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한은 디지털 페인터다. 그는 캔버스와 붓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회화 도구 대신 포토샵과 태블릿을 활용해 그림을 그린다. 작가는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후,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다. SM엔터테인먼트와 하이브 소속 뮤지션의 앨범 아트를 제작하며 이름을 알렸고, 애플, 구찌, 오프닝세러머니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다. SNS 인스타그램(@ram_han)을 통해 핸드폰 액정이라는 ‘가상공간’에서 개인 작품을 선보여온 그는 2018년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유령팔》에 디지털 페인터로 참가하게 된다. “오늘날 작가들의 주요 창작 매체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가상공간이 어떤 맥락을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 그 전시는 시대의 징후처럼 등장한 람한의 예술 세계를 선포하듯 널리 알리게 된다. NFT와 같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며 디지털 환경이 예술의 제작과 소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의가 절실한 시기였다. 어둡게 설정한 전시장에는 가로, 세로 3m 크기로 출력한 디지털 페인팅이 부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니터 특유의 느낌을 내기 위해 그림 뒤에 설치한 LED 조명에서 나온 빛을 받은 <Room Type>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향수 어린 공간으로 표현했다.
그로부터 6년간, 람한 작가는 2020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등 주요 기관 전시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난 11월 22일 서울 용산의 갤러리 휘슬에서 시작해 내년 1월 4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Inaudible Garden》을 통해 디지털 페인터로서의 깊은 고민을 풀어낸다. 이번 전시에서 ‘정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작가는 그간 디지털 화폭에 담아 온 식물과 여성을 다루며 표현 방식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Tulip> 시리즈다. 제목을 통해 ‘튤립’ 임을 명시하지만, 백라이트 필름에 인쇄된 아카이벌 프린트 이미지는 한눈에 꽃으로 인식되기 어렵다. 전시 개막일에 만난 작가는 “사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온전하게 튤립을 그린 원본 그림이 존재해요. 그런데 그 그림의 일부분을 확대하고 복제해 지금과 같은 시리즈를 만들었어요. 튤립이라는 대상을 활자처럼 재조합하고 그 위에 드로잉을 더했죠.”라고 설명했다. 이는 디지털 회화의 고유성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다. 작가는 “한 픽셀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모니터에서 발견하는 질감 같은 게 있는데 그게 바로 디지털 회화 고유의 텍스처일 것”이라며 관객이 그 질감을 “감각하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에서도 다채로운 형광 컬러를 팔레트로 한 람한의 회화는 아름답지만 기괴한 이미지를 여전히 전달하고 있다. 그는 1989년생으로, 인터넷이 대중화되던 시기의 시각문화에서 독특한 감성을 형성했다. “해일처럼 덮쳐온 자극적인 이미지가 남긴 시각적 · 감성적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것 같아요.”라며 자신이 느낀 강렬한 기억을 소재, 색감, 질감으로 시각화한다고 말한다. 게임과 만화 등에서 영향을 받은 서브컬처 특유의 감성도 그의 작품에 중첩되어 있다. “서초동의 국제전자센터 같은 곳에서 본 영화 포스터와 피겨, 넥슨에서 나왔던 <일랜시아>, 아다치 미츠루 같은 옛날 일본 만화들을 좋아했어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잘못된 부분도 많지만, 그때의 감성을 작품에서 되살리면 이상한 쾌감을 느낍니다.” 람한의 디지털 페인팅은 스크린 너머의 물질적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여전히 관객을 꿈과 현실의 불분명한 경계로 이끌고, 경험한 적 없는 노스탤지어에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때로는 불편한 느낌은 오직 람한의 예술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실제 감각이다.
《Inaudible Garden》
● 장소 : 갤러리 휘슬
● 기간 : ~ 2025년 1월 25일
안동선 (미술 전문기자)
15년간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 등에서 일했다. 현재는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미술 에세이 『내 곁에 미술』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