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 열풍이 불기 훨씬 전부터, 매년 새해가 되면 소유하는 물건을 줄이기로 다짐한다. 눈에 띄게 줄어든 건 없지만, 어떤 물건을 남기고 처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그 누구보다 많이 했다. 각 물건의 가치와 효용을 따지는 중에 살아 남은 물건들은 결국,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들이었다. 오래도록 간직되는 물건은 화려하기보다 기본에 충실하며, 여러 번 봐도 질리지 않고, 쓰면 쓸수록 빛을 발한다. 좋은 물건을 곁에 두고 자주 쓰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물건이 주는 기운은 생각보다 꽤 크다.
이 책의 저자는 20년 넘게 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일하는 곳이 박물관이니 오래된 물건들 가까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오래된 것이란 시간의 풍파를 견뎌낸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떤 특별함이 있길래 긴 시간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무사히 존재할 수 있었을까? 오래된 것과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과 존경의 마음을 가진 저자는 시공을 초월해 예술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디자인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소개한 여러 물건들 중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은 건 계영배(戒盈盃). ‘가득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의 이 잔은 술을 가득 채우면 술이 사라지고, 딱 7할 정도만 채워야 따른 술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묘한 잔이다. 술이 사라지는 비밀에는 사이펀의 원리가 작용한다. 잔 중심부나 옆 표면에 꼬부라진 관이 있어 이 관이 대롱 역할을 하는데, 술이 그 관 끝 부분보다 아래에 있을 때는 바깥으로 새지 않지만 관의 끝부분을 넘어서면 잔에 담긴 술과 관 속의 압력 사이에 차이가 생겨, 술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되는 거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술잔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고 나아가 과함이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교훈을 음주의 순간에도 느끼게 한다. 술을 마시면서 깨닫게 되는 삶의 이치라니, 와 너무 멋지지 않은가. 잘 만들어진 물건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감동을 준다.
좋은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전히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듣는다. 좋은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샤넬의 변하지 않는 클래식한 디자인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뭔가를 더하기는 쉽지만, 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취사선택의 기로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답을 얻을 때까지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는 무수한 고민을 통해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지금이야말로 계영배가 온몸으로 말하는 교훈에 귀 기울여야 하는 때다. 더도 말고 딱 3할만큼의 욕심을 빼면 과잉으로 비틀거렸던 삶은 적정한 균형점을 찾을 것이다. 비워진 3할의 틈으로,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평범함과 사소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삶이 훨씬 풍부해지지 않을까. 물론 오래되어서 좋은, 좋아서 오래될 디자인이 함께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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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디자인박현택 저 | 안그라픽스
『오래된 디자인』은 오래된 것 또는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과 존경으로부터 시작한다. 박물관에 근무하는 디자이너인 저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예술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상들을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거기에 담긴 삶의 지혜와 통찰을 읽어낸다.
최지혜
좋은 건 좋다고 꼭 말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