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 일본 군대와 한국남자의 ‘군대 이야기’
일제 강점기에 관한 논란은 항상 우리가 수용한 일본 문화, 제도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만 머무른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은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만 의미 있다. 일본이 수용한 서구 근대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문화를 해석하려면 이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글ㆍ사진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20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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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자는 다 군대 다녀온다!

 

아주 가까운 친구 선규는 내 군대 ‘쫄따구’다. 1982년에 화천 훈련소에서 만났으니 35년도 더 된 이야기다. 내가 군대에 강제징집 당했을 때, 외대를 다니던 그 또한 강제징집 당해 느닷없이 끌려왔다. 그나 나나 뭐 대단한 투사도 아니었다. 그저 또래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서슬이 시퍼랬던 전두환 정권 초기였다.

 

시위현장에서 붙잡히면 바로 감옥이나 군대로 끌려갔다. 선규는 나보다 일주일 늦게 군대에 끌려왔다. (군대에서 일주일 차이는 엄청나다!) 그래서 지금도 내 ‘군대 쫄따구’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군대에 왔기에 선규와 나는 고참들의 눈을 피해 학교 이야기며, 고향 이야기, 여자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혹독한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이 그렇듯, 지금도 선규를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술이 한두 잔이라도 돌면 나는 꼭 “네. 이. 병. 김. 선. 규!” 하고 놀린다. 예산 출신인 선규는 지금도 말이 느리지만 그때는 더 느렸다. “김선규!” 하고 고참이 부르면 “네, 이병 김선규!” 하고 바로 달려가야 하는데, 그의 대답은 너무 느렸다. 한 호흡으로 하지 못하고 아주 느릿하게 “네, 이. 병. 김. 선. 규!”라고 대답했다. 고참들에게 매번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바로 위 고참인 나도 선규 때문에 같이 두들겨 맞았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때 우리를 괴롭힌 고참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조영남 상병과 신찬수 일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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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년 사내들의 내무반 기억은 ‘정신적 트라우마’에 가깝다. 회식도 전쟁이었다. 다른 소대에 뒤지지 않게 미친 듯 노래를 불러야 했다. 회식이 끝나면 술 취한 고참들에게 화장실 뒤로 ‘집합’ 당해 그가 술 깰 때까지 두들겨 맞아야 했다. 이토록 희한한 군대 문화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한국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아, 이젠 군대 이야기가 집에서도 이어진다. 내 아들도 예비역 병장이기 때문이다. 내겐 아들이 둘 있다. 이 녀석들이 어렸을 때 나는, 우리 아들들은 군대에 안 가도 될 거라 생각했다. 군대 갈 일 없을 거라 큰소리도 쳤다. 내 유학 시절이던 1989년, 느닷없는 독일 통일을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도 금방 통일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다. 최근에는 핵전쟁까지 일어날 기세다.

 

내 큰아들은 철원에서 병장 제대했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둘째 아들도 이제 군대에 가야 할 나이다. 신체검사에서 가장 좋은 등급도 받아놨으니, 이제 곧 가야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큰아들과 나는 각자 자신이 근무한 곳이 더 추웠다고 우긴다. 나는 화천의 백암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곳이라 우기고, 아들은 철원 추위가 가장 살벌하다고 우긴다. 엄청난 한파가 밀려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나오면, 누가 근무한 곳이 더 추운지 내기까지 한다. 아내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매번 허탈하게 웃는다.

2, 3년의 군대 생활이 한국남자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가장 예민한 시기에 느닷없이 살벌한 환경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의 남자들만의 세상이다. 그것도 전쟁에 대비해 ‘살인훈련’을 받는 곳이다. 20대 초반의 사내들이 성인이 되어 처음 겪는 이 살벌한 체험은 평생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래서 술잔만 돌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거다. 왜 우리가 청춘을 그곳에서 바쳐야 했는지 평생에 걸쳐 묻는 거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까라면 까’야 하는 권위적인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군대 경험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문화다. 아무리 ‘요즘 군대 달라졌다’지만, 군대는 군대다. 한국남자들의 행태를 이해하려면 군대를 이해해야 한다. 물론 군대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구태여 내가 할 필요는 없다. 검색하면 이에 관한 이야기는 넘쳐난다. 내 의문은 도대체 이 특이한 문화의 ‘한국군대’가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는 거다.

 

오늘날 대한민국 군대의 기원은 1945년 12월 5일 미 군정이 설치한 ‘군사영어학교’와 1946년 1월 15일에 불과 1개 대대 병력으로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다. 물론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대한민국 군대의 시작으로 말해야 옳으나, 광복군은 오늘날 ‘한국 사내들이 실제 경험하는 군대’의 기원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해방 후의 한국 군대는 광복군과 싸웠던 일본군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한국 군대의 형식은 미군의 조직을 모방하여 만들어졌으나 그 내용은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 군대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한국 군대의 핵심인력들은 대부분 일본 육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 군대의 육군참모총장의 면면만 살펴봐도 일본 군대의 영향은 분명해진다. 일본 군대 출신의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다음과 같다.

 

1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일본 육사 26기, 일본군 대좌), 2~4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일본 육사 49기, 일본군 소좌),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일본 육사 26기, 일본군 중좌), 5~8대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일본 육사 55기: 만주군에서 편입, 만주군 상위), 6대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일본 육사 49기, 일본군 소좌), 7~10대 육군참모총장 백선엽(봉천군관학교, 만주군 중위), 9대 육군참모총장 이형근(일본 육사 56기: 만주군에서 편입, 일본군 대위), 11대 육군참모총장 송요찬(1941년 일본육군 군조로 임관), 12대 육군참모총장 최영희(일본군 소위), 13대 육군참모총장 최경록(일본 도요하시 예비사관학교, 일본군 소위), 14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일본군 소위), 15대 육군참모총장 김종오 대장(일본군 소위), 16대 육군참모총장 민기식(일본군 소위), 17대 육군참모총장 김용배(일본군 소위), 18대 육군참모총장 김계원(일본군 소위), 19대 육군참모총장 서종철(일본군 소위), 20대 육군참모총장 노재현(일본군 소위), 21대 육군참모총장 이세호(일본군 소위)

 

마지막 일본군 출신 육군참모총장 이세호의 임기는 1975년 3월 1일부터 1979년 1월 31일까지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군대가 창설된 1946년부터 1979년까지 30여 년간 일본군 출신이 한국 군대의 최고 책임자였다는 말이다. 참모총장을 역임하지는 못했지만, 군의 고위직을 차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군대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1961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1979년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또한 일본 육사 출신(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편입)이고, 해방 당시 일본 육군 소위였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간 한국 군대 지휘관들의 면면을 볼 때, 한국 군대에 미친 일본 군대의 그림자를 지우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물론 요즘의 대한민국 군대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술잔만 들면 꺼내는 80년대 중반까지의 군대 이야기는 일본 군대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 군대의 초기 지도자들의 친일 문제를 이미 여러 사람이 다뤘다. 내 문제의식은 조금 다른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다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경험한 일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우리가 경험한 그 일본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빠져 있다. 일본이 아시아 이웃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보다 수십 년 앞서 개항하고 서구문물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군대 또한 서구의 군사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도대체 그 군대가 어디냐는 것이 내 질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관한 논란은 항상 우리가 수용한 일본 문화, 제도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만 머무른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은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만 의미 있다. 일본이 수용한 서구 근대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문화를 해석하려면 이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가 수용한 서구 근대에 관한 논의까지 이어져야 한다. 한국의 근대사를 보다 폭넓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만 한쪽으로는 일본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이고, 한편으로 일제 강점기의 유산으로 비판하는 이중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다. 이는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19세기 메이지시대 일본 군대의 ‘군인칙유(軍人勅諭)’와
21세기 대한민국 군대의 ‘육군 복무신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 군대는 거의 10년에 한 번꼴로 전쟁을 치렀다. 대부분 일본 군대가 일으킨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참여한 양상은 조금 흥미롭다. 당시 일본 군대는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연합국 측에 참여해 독일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과 같은 편이 되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이쪽 편, 저쪽 편을 옮겨 다니며 일본 군대는 전쟁에 광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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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조선반도를 행군하는 일본 군대.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의 10년 간격으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 군대는 그 어떤 나라의 군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전적이다. 왜 그랬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일본 군대는 승승장구했다. 수백 년 아시아 대륙의 주인을 자처했던 청나라와 그 후의 중국을 대상으로 승리했고, 유럽 대륙에서 아시아 대륙까지 가장 넓은 영토를 호령했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무적으로 여겨졌던 러시아 발틱함대도 괴멸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중국의 독일 조차지였던 칭따오 지역을 공격해 빼앗기도 했다. 매번 어려워 보이는 싸움을 가까스로 뒤집어 승리했던 일본 군대는 당시 최강의 국가였던 미국을 상대로 하는 태평양전쟁도 겁 없이 달려들었다. 하여간 일본 군대는 그 역사적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희한하게 공격적인 집단이었다. 일본 군대의 시작을 조금 자세하게 살펴보자.

 

일본에서는 일본의 근대식 군대의 기원을 1869년으로 삼는다. ‘일본군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 1824~1869)가 병부대보(兵部大輔)에 올라 일본 육해군의 기초를 닦았던 해다. 오무라 마스지로는 원래 의사였다. 20대 초반에 당시 나가사키에서 활동하던 독일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밑에서 서양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쇄국정책을 폐기하도록 요구하는 서양 군대의 힘에 일본의 전통 사무라이는 결코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사직을 버린 뒤 서양식 군함 제조 기술과 항해술을 익혔다. 이후 그는 조슈번(長州藩, 현재의 야무구치 현)의 군사학교 교관이 된다. 조슈번은 사쓰마번(薩摩藩)과 더불어 일본 개항기를 주도한 지역이다. 우리에게 아주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도 이 조슈번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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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한가운데의 오무라 마스지로 동상. 오무라 마스지로는 근대 ‘일본군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일본 군대의 근대화를 성급하게 밀어붙이다가 암살당하고 만다. 그의 동상은 일본 최초의 근대식 동상이다. 동상은 군국주의가 채택한 문화적 기억 방식의 대표적 형태다.

 

 

오무라는 서구식 무기를 적극 들여올 뿐만 아니라 신분제를 타파한 국민개병제를 설파했다.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를 폐지하고 메이지 천황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그의 군대는 크게 활약한다. 메이지 시대가 열리자 오무라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근대화된 메이지 군대 창설의 주역이 된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진행되는 군 개혁에 앙심을 품은 이들에 의해 오무라는 1869년 9월 암살되고 만다. 그가 사망한 후, 야스쿠니 신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동상인 그의 동상은 지금도 그곳에서 볼 수 있다. (동상을 세워 기억하는 문화는 프로이센이 가장 잘 실천했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하기 전, 프로이센과 같은 나라의 ‘군국주의’는 동상과 같은 ‘기억의 도구’를 아주 잘 활용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오무라가 죽고 같은 조슈번 출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치열한 경쟁 관계였다. 1877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는 자신이 세운 메이지 정부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되었다. 내전을 진압했으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여긴 일부 정부군 병사들이 1878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다케바시(竹橋) 사건’이다. 이 사건이 마무리 된 후, 야마가타는 군인들이 황제에 충성하는 정신이 부족하다 여겨 ‘군인훈계(軍人訓戒)’를 발표하고, 1882년 이를 간결하게 명문화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모든 군인이 외우게 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든 일본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제창하고 외워야 했던 ‘군인칙유’에는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1. 군인은 충절을 다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軍人は忠節を盡くすを本分とすべし)!
1. 군인은 예의가 발라야 한다(軍人は?儀を正しくすべし)!
1. 군인은 무용을 숭상해야 한다(軍人は武勇を尊ぶべし)!
1. 군인은 신의를 중시해야 한다(軍人は信義を重んずべし)!
1. 군인은 자질을 으뜸으로 여겨야 한다(軍人は質素を旨とすべ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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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일본 육군의 초대 참모총장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와 번갈아 근대일본 정치를 주도했다. 일본 군대의 정신적 지침인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제정해서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모든 군인이 부동자세로 외우게 했다.

 

 

오늘날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자들에게는 이 오래된 일본의 군인칙유가 뭔가 익숙하다. 비슷한 것을 군시절 내내 외워야 했다. ‘육군 복무신조’다. 훈련소에 입소하면 가장 처음 외워야 하는 것이다. 점호 시간마다 간부들은 병사들이 육군 복무신조를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제대로 외우지 못해 내무반 콘크리트 바닥을 뒹굴러야만 했던 기억이 누구나 있다. 다음은 그 육군 복무신조의 내용이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우리의 결의)
하나,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통일의 역군이 된다.
둘, 우리는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지상전의 승리자가 된다.
셋, 우리는 법규를 준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넷, 우리는 명예와 신의를 지키며 전우애로 굳게 단결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 복무신조의 내용과 형식이 백여 년 전 메이지시대 일본 군대의 군인칙유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이 같은 내용을 매일 부동자세로 외워야 하는 훈련 방식 또한 메이지 시대의 일본 군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군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은 일본 메이지 시대인 1890년부터 일본의 학생들이 부동자세로 외워야 했던 ‘교육에 관한 칙어(敎育關勅語)’의 모방이었다.

 

뿐만 아니다. 우리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기를 앞에 두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외워야 하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는 내용의 ‘국기에 대한 맹세’ 또한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위 버전은 2007년에 개정된 것이고, 최초의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이다. 1974년부터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뀌었다. (심리학자로서 나는 왜 이런 맹세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번 고민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식민지의 조선인들에게 강제했던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변종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다. 황국신민서사에는 성인용 버전과 아동용 버전이 따로 있었다. 아동용 버전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私共は、大日本帝國の臣民であります).
1.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私共は、心を合わせて天皇陛下に忠義を盡します).
1.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私共は、忍苦鍛?して立派な强い國民となります).

 

다시 일본 군대 이야기로 돌아가자. 원래 오무라가 계획한 일본 군대의 근대화 모델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육군은 나폴레옹의 전설이 여전히 살아 있는 프랑스 군대였고, 해군은 영국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 유럽의 정세는 급변한다. 독일 통일의 계기가 되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1870년 발발한 것이다. 1871년 프로이센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다. 일본 군대는 프로이센 군대의 모든 것을 적극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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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