나를 유독 챙겨주신 건 당연한 거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물에 가질 못했어요. 어머니가 정월 보름에 점을 보러 갈 때마다 ‘물가에 보내지 말라’는 말을 들어서.(웃음) 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책 한 권을 써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 책은 쓰지 못하고, 한 챕터로 썼어요. 어머니가 투병 때 간호해주던 아주머니가 읽어드렸는데, 읽으면서 어머니도 울고, 병간호 아주머니도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조만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독립된 책을 낼 것 같아요. 약속을 반만 지켰으니.”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순수한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행복한 베짱이와 같은 이미지가 연상 된다. 과연 그의 자유로움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인지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유’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역시 책임질 식구가 없기 때문이죠. 8년간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투병하실 때 많은 금액을 병원비로 썼어요.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기계처럼 번역했고, 심지어 목동으로 과외도 갔어요. 당연하게도 그때 여행은 못 갔죠. 가족을 책임지려면 자유는 포기해야 하니까요. 가족으로부터 자유를 갖겠다고 하는 건 나쁜 거죠. 부모님께도 그렇게 하는데 내 자식한테 결코 그럴 순 없고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유라는 건 뭔가를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 안정된 가정과 자유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는 법이에요. 자유라는 건 결코 공짜가 아니잖아요. 물론 ‘장남 콤플렉스’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책에도 썼지만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자유를 즐기다가도 여동생이 아파서 급하게 귀국했어요. 동생에게는 오빠가 ‘친정집’이니까. 네덜란드 엄마는 남편과 자식이 있는 동생에게 왜 굳이 찾아가느냐고 이해가 안 된다며 물었지만 역시 저도 어쩔 수 없는 조선 남자인 거죠.(웃음)”

 

『기쁨의 정원』은 작가가 회복의 시간을 가지면서 출간한 만큼 많은 이에게 위로를 주는 책이다. 그는 지금 상처받아 위로를 받고 싶은 이들, 특히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들려주었다.


“스무 살 때 혼자 일기장에 썼던 수많은 구절 중 하나가 ‘왜 나는 내 감수성과 예민함이 나를 찌르는 창이어야 하는가.’였어요. 말하자면 스스로 자학을 했던 거죠.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사실 맞는 말이에요. 청춘은 다 아파요. 예민하거든요. 그 예민함은 나이가 들면 조금씩 무뎌지지만 20대는 아플 수밖에 없는 시기예요. 그리고 아파야만 나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거든요. 다만 그들이 혼자 아프지 않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문제죠.”

 

살면서 제일 힘들 때가 ‘왜 나만?’이라는 말을 하게 될 때예요. 다들 아픔의 종류가 다를 뿐 아픈 것은 같아요. 그래서 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자네만 아픈 것이 아니고 함께 아프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 아픔을 연대하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 힘내라고 다독여 준다면 조금 나아져요. 물론 아픔을 치유하는 건 결국 자신의 일이지만, 그렇게 서로 도움을 줄 수는 있어요. 그러니 부디 ‘나만’ 아픈 것이라고 슬퍼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아프고, 서로 그 아픔을 다독여 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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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정원 조병준 저 | 샨티
시인이자 사진작가 그리고 여행자이기도 한 조병준이 8년 만에 내는 에세이집. 이번 책에서 그는 ‘불친절한’ 인생의 시간들을 견디며 살게 해준, 꽃과 풀과 나무들이 건네준 위로와 기쁨의 이야기, 또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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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준 #기쁨의 정원 #정원 #옥상 정원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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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rtant

2016.07.27

기사 잘 읽었어요 옥상 위 푸른 일상이 너무나 아름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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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2016.07.26

정원을 갖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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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댕

2016.07.26

뜻깊은 시간 보내셨겠네요. 기사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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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원(예스24 대학생 리포터)

무지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