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천적은 이야기뿐 아니라 꿈에도 나타난다. 그런 꿈을 꾸지 않고 스물다섯이 됐다면 이상할 정도로, 거의 모든 여성이 공통적으로 꾸는 꿈이 있다.”(『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88쪽)
아이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폭풍 성장을 하는 것 같은 요즈음, 부모인 나는 그중 고작 두어 개의 장면들밖에 목격을 못하지만, 그 두어 장면조차도 나에게는 커다란 경험이다. 길고 긴 지난 연휴 동안 밤낮으로 아이와 함께하면서 나는 아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랐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전에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모습이 불쑥 불쑥 올라올 때마다, 놀라고 서운해하고 감탄했다. 때로는 아이가 자신의 성장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부모를 위해서, 조금 더 어릴 적의 모습을 연기해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도 받았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라는 중인 딸아이의 꿈에 언젠가부터 괴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더 어린 시절에도 낮에 힘든 일이 있으면 밤에 아이가 꿈을 꾸곤 했다. 엘리베이터에 혼자 갇히는 꿈, 뱀이 나오는 꿈, 벌레가 나오는 꿈 등. 하지만 요즘 가끔씩 딸아이의 꿈을 방문하는 그 몬스터는 이전에 꿈에 나왔던 신경 쓰이는 캐릭터들과는 조금 다른 존재다.
나는 그 괴물 꿈이 뭔지 알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알 것이다. 여자아이들이 자아와 세계 사이에 어떤 괴리를 느끼기 시작할 때, 어김없이 그 몬스터는 찾아온다. 남자아이로 자라보거나 남자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남자들의 경우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아마 다르면서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세계와 나 사이의 불일치를 더 크게 느끼는 쪽은 아무래도 여자아이들이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의 이런 꿈은 거의 보편적인 통과의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회적인 제약, 사회적인 규율이 자신을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때, 내 편이 아닌 큰 힘의 존재를 느낄 때, 몬스터가 등장한다. 사실 이런 꿈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나의 일부다. 내가 분리되고 떨어져나와야 할 태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편인 줄 알았는데 내 편이 아닌 힘, 나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닌 세계. 그래서 딸이 괴물이 꿈에 나온다고 했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납득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시렸다.
여성들의 원형 심리학을 연구해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라는 스테디셀러를 쓴 노장 융 분석가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이런 꿈이 악몽이 아니라 경종임을 강조한다. 그런 꿈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적이고 공적인 환경이나 시스템에 대한 여성들의 본능적인 반응인 동시에, 한편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려주기 위한 이미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성은 언제 이런 꿈을 꿀까?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 즉 의식이나 행동이 성숙해지고 강력해질 때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계기,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본질이다.”(89쪽)
“개인이나 사회에 뭔가 심각한 잘못이 있는 경우, 괴한 꿈은 일종의 경종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종래의 심리학은 바깥세상 역시 우리의 내면만큼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이며 우리의 삶에 갖가지 충격과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무시했다.”(90쪽)
“여성들이 꾸는 천적의 꿈은 내면의 삶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일터나 집안의 위협적인 분위기, 이웃이나 문화 전반에 대한 내용이 될 수도 있다.”(90쪽)
“여성이 괴한 꿈을 꿀 가능성이 특히 높은 때가 있다. 창조적 열기가 바닥났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때가 그렇다. 이런 상황은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여성에게는 물론 매우 숙련된 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힘이 전혀 없는 때에 괴한 꿈을 꾼다. 이때 꿈은 비록 무섭긴 하지만 악몽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창의력을 앗아가는 파괴적인 움직임과 창조 행위에 필요한 여건을 빼앗는 존재를 인식하고 대비하라는 유익한 경고에 가깝다.”(91쪽)
나도 이런 꿈을 간헐적으로 계속 꾸고 있다. 어려서는 귀신이 나왔다면, 최근에는 연쇄살인범(그것도 주로 여자들을 죽이는)이 나왔다. 연쇄살인범은 여린 체격에 안색이 희고 눈이 가느다란 남자였다. 의심스러운 눈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그가 연쇄살인범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내 꿈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어느 정도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다만 유독 장르 문법을 따르는 답답한 언니 하나가 사람들을 계속해서 그놈에게 끌고 가는 게 문제였다. 그 답답한 언니는 연쇄살인범이 남의 이야기를 무척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같이 술을 마시면 너무 편한 상대라고 하면서 싫다고 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갔다. 나는 그놈이 범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려는 듯 자꾸만 속아 넘어가는 그 어리석은 언니를 원망하며, 내 방 창과 문을 꽁꽁 닫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나를 죽이러 오는 그놈과 맞닥뜨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들켜서 죽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꿈의 마지막 장면이다.
물론 어떤 때는 힘들게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귀신에게서 도망칠 때도 있고, 괴물이나 강도를 때려잡을 때도 있다.(머리통을 후려쳐서 떨어뜨린 적도 있다.) 하지만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깨는 꿈이 훨씬 많다. 그러면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내가 후려쳐야 할 머리통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이의 꿈은 이런 장르(범죄 드라마?)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동화책 같은 게 아닐까 짐작한다. 아이의 꿈에 나온 몬스터는 두 종류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할아버지 몬스터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할로윈 유령들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몬스터가 중요한 등장인물인 듯한데, 기분 나쁜 목소리로 자꾸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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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나는 조금 귀엽게 접근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림 그리기 시간에 꿈속에 나오는 괴물들을 그려보자고 했다. 괴물들을 최대한 알록달록 예쁘게 잘 그린 다음, 괴물들에게 꿈에 나오지 말라고 타이르고, 잘 가라고 인사를 한 후, 그림을 찢기로 했다. 그러면 괴물들이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을 거라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아이는 나무에 걸린 할로윈 유령들과 한편에 서 있는 할아버지 몬스터를 그렸다. 역시 할아버지는 한눈에 보아도 위협적으로 보였다. 간단한 의식(ritual)이 끝나고 잠자리에 든 후 다음날 아침,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조심스럽게 항의했다. 그림을 그리니까 자꾸 생각이 나서 더 무섭고, 어제 꿈에 그 할아버지 몬스터가 또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좀더 강력한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 몬스터가 너를 불러서 뭐라고 할 것 같아?” “너한테 뭔가 할 말이 있나 본데?” 아이와 할아버지 몬스터 사이의 실랑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에둘러 사양한다. “모르겠어.” “나중에 얘기해줄게.” 아이가 맞서려고 하고 당황스러워하는 상황이 무엇일지 대충 알 것 같기도 있고, 걱정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너무 너무 너무 궁금하지만 결국 나는 응원석으로 빠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긴 나에겐 나의 연쇄살인범과 꼭 그와 공범하는 듯한 어리석은 언니가 있으니. 우선은 내 괴물들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괴한 꿈은 여성이 겪고 있는 고난을, 괴한은 여성에게 주어진 가혹한 상황을 나타낸다. 만일 이 여성이 푸른 수염의 신부처럼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진솔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쓴다면 해방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녀의 마음속 강도나 강간범, 혹은 천적들도 힘을 잃고 잠재의식의 저변으로 물러난다. 이때 그녀는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차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89쪽)
“괴한 꿈에 나타나는 이 침입자가 왜 우리의 본능과 야성적 지혜를 파괴하려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본능과 진솔함에 대한 파괴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자랑하거나 북돋우는 사회에서는 천적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압제적인 문화에서도 누군가는 ‘우리 사회가 금지하는 이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개인, 사회, 지구 그리고 인간성 자체에서 파괴된 요소들은 무엇인가?’ 등등 개인과 문화에 도움이 될 만한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일단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면 여성은 각자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그것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회의 문제를 자기 일로 받아들여 진솔하고 열정적으로 처리하는 태도가 바로 야성의 기능이다.”(91쪽)
“괴한 꿈을 꿀 때는 거기에 대항할 세력이 항상 우리를 도울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우리가 천적에 대항하기 위해 야성의 에너지를 모으려 하면 여걸 역시 천적이 세워놓은 울타리나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달려온다. 여걸은 성화처럼 벽에 거는 우상이 아니다. 상황과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를 도우러 오는 살아 있는 힘이다. 그것은 아주 오랜 세월, 꿈이나 이야기 혹은 여성의 삶을 통해 천적과 싸워왔다. 여결은 천적에 대항하는 힘으로서 천적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타난다.”(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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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클라리사 에스테스 저/손영미 역 | 이루
여성 심리학의 고전, 역대 최고의 심리학 분야 베스트셀러 드디어 출간되다. 신화, 전설, 동화에 담긴 의미를 융의 원형 심리학과 여성지향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심리 치유서.『월경독서』에서 목수정 작가가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권한 책!
김희진(인문서 편집자)
6세 여아를 키우는 엄마이자, 인문서를 만드는 편집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