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은 무엇보다 한국의 친구들이 베풀어준 호의가 바탕이 되었다. 일본 서점을 시작으로 출판계에 대해 배우고자 했던 이들이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어를 공부한 덕분에 인연이 돌고 돌아 우리가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비록 우리는 한국의 출판에 대해 뒤늦게 접하게 되었지만 한국 서점의 흥미로운 점들을 계속 발견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 프롤로그를 읽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책과 서점이 만들어 준 바다 건너의 다정한 동료들. 서로의 세계를 넓혀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아주 큰 행운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정독하며 밑줄을 긋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러브레터』 를 빌려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돌려보던 중학생. 그게 바로 나였다. 일본 소설과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서가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중문화로 시작된 일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일본어 공부와 ‘일본어능력시험 1급 따기’라는 목표로 이어졌고, 그것은 곧 숙원 사업이 되어 버렸다. 일 년 정도 열심히 노력하면 자격증을 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노력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새해가 되면 학원에 열심히 나가다가도 회사 일이 바빠서, 약속이 생겨서 한두 번 빠지다가 더는 학원에 나가지 않기 일쑤였다.
그러던 와중에 땡스북스 워크숍으로 생애 첫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다. 교토와 오사카를 여행하며 게이분샤 이치조지점과 스탠다드 북스토어를 탐방했는데, 일본 서점인이 쓴 책이나 일본 서점 웹사이트를 참고하며 서점 실무를 공부하다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 보니 일본어 공부에 대한 새로운 열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본 서점원들을 만나 서점의 운영 철학이나 공간 구성, 특집 코너 등에 대한 안내를 받으며 서점 여행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워크숍을 계기로 나에게는 일본어 자격증이 아니라 서툴더라도 일본 서점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생활 일본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화 위주의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자 배운 걸 직접 써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교토와 오사카의 서점을 보았으니 이번엔 도쿄로 서점 여행을 다녀오자! 서점 특집이 실린 일본 잡지와 책이 있는 공간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을 보면서 방문하고 싶은 서점 목록을 만들고,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번역을 부탁해 해당 서점으로 메일을 보냈다. 나 역시 서점에서 일하면서 사전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많았기에 미리 메일을 보내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잡은 것이다. 17곳의 서점에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던 한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에서 오는 손님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문제는 내가 일본어를 고작 3개월밖에 배우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길을 묻거나 식사 주문 정도만 할 수 있는 왕초보 수준으로 패기 넘치게 약속을 잡았으니…. 뒤늦은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첫 방문지는 B&B 서점이었다. 메일을 주고받았던 테라지마 점장을 찾아 서툰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어 실력이 서투르더라도 이해해주세요.” 한국에서부터 수백 번 연습한 문장이었다. 테라지마 점장은 한국의 서점인이 연락을 준 건 처음이라며 환대해 주었고, B&B뿐 아니라 근처에 있는 다른 여러 서점을 직접 안내해주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친절이었다. 첫 도쿄 서점 여행에서 방문한 모든 서점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기 때문에 부족한 일본어 실력이라도 용기를 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일본어 공부를 계속하면서 일 년에 서너 번씩 본격적인 일본 서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 서점과의 교류는 땡스북스 퇴사 후 B&B의 토크 이벤트 초대로 이어졌다. 대표인 우치누마 씨와 대담을 진행하면서 그의 저서 『책의 역습』 이 한국에서 출간되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16년 6월 『책의 역습』 한국어판 출간이 결정되었다. 홍보를 위해 방한한 우치누마 씨와 담당 편집자인 아사히 출판사의 아야메 씨에게 나는 서울의 개성 있는 서점들을 안내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출판사의 부탁을 받은 것도, 다른 보상이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단지 일본 서점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의 서점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우치누마 씨는 같은 서점인으로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이틀 동안 함께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2박 3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간 그들에게서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현재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례없는 ‘서점 붐’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재미 있는 움직임을 일본에 알리는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2017년 6월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 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은 2018년 3월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일본 서점 여행이 B&B 토크 이벤트로 이어지고, 토크 이벤트가 『책의 역습』 한국어판 출간으로 이어지고, 『책의 역습』 한국어판 출간이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 의 출간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 책이 한국에 소개된 것이다. 저자인 우치누마 씨, 아야메 씨와 함께 이틀간 한국어판 출간 기념 세미나를 진행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벌어진 일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손짓 발짓에 번역기 어플을 동원하며 도쿄 서점을 돌았던 그때는 존경하던 일본 출판인들과 친구가 될 줄 몰랐고, 그들이 한국 서점에 자극을 받아 책까지 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목표를 세우고 움직여서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의 서점을 잇는 일이 목표였다면 일본어능력시험 1급을 따기 전까지는 일본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배운 일본어를 써먹고 싶어서, 일본 서점의 전문성을 배우고 싶어서, 나의 사적인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본 서점 여행이었다.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다 보니 일이 스스로 커지는 경험을 했다.
생각해 보면 일본 서점 여행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점이 될 공간을 계약하고 편집자 시절의 선배와 밥을 먹는데,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지혜야, 난 네가 편집자 그만두고 서점 주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다. 편집자가 내 미래의 전부였던 시절, 내가 7년 뒤에 서점 주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땡스북스를 퇴사하고 서점을 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을 때도 열 달 뒤에 그토록 바라던 서점 주인이 되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일 년 뒤에 내가 어떤 모습일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었다.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언제나 쉽게 지치고 쉽게 실망했다.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계획한 대로 성실히 살아간다고 해서 원하는 목표가 모두 이뤄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인생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저 지금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면 된다고, 그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바라던 모습이 된다는 걸 일본 서점 여행이 알려주었다. 그 깨달음이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으로 바꾸었다. 1년 뒤, 3년 뒤, 5년 뒤, 또 어떤 놀라운 일들이 내 앞에 펼쳐질까.
나는 이제 나의 '자리'가 궁금하지 않다. '되고 싶은' 어떤 자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런 자리라는 것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목표'가 아니라 순간 순간 나를 인정하며 지내는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결과'임을 알 되었기 때문이다.
- 『건너오다』 ,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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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오다김현우 저 | 문학동네
이 익숙하고도 낯선 곳들에서 삶과 사람, 세상의 다양한 ‘경계’를 건너고 ‘틈’을 여행하며, 그것에 대해 읽거나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감’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준하짱
2018.04.23
저도 뭔가 용기를 내어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싶네요~
yogo999
2018.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