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입장에서 쉬운 공연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창작 초연만큼 힘든 공연이 있을까요? 텍스트로 만난 이야기는 연습과정을 통해 새로운 색깔이 덧입혀지고 무대에 오르면 세트, 조명, 음악 등이 더해져 또 다른 입체감을 갖게 되죠. 특히 관객과의 교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인 만큼 처음 텍스트에서 무대로 옮겨진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수정 작업을 거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배우들이 아닐까 합니다. 수정된 장면을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 위에서 자연스레 펼쳐 보이며 제작진과 관객들 사이에 공감이라는 교집합을 이끌어내야 하니까요. 요즘 이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뮤지컬 <더맨인더홀>인데요. 그래서인지 공연 중에도 제작진의 회의는 계속되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무대 위 피아노 연주는 그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 김영철 씨는 상당히 피곤해 보이네요.
“프리뷰 이후 수정 작업이 계속 이뤄지고 있어요. 창작 초연인 만큼 좋은 의견을 수렴해서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덕분에 월요일도 연습이 있으니까 쉬는 날이 없네요. 기침 감기까지 걸려서 좀 힘들기는 해요(웃음).”
김영철 씨가 연기하고 있는 ‘하루’는 강도와 맞닥뜨린 후 칼에 찔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무참히 맨홀 속으로 던져진 남자입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속에서 하루가 대면한 것은 다름 아닌 늑대. 프로이트의 ‘억압이론’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다는 창작뮤지컬 <더맨인더홀>은 이렇듯 한 남자의 비극이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들며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아름답고 서정적인 장치 속에 펼쳐집니다.
“결국 한 남자의 비극을 다뤘다고 생각해요. 어떤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하루라는 남자의 심리상태를 통해 관객들에게 저마다 다른 생각과 해석의 여지를 드리는 게 연출님의 의도였거든요. 그 부분이 많이 불친절할 수 있지만, 수정 작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가 더 뚜렷해지고 특정 장면들이 보완되면서 초반보다는 이해하기 쉽게 다듬어지고 있어요. 물론 관객들께는 죄송하고, 그래서 무대 위에서 더 신중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죠.”
<위대한 캣츠비>, <담배 가게 아가씨>,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 등 기존에 했던 작품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 하루의 캐릭터는 어떻게 잡았나요?
“이번에는 캐릭터를 따로 잡지 않았어요. 대본을 보고 장면 장면에 맞게, 사건에 따라 나오는 대로 구현했어요. 사실 배우들도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캐릭터를 만들 만큼 앞선 이야기가 많지도 않았고, 그래서 연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런을 돌면서 잡아간 것들이 많아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니까 또 달라지더라고요. 저희가 생각했던 것들과 많이 달랐어요. 피아노 선율만 해도 악보에 나와 있는 약속이 있지만, 그게 어떨 때는 다르게 들리고, 그러면 저 역시 상대 배우에게 다른 에너지를 주게 되거든요. 아마 관객들도 느끼실 거예요. 매회 달라지는 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늑대 역을 맡은 김찬호, 고훈정 배우와의 호흡도 중요할 텐데, 그 배우들 역시 입장은 비슷하겠네요.
“그렇죠, 처음에는 하루가 착한사람이라면 늑대는 뭔가 야성적이고 반대의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찬호 형과 훈정 형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에너지와 캐릭터가 다르기 때문에 프리뷰 때까지만 해도 이른바 ‘찬늑’은 조금 더 여린 감성이 있고, ‘훈늑’은 남성적이었는데, 공연을 하면서 또 다른 감정들이 찾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늑대의 캐릭터를 뚜렷하게 말하는 게 힘들어졌어요. 매회 달라지니까 저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요. 그런 새로운 교감이 좋아서 두 늑대에 대한 느낌은 인터뷰에서 말하지 않고 저 혼자만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요(웃음).”
이렇게 말씀을 나누다 보니까 하루처럼 무작정 참거나 착하기만 한 성격은 아닐 것 같은데요?
“하루처럼 말도 못하고 속에 담아놓지는 않죠. 저는 그래도 풀려고 노력한답니다(웃음). 제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시기에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할지 생각하고, 그렇게 융통성 있게 행동하고 싶긴 해요. 제 성격을 스스로 말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주위에서 ‘괜찮은 놈이다, 성격이 좋다!’고는 많이 얘기하시더라고요(웃음). 제가 막내 생활을 많이 해서 형들이 아직까지도 귀엽게 봐주시고 거부감 없이 연락하시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전작들에서와는 다른 김영철 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창력도 확연히 돋보이더라고요. 늑대 역도 어울리셨을 것 같아요(웃음).
“칭찬해 주시니까 기분이 좋네요(웃음). 이번 작품처럼 노래를 많이 부른 공연이 거의 없었죠. 노래는 어렸을 때 많이 불렀어요. 울산이 고향인데 현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4~5연승도 하고. 늑대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웃음), 하루 캐릭터가 저한테는 더 매력적이었어요. 뭔가 표현할 것도 많아 보였고. 감정선이 풍부한 인물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재밌는 분이 계속 하루를 연기하자면 정신적으로 좀 힘들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수정 작업으로 쉴 시간도 없겠지만 평소 감정적인 밸런스는 어떻게 맞추나요?
“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안 하는 것 같아요. 힘들지만 소주 한잔하고, 사우나하면서 풀고, 친구와 대화하면서 훌훌 털어버리는 편이에요. 그런 장점은 있네요(웃음). 그래서 <더맨인더홀>을 하면서도 체력적으로는 좀 힘들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2012년 데뷔 이후 유독 창작뮤지컬에 많이 참여하셨네요.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감사하게 많이 불러주셨어요. 라이선스 작품도 오디션을 많이 봤고, 합격한 작품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대학로에 있는 공연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굳이 따지지는 않지만 여러 작품이 있을 때 창작에 좀 더 관심이 가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김영철 배우라는 색깔은 아직 좀 희미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도 문제겠지만요. 이제는 배우로서 작품을 고르는 기준 같은 게 있을 텐데요.
“스스로 판단했을 때 양심적으로 할 수 있는 작품이면 돼요. 제가 좋아하는 서현철 선배님이 해주신 얘긴데, 정말 부가 따르는 작품이 있지만 나는 다른 작품을 하고 싶다면 다른 작품을 선택하는 거죠. 반대로 지금 돈이 필요한 입장이라면 돈이 되는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제 양심에 따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현실이 있기 때문에 쉬운 선택은 아니잖아요. 저는 아직 커 가는, 색깔을 만들어가는 배우니까요. 하지만 배우로서 그렇게 사는 게 제 소망이에요.”
배우로서 만들어가고 싶은 모습, 이루고 싶은 꿈도 있을 텐데요.
“좋은 작품이 많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봐주는 대중적인 배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저도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너무 급하게 생각해서 지금을 삐걱거리고 싶지는 않아요. 기회가 왔을 때 그 타이밍을 잡을 수 있도록, 그런 배우가 되고 그런 사람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고 준비해야죠.”
사실 김영철 씨와의 인터뷰는 기사를 쓰기에 편한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참여하고 있는 뮤지컬 <더맨인더홀>만큼 뚜렷하지 않은 답변들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좋은 느낌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극중 하루처럼 선하고 바른, 그렇다고 너무 착하거나 답답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주위에서 김영철 씨를 두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나 봅니다. 다음에는 역시나 양심에 따라 선택한 연극 <톡톡>에도 참여할 예정이라고 하니 김영철 씨가 배우로서 어떤 색깔을 입혀 가는지 확인해 보시죠. 창작뮤지컬 <더맨인더홀>은 제작진의 의도가 극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해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극을 관통하는 피아노 연주와 근사한 조명을 통해 제작진의 참신한 시도 역시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매회 다듬어가며 더 나은 무대를 만들어가겠죠. 관객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그게 공연의 특징이고, 관객의 의견이 이렇게 반영될 수 있다는 것 역시 공연의 매력 아닐까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