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초년생 때도 포함되지만, 대학생, 고등학생 때도 착한 아이들을 되게 우습게 봤던 것 같아요. 착하면 만만해 보였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아요. 저는 소설가로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전생에 뭘 잘했나 싶은 생각도 하고요. 흐름을 잘 탔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 소설가 장강명 인터뷰에서
『5년 만에 신혼여행』을 읽다가 밑줄을 쳤다. “친절한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허세만 잔뜩 부렸다.” 소설가 장강명의 자기 고백이었다. 신혼여행 이야기를 담은 작가의 첫 에세이를 읽고, 나는 왜 이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을까. 메일에 쓰는 문장부터 문자 말투, 대면 인터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인상이 좋았던 소설가의 고백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나는 뼛속부터 을들을 하대하는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요즘, 나이가 덜 들었다는 걸 부쩍 실감한다. 아직도 작은 일에 분노하고 ‘저 사람 왜 저래?’를 시도 때도 없이 자문한다. 나와 같은 단점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씁쓸하다. 나는 내 단점을 감추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 사람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장점인 냥 허세를 떤다.
며칠 전 싹수가 보이는 후배가 물었다. “거절을 잘 못하겠는데, 어떡하지요?” 나는 답했다. “난 네 성격, 좋다고 생각해. 친절한 성격은 전혀 단점이 아니야. 물론 맺고 끊는 건 확실해야겠지만, 언제 내가 상대의 도움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거든. 꼭 도움을 받기 위해 친절을 베풀라는 건 아니지만. 거절할 때도 상냥하게 하면 훨씬 좋지. 나만 잘났다고 일하는 사람처럼 재수없는 사람이 또 없어. 과연 세상에 혼자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작가도 말이야. 혼자 잘나면 책이 나오나? 출판사가 있고 편집자가 있어야지. 1인출판을 한다고? 그러면 배송도 직접 할 거야? 인쇄도 직접? 인쇄소도 있어야 하고 서점도, 배달부도 있어야 하잖아. 너의 그 상냥한 말투, 정말 대단한 장점이라고! 단호한 말투가 부럽다고? 그런 사람에겐 깊이 더 다가가기 힘들어. 나이도 어린데, 그러면 정말 밥맛없어!”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평소 굉장히 친절한 사람인 것 같아 찔렸지만, 사실인즉 전혀 그렇지 않다. 무례한 사람에게는 한 술 더 뜬다. 사실, 내 인상이 친절한 편은 아니다. 하여 생글생글 잘 웃는 사람이 그렇게나 좋고 부럽다. 나이가 들어 그나마 좋은 점은 사람 속이 훤히 보인다는 것. 연장자는 잘 모르겠으나, 아랫사람은 다소 보인다.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나 피곤할 수가 없다. 충분히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나친 어필을 보고 있노라면 피로하다. 조용히 다가와 보이지 않게 표현하는 이가 좋다. 그런 사람에게는 계속 친절을 베풀고 싶다.
2년 전, 인터뷰 기사를 하나 읽었다. 최근 최인아책방을 연 최인아 대표 이야기였다. 광고인들의 롤모델이었던 그가 남긴 말은 예상 밖이었다. “만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점이 아쉬워요.” “똑똑한 여성보다 편하고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그의 말이 퍽 놀라웠다. 직장 생활 1년차 시절, 한 신문사 기자가 내게 말했다. “1년 차라고요? 너무 베테랑 같아서 3,4년 차인 줄 알았어요.” 칭찬으로 한 말이었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우습다. 1년차로 보이는 게 뭐 어떻다고, 그렇게나 프로페셔널하고 싶었을까.
간혹 고독하게 일하는 사람을 본다. 나름 승승장구, 인정도 받고 있다. 하지만 그와 일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과연 이 사람은 오래 갈 수 있을까?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한 번쯤,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부디, 누군가 손을 내밀 때 잡기를. 한 두 번 내밀다 거절 당하면 열없다. 과한 욕심은 버리고, 다가오는 사람의 손은 덥석 잡아줘야겠다고 다짐하는 새해다.
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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