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재밌는 일입니다.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요즘에도 수많은 무대에서 끊임없이 고전을 담지 않습니까. 수백 년 전 머나먼 나라,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일 겁니다. 국립극단이 올해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준대로 받은대로(MEASURE FOR MEASURE)> 역시 400여 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핵심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 각색한 것이겠죠. 그래서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오경택 씨가 궁금했습니다. 작품에 깃든 수많은 모습과 생각, 오경택 연출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봤습니다.
“작품의 원래 제목이
여행을 떠난 공작 대신 빈의 국정을 맡게 된 앤젤로는 원칙대로 법을 집행합니다. 예외도, 융통성도 없죠. 그로 인해 혼인 전 연인과 관계를 맺은 클로디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데요. 하지만 오빠의 사형을 막기 위해 찾아온 여동생 이사벨라에게 반해 자신과 잠자리를 하면 청을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몰래 모든 걸 지켜보던 공작이 개입하면서 사건은 점점 확대되는데요. 줄거리만 보면 권력과 그에 대한 저항의 얘기 같지만, 원칙과 함정, 절대적인 가치관과 모순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400년 전 셰익스피어 선생님이 이렇게 써 주셔서(웃음). 맞아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요. 그래서 전통적 의미의 희극이나 비극으로 나누지 않고 ‘문제극’이라고 하거든요. 인생 자체가 희극과 비극이 늘 손잡고 다니긴 하죠. 사회 자체가 이미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없는 자들은 늘 당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경사진 2중 회중 무대를 통해 상황에 따라 기울어지고 뭔가 엇갈리는 상황을 표현했어요. 이사벨라의 대사를 보면 ‘우리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형제들을 심판할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또 우리는 갑이면서 동시에 을이 되기도 하니까 더 좋은 사회가 되려면 각자의 기준으로 남을 시험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고전을 연출할 때면 어느 부분을 유지하고 어느 부분을 바꿀지 많이 고민하실 것 같아요.
“그렇죠. 원작은 사실 시의성, 공감 정도가 유독 덜한 작품이에요. 그래서 국내 무대에 많이 소개되지도 않았고요. 이번 작품은 원작의 45%를 들어냈다고 보시면 돼요. 드라마의 핵심 플롯만 남기고 캐릭터도 보강하고 결말도 바꿨어요. 그 기준은 첫째, 이해되지 않는 것,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것. 400년 전의 작품이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분분하거든요. 둘째, 이해는 되는데 공감이 안 가는 것, 너무 예전의 가치관이라서. 셋째,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되는데 재미가 없는 것. 이런 부분은 다 들어냈어요.”
무대에 올리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걸까요?
“이 작품은 전체적인 톤을 맞추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웃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재밌는 건가... 저는 원작을 학생 때 읽었는데 솔직히 재미없었다는 기억만 있거든요. 그런데 딱 한 부분은 남아 있었어요. 동생 이사벨라가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오빠한테 죽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엄청난 딜레마죠, 자신의 신념과 타인의 생명. 그런데 그 구절을 읽고는 재밌어서 웃었어요. 관객들도 그 부분에 웃는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결말만 잘 풀어내면.”
자연스레 원작이 궁금해지던데,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어떤 걸까요?
“가장 큰 건 결말 부분이에요. 희극이라는 장르는 마지막을 화해로 끝내는데, 그때 가장 많이 쓰는 모티브가 결혼이에요. 이 작품은 그런 희극적 외형을 담고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비극이죠. 그 어느 커플도 원하는 결혼이 아니니까. 1960~70년대에는 결말을 공작의 자비로 많이 해석했는데, 현대로 오면서 이사벨라가 청혼에 대해 침묵한 것을 암묵적 동의, 수긍이 아니라 답하지 않음으로서 저항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번 무대에서는 단순히 침묵으로 인한 저항이 아니라, 말을 하고 싶어도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사벨라가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질러도 안 들리게 표현했어요.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않은 상황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는 있지만, 여전히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의미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얼핏 보면 공작이 굉장히 현명하고 해결사 같지만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 권력자이고, 그런 차원에서 바너딘이 상징하는 면이 큰 것 같아요.
“공작이 가장 나쁜 사람이죠(웃음). 질서가 무너지고 도시가 타락할 때 그걸 감당하기 힘드니까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암행하면서 트릭을 통해 마지막에 자신이 다 해결한 것처럼 굴잖아요. 바너딘은 그에 반하는 인물이죠. 그래서 바너딘 캐릭터의 분량을 원작에서보다 대폭 강화했어요. 원작에서는 마지막에 방면하면 세상으로 나가는데, 저는 반대로 꺾은 거죠. ‘나는 너의 위선을 알고 있고, 내가 머물 곳은 내가 정할 거야. 감옥 밖 세상이 더 불평공해’ 등 공작의 위선을 꿰뚫어보는 인물로 상징성을 부여했어요.”
공연에서는 연출이 절대 권력자잖아요(웃음).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작품마다 고유의 색깔이 있는데, 그 색깔을 잘 살리는 게 연출의 몫이 아닌가. 공연을 이루는 여러 요소를 횡적으로는 잘 조직하고 정리하는, 종적으로는 요소들이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고무하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선택하는 사람이고요. 날마다 수만 개의 선택을 해야 하요. 그래서 연출은 첫 번째 관객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뮤지컬은 또 달라요. 가장 중요한 음악을 비롯해 무대, 의상, 안무 등 그야말로 종합적인 무대예술이라서 스태프의 역할이 중요해요. 아무래도 현대 연극은 연출가의 해석과 콘셉트가 곧 연극론이 되고 관객론이 되는데, 뮤지컬은 여러 제작 파트와의 협업이 굉장히 중요해서 그게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느냐가 핵심인 것 같아요.”
오경택 연출이 생각하는 자신의 연출 스타일은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리뷰 기사나 공연에 대한 댓글도 보시나요? 연출가로서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공연은 어쨌든 대중이 평가하는 거잖아요(웃음).
“그렇죠, 그런데 사실 잘 안 봐요. 호불호라는 건 늘 갈릴 수밖에 없고 취향의 문제니까. 공연이라는 건 모든 사람이 바라는 대로 예쁘고 안정되고 힐링이 되고 올바른 가치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는 없거든요. 연극은 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물론 호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직접 보지 않아도 주위에서 다 말해주고요(웃음).”
그럼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또는 행복했던 작품을 꼽는다면요?
“<준대로 받은 대로>(웃음). 여러 면에서 재미있었어요. 연말에 셰익스피어 희극 위주로 공연을 해왔기 때문에 부담되는 면이 있었거든요. 제 눈에는 이 작품이 희극으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데 생각했던 방향대로 해보라고 하셨고, 국립극단이라는 안정된 시스템 속에서 좋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고요. <킬미나우>는 연습 때 너무 힘들어서 기억에 남아요. 공연 전에 런쓰루를 하는데 끝까지 가본 적이 없어요, 다들 우느라고. 저는 배우들의 호흡을 좇는 편인데, 그때 평생 울 걸 다 운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작품은 2011년에 했던 <갈매기>. 연출적인 도전에 있어서 제가 가장 지향하는 스타일이었고 관객들도 많이 좋아해주셨거든요. 개인적으로 클래식이 좋아요. 고전을 거리두기라고 생각하거든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이야기가 지금도 통한다, 인간의 삶이란 계속 순환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잖아요. 공간과 배우와 관객이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극 <준대로 받은대로>와 함께 2017년을 마무리하실 텐데, 마지막으로 새해 바람을 여쭤볼까요?
“10년 전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름의 다짐, 각오 비슷한 걸 했어요. 1년에 단 한 편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영혼을 팔겠다! 그 마음이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직업과 작업에는 차이가 있는 거잖아요. 가급적 작업,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데 재밌는 작품으로 많이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셰익스피어가 그랬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연극 <준대로 받은대로>가 딱 그렇습니다. 실제 런던에 있는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세련된 연극 한 편을 본 것 같지만, 동시에 뭔가 민낯을 들킨 듯한 기분이랄까요. 얼핏 보면 희극이지만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비극이 없네요. 그래서 오경택 연출의 섬세하고 세련된 선택과 조화가 돋보이는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문득, 셰익스피어는 400년 전에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을까 궁금해지네요. ‘Measure for Measure’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묻게 되는 연극 <준대로 받은대로>는 12월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됩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