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엄주
2025 여성의 날 특집 – 딕테를 읽는 여자들
딕테 모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행 중입니다. 딕테를 읽으며 텍스트 너머로 연결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나아가 함께 읽는 여성들이 함께여서 도착할 수 있는 낯설고 먼 곳의 풍경도 담았습니다.
목소리와 장면의 충돌, 그 몽타주적 읽기
우리 앞에 놓인 이것을 무엇이라 말하면 좋을까? 『딕테』의 시작은 아주 근본적인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다. 우리 앞에 놓인 이 텍스트를 제 이름 외에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정답을 찾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방법론적 회의에 가깝다. 이는 『딕테』를 ‘무엇’이라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을 규정하는 모든 억압과 분류 체계를 무화하는 과정의 출발점이 된다. 이것은 시인가, 소설인가? 어째서 이것은 하나의 예술이자 문학 작품이 될 수 있는가? 독자는 『딕테』를 읽기 위해 그가 붙들어온 저간의 독법과 가치 체계를 송두리째 성찰하고 종국에는 갱신해야만 한다. 『딕테』의 언어는 지면을 뚫고 독자의 신체 내부로 침투한다. 『딕테』의 독자는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시선과 청각을 발명해야 하고 그러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불능에 가깝다. 차학경의 언어는 대상을 재현하는 지시체가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언어로 대상을 직접 발명하게 하는 수행적 언어, 퍼포먼스로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많은 독해가 그간 『딕테』의 음성적인 차원에 주목해왔다. ‘말할 수 없는 여자’에서 출발해 도착하는 ‘말하는 여자’라는 주제는 특히, 『딕테』의 목소리가 발견하는 여성성을 강조한다. 이때 『딕테』는 한 편의 거대한 시가 된다. 주체를 둘러싼 세계의 형상을 제시하기에 앞서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먼저 도착한다. 읽기의 단위는 극도로 주관적인 내면과 감각, 인식이며 텍스트와 독자는 바로 그 목소리에 의해 지배당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딕테』에서 또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장면들이다. 주체가 발 딛고 선 세계에 관한 시각적 서술이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 허형순 여사의 시간은 장면으로 도래한다. 이때 독자는 귀를 닫고 눈을 열어야 한다. 주체를 압도하는 역사의 부피는 귀로 듣기에는 지나치게 광활하다. 차학경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전의 여성들이 살아온 시간 앞에서 그녀 역시 한 명의 타자에 불과하기에 그녀는 그것들을 직접 소리내어 말할 수 없다. 다만 전언을 통해 그 시간을 그려낼 수 있을 따름이다.
청각과 시각, 목소리와 시선은 『딕테』 안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배타적인 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둘은 충돌하고 중첩되며 영화적인 쓰기를 추동하는 새로운 언어를 구성한다. 「에라토 연애시」 장은 이러한 역동을 매혹적으로 보여주며 이때 우리는 『딕테』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독법이 바로 몽타주적인 읽기임을 경험한다. 가령, 이 장을 여는 잔 다르크의 사진은 잇따르는 문장 “그녀는 지금 들어오고 있다”와 곧장 연동되며, 그 순간 잔다르크는 화석화되어 죽은 사진의 시간으로부터 부활해 독자의 현재 속으로 날아오른다. 특히, 「에라토 연애시」는 책의 좌우 페이지가 기묘한 결합 구조를 이루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둘 중 한쪽이 스크린의 시각성을 형상화하면 다른 한쪽은 목소리의 음성성을 체현한다. 청각과 시각은 언뜻 나뉘어 제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자의 읽기를 통해 종국에는 부딪치고 결합한다. 서로를 향해 운동하는 시각과 음성의 현재화는 재생되는 영상의 스크린을 구성한다. 차학경의 퍼포먼스 <눈 먼 목소리(Aveugle Voix)>(1975)가 보여주는 바대로 『딕테』의 목소리는 시각만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장면화 한다. 가령, 침묵과 부재가 그러하다. 독자는 『딕테』를 통해 머릿속으로 자기만의 스크린과 자기만의 목소리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딕테』가 독자 당신에게로 침투해 일으키는 신체적 변형이며 물질로서의 언어가 당신에게로 침윤하는 과정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의 손끝으로 스며들 수 있는 언어라면 그것은 유동하는 활자, 체액으로서의 언어일 테다. 「우라니아 천문학」에서 흐르는 검은 잉크는 차학경이 써내려간 언어 그 자체를 은유한다.(77쪽) 활자의 검은 잉크는 저자와 독자가 언어의 물질성을 매개로 공유하는 검은 피다. 책의 서두에 낯설게 제시되던 웅얼거림과 “상처, 액체, 먼지”(13쪽)는 그제야 비로소 실감을 얻는다. 그것은 그녀의 피인 동시에 그녀가 허용한 타인들의 피다. 타인은 독자 당신을 포함하여 그녀의 실존을 가능케 한 이전의 여성들, 그리고 남성들을 포함한다. 피는 고이지 않고 시종일관 흐르므로 검은 체액은 그녀와 독자의 혈관에 잠시 머무르다가 이내 비워진다. (“그녀의 속이 비워진다.” 15쪽) 앞서 말한 침묵과 부재는 그러므로 완전한 무(無)가 아니라 언어가 휘발되고 비워진 투명한 흔적으로서의 장소다. 기억의 완전한 재현은 불가능하다는 문제 의식 안에서 『딕테』의 언어는 검은 체액으로 주체의 내부에서 남몰래 흐른다. 그러나 활자들이 기어코 세계의 구멍을 찾아내면 그것은 백색으로 변신하며 휘발된다. 그러나 그 휘발은 세계의 표면에 투명한 홈을 파고 제 몸을 밀어넣는다. 각인이다. 가령, 책에 수록된 두 번째 사진이 담는 하얀 분필로 쓴 듯한 문장(“어머니보고싶어 배가고파요 고향에가고싶다”)은 흔적으로서의 각인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딕테』가 선사하는 밀도 높은 의미와 시간들이 끝내 화하는 빈 공간은 완전한 사라짐이 아니라 다만 투명한 흔적을 남기며 휘발되는 언어의 각인이 남긴 결과다.
원본 없는 받아쓰기, 경계를 찢는 비인칭의 언어
듣고 말하는 목소리를 보고 장면화 하는 시각의 것으로, 고정된 과거의 시간을 시점과 무관한 현재로 끊임없이 영상화 하는 『딕테』의 핵심 정체성은 해체다. 그러나 파괴로서의 해체가 아니라 생성으로서의 해체다. 『딕테』를 둘러싼 그간의 주류적 독해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과 디아스포라 담론과 더불어, 가부장제 안에서 소외된 여성과 제국주의 아래 피지배자로서 그들의 존재론에 주목해왔다. 『딕테』 안에서 발견되는 목소리는 서발턴(subaltern)의 그것이었다. 차학경이 제작한 신화로서의 『딕테』는 그리하여 목소리를 획득하고 주체의 지위를 복권하는 여성의 뮈토스였다. 그러나 하나의 예술 작품을 동시대적으로 읽는 일은 과거의 유산을 갱신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딕테』의 21세기적 독해 중 하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새로운 로고스 중 하나인 논바이너리(nonbinary)의 개념을 접목하는 읽기다. 그간의 독해가 여성의 주체성을 복권하기 위해 공통 기표로서의 ‘여성’ 신화를 강화했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새로이 시도하는 독해는 바로 그 여성적 기원으로부터 출발해 신화화 된 기원을 넘어서고 그로부터 멀어지는 탈신화화의 작업이다. 차학경의 디아스포라는 이제 더는 소외된 이방인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날이 초연결 사회로 심화되는 지금의 세계에서 디아스포라는 세계 시민적인 자질로 역전되었다. 이러한 동시대적 자장 속에서 『딕테』의 디아스포라는 이제 스스로의 몸마저 초월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은 자기 자신의 여성됨을 자각하고 그로부터 멀리 나아가는 자들의 목소리다. (“그 소리를 포기하라” 170쪽) 『딕테』는 말한다. “이제 당신은 무형태다.”(172쪽) 어머니와 유관순, 잔 다르크 그리고 성녀 테레사로 기록되 여성적 언어의 기원을 목도한 『딕테』는 이제 검은 체액이 빠져나간 자리, “동맥, 혈맥의 텅 빈 기둥”과 “공백의 가득함”(174쪽)을 재감각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기록한 역사의 장면들 또한 하얀 흔적으로 남을 따름이다. 그것들은 태초의 기원이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육박해오는 현재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 『딕테』의 체액은 몇 번이고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그것들을 새로고침한다. 가령, 「에라토 연애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곧장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고정되는 이항 대립의 구조는 ‘당신’이라는 바깥의 존재에 의해 파기된다. 114쪽과 118쪽까지의 장면에서 ‘당신’은 먼저, 그녀의 아주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보아야 할 필요가 없”(116쪽)는 당신은 그녀를 보지 않아도 이미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그녀의 안에 들어선 존재다. 그러나 시퀀스가 진행되면서 당신은 여성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남성의 좌표에까지 도달한다.
밤중에 늦게 음악 속에서 그것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당신이다. 그때는 그것이 당신이 된다. 당신은 그녀가 어린 소녀였을 때 학교를 데리고 다니던 입주 학생, 그 남자, 그 동반자. 그녀가 잠든 동안 그 남자의 그녀를 위한 음악을 듣는 사람은 당신이다. [……] 침묵. 텅 빈 침묵. 말한 후의 공허. 각 어구. 의. 각 낱말의. 모두 다만. 구두점, 멈춤들.[1]
그와 그녀, 남자와 여자의 바깥에 서 있던 제삼자로서의 당신은 그녀 내부에서 출발하여 그녀의 남성이자 동반자가 되고, 여성과 남성 모두의 자리를 경유하여 ‘그들’(they) 모두가 도착하는 차원은 침묵과 하나의 점이다. 차학경에 의해 ‘당신’으로 호명되는 이는 텍스트를 읽고 있는 독자로서의 당신이다. 『딕테』의 언어가 인간 신체 내부를 흐르는 피라면 그것은 여성의 몸을 기원으로 삼되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올라선다. 차학경이 자신의 쓰기와 그 물질적 재료로서 활자를 언어라는 철학과 예술의 층위에서 호명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 일반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당신은 2인칭의 여성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경험하고 감각하는 논바이너리로서의 당신, 3인칭으로서의 당신(they)이 된다. 그리고 끝내 당신은 하나의 구두점, 문장 부호로서 육화되고 언어 그 자체를 몸으로 하는 비인칭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 『딕테』가 책의 서두에서 아홉 명의 뮤즈들에게 호소하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발설은 검은 활자를 지닌 몸으로서의 인간,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체현하는 비인칭적인 언어 그 자체로서의 인간 존재에 관한 진실을 누설하는 일이다. 『딕테』의 언어는 여성을 기원으로 출발하는 비인칭의 언어다.
『딕테』를 여성 일반의 글쓰기로 감히 말하기 어려워지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공동으로서 여성의 언어가 무화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배타적인 신체를 가진 단독자로서의 여성이 경험하는 것은 엄밀히 각자됨의 차원에서이며 (이를 ‘차이’라고 부른다) 공동의 언어가 견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메타포의 차원에서다. 단독자들의 경험이 보편적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성’이라는 공통 기표는 차학경의 해체적인 언어의 퍼포먼스 속에서 그 또한 자기 초월의 대상이 된다. 『딕테』를 읽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에게 지식의 축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젠더적 주체로서 우리가 지닌 각자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텍스트 내부로 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이라면 그 누구든 예외 없이 『딕테』 안에 자기 자신을 써 넣어야만 한다. 차학경은 당신이라는 관객이 쓰기로서 참여할 때 비로소 한 번 완성되는 퍼포먼스로서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렇기에 『딕테』의 받아쓰기는 따라서 원본을 갖지 않는다. 그것이 갖는 원본성은 당신이라는 독자의 수만큼 무수히 존재할 것이며, 그 원본들 또한 역사라는 시공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할 것이므로 결국, 고정된 원본은 거듭 파기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글이 던진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앞에 놓인 이것을 무엇이라 말하면 좋을까? 이제 우리는 안다. 『딕테』를 그 무엇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는 대답만이 유일한 답안일 것이다. 마지막 장 「폴림니아 성시」에서 바리데기 신화를 모계 서사로 다시 쓰는 ‘그녀’는 끝내 장면의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아무 데도 없었다.” 182쪽) 어머니를 구하기 위한 약을 들고 돌아온 그녀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다만, 작은 촛불 한 자루의 그림자다. 이것이 한 편의 소설로서 『딕테』가 맞이하게 되는 마지막이다. 여성의 몸과 역사를 기원으로 하는 언어는 다만 하나의 작은 점, 하나의 작은 빛으로 귀결된다. 아홉 여신들의 거대한 이야기를 경유하여 그 감각의 최소치로 도달하는 차학경의 언어는 여성이라는 한쪽 영역으로만 수렴하지 않고 그 어떠한 규범과 경계,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찢고 생성하는 출발점으로 화한다. 생성하는 해체로서 그녀의 육화된 언어는 그리하여 그 어떤 구획에도 저항할 수 있는 예외적인 총체, 논바이너리로서의 비인칭적 언어로 동시대의 당신에게 드디어 도착한다.
[1] 차학경, 『딕테』, 김경년 옮김, 문학사상, 2024, p.118.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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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출판사 | 문학사상

전승민 (평론가)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및 현재 동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제19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주요 관심사는 영미 모더니즘 문학 및 퀴어 페미니즘이다. 평론집 『퀴어-(포)에티카』(문학동네, 2024)와 산문집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핀드, 2024)를 썼다. nrz5haey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