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전교생을 운동장에 소집했고, 강단에 선 선생님은 반 배정을 새로 해야 한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대부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반 배정을 새로 하든 말든, 그럼 오늘은 일찍 마치는 줄 알고 기뻐하던 친구도 있었다. 아무튼 사전에 아무 예고도 없었던 일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반 배정을 새로 하면서 우열반의 구분이 없어졌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공부 좀 하는 녀석들을 단속하는 차원의 우반이 따로 있었다. 뭐 그 우반이 지금의 자사고나 외고 정도는 아니고, 돌머리들 중 그나마 쓸 만한 돌머리를 골라내는 수준이었다. 시골 고등학교로써는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했던 것처럼 그 우반을 없애라고 지시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만 벌어진 해프닝일 수도 있겠다. 당시 우반이 없어진 근거 자료를 찾아봤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문민정부의 교육 정책은 지금의 걷잡을 수 없는 입시 경쟁을 부추긴 주범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 이후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돌머리들 중 그나마 쓸 만한 돌머리였던 나는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열반이 사라진 학교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우열반이 계속 존재했다면 졸업할 때까지 말 한 번 섞지 않았을 친구들과 사귀게 됐고, 그 친구들 덕분에 학교생활이 재밌었다. 고등학교 생활이 대학 입시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내 인생에 두 번 다시없을 시간이구나 싶었다. 물론 성적은 보기 좋게 곤두박질쳤지만, 또 우열반이 사라졌다고 폭력적인 선생님이 사라지거나 친구들과의 일상적인 갈등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대체로 행복했다. 적어도 이듬해 우열반이 다시 부활하기 전까지는.
우리 집 애는 사교육을 일절 받지 않는다. 사교육을 일부러 거부하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자기도 학원을 가고 싶다고 했고, 방문교사 지도를 궁금해했다. 개똥이(가명)가 태권도나 영어 학원을 다니면 자기도 태권도나 영어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했고, 말숙이(가명)가 방문교사 지도를 받으면 자기도 방문교사 지도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일주일 뒤에 다시 얘기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일주일이 지나면 애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개똥이는 자기처럼 실컷 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 됐다고 했다. 말숙이는 자기처럼 티브이를 실컷 못 보는 것 같아서 안 됐다고 했다. 이를테면 학원은, 우리 집에서 애가 티브이를 너무 오래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너무 오래 할 때 협박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야, 너 자꾸 그러면 학원 보낸다?” 식으로.
애는 학교에서 주관하는 방과 후 수업을 두 개 정도 하고, 그마저도 꾸준하지 않은 편이다. 덕분에 주변의 다른 학부모들이 마누라와 나는 해 본 적 없는 애의 장래 걱정을 고맙게도 대신 해주실 때가 종종 있다. 애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가 인근의 다른 초등학교에 비해 학업성취도가 낮고, 결국 그 학교 학생들과 같은 중학교를 진학할 텐데, 그럼 우리 애들이 그쪽 애들의 성적받이가 된다나 뭐라나. 지금부터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나 뭐라나. 다른 학부모들이 우리 집 애 걱정을 대신 해주실 때마다 마누라와 나는 “애가 원치 않아서요.” 라며 대답을 대충 얼버무릴 뿐이다. 그런데 그 부모님들은 알까. 나는 개똥이와 말숙이를 만날 때마다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재밌었어?”
그럼 개똥이와 말숙이는 거의 매번 비슷한 대답을 반복한다.
“재밌긴요. 학교 다니기 싫어요. 학원도 몇 개씩 가야 하는데 학교까지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한 친구는 이번에 자기 딸이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그런데 자기 집과 가까운 초등학교가 아니라 집에서 조금 떨어진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그 초등학교가 자기 집과 가까운 초등학교보다 낫다는 주변의 평가 때문이었다. 두 초등학교는 모두 한 아파트 단지와 인접해 있는데, 친구의 집과 가까운 초등학교는 상대적으로 평수가 좁은 집들의 아이들과 아파트 단지 밖 빌라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주로 입학을 한다고 했다. 반면 다른 초등학교에는 상대적으로 평수가 넓은 집의 아이들이 입학을 한다고 했다. 자기 아이를 그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고위공직자들처럼 위장전입을 하는 집들도 꽤 있다고 했다. 친구는 그래도 자기는 위장전입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농담조로 그럼 나중에 정치라도 할 셈이냐고 물었고, 우리는 그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는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고, 자사고와 외고 학부모들은 정부의 방침을 결사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하더라도 슬럼화된 일반고가 부활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강남 8학군이 부활할 것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에게 초, 중, 고등학교와 같은 공공교육 과정은 대학 입시의 수단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런데 그들만 유난스러운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내 주변의 학부모들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버스가 없는 시골 마을에도 학원버스는 다닌다. 말하자면 수많은 아이들이 자기 인생에 두 번 다시없을 소중한 시간을 오로지 입시 경쟁을 위해 낭비하고 있고, 그 입시 경쟁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관심 밖 존재가 되기 일쑤다. 이쯤 되면 자사고와 외고 폐지가 아니라 차라리 대학을 폐지하자고 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대체 언제까지 아이들을 숨막히는 입시 경쟁 속에 방치할 건가.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을 진학하면, 행복이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어려서부터 치열한 경쟁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장차 김기춘이나 우병우 같은 사회악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 아이들에게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뭐냐?” 혹은 “네 생각은 어때?” 라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물어본 어른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돌이켜보면 1994년에는 유독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사상 최고의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김일성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전쟁설이 나돌았고, 지존파가 등장했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이 일련의 사건들만 놓고 보면 1994년은 불안과 공포의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학창시절을 통틀어 그 1994년을 꽤나 낭만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의도한 건지 아니면 한낱 해프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나와 다른 세계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그 친구들과 마음껏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밑바닥이 고작 이 정도라면, 나쁘지 않네 싶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서 허우적대지. 하지만 이 가운데 몇몇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네.”
소설가 겸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서 허우적대더라도 아이들은 시궁창 속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해주자.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울타리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얘기해주자. 아이들에게 인생은 스스로 결정하는 거라고 얘기해주자. 때로는 아이들의 그 선택이 못마땅하겠지만, 그 아이들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잠자코 기다려주자. 아무리 훌륭한 부모도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순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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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만화가)
영화 <분노>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자기 생각을 일단 글로 쓰는 놈이야.” 영화 속 형사들이 발견한 살인범의 결정적 단서였는데, 제 얘긴 줄 알았지 뭡니까. 생각을 멈추지 못해 거의 중독 수준으로 글쓰기에 열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술을 먹습니다. 틈틈이 애랑 놀고 집안일도 합니다. 마누라와 사소한 일로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가끔 만화도 만들고요.
동글
2017.06.29
iuiu22
2017.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