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훈 : 빈티지 컬렉터보다 ‘이야기 수집가’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브랜드 마케터. 15년 넘게 오래된 물건들을 수집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빈티지 팩토리』 , 『북유럽 그릇 디자인』 이 있다.
나를 취미의 세계로 이끈 것은?
어렸을 때부터 오래된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경북 안동에 외가가 있었는데, 갈 때마다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오래된 놋그릇이나 새우젓 항아리 같은 물건을 찾아내곤 했다. 우표나 오래된 동전을 모으는 것도 좋아했지만 본격적으로 물건에 담긴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한 건, 유학시절 핀란드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장난감 전차를 만나면서다. 태엽을 감아 움직이던 장난감 바닥에는 ‘MADE IN U.S ZONE IN GERMANY’라고 써있었는데 ‘U.S ZONE이 뭘까?’라는 궁금증 때문에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봤고 결국 ‘2차 세계 대전 후 미군이 관할하던 독일지역에서 생산된 장난감’에 붙인 표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이런 이야기가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고 지금의 나로 이끌었다.
나에게 빈티지란?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듯이 물건 역시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빈티지는 누군가가 생활 속에서 사용했던 물건이다. 자연스럽게 생활의 흔적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다. 당연히 시간의 풍경, 수많은 이야기도 담겨 있다. 빈티지라는 수식어가 너무 흔하게 붙는 시대에 살고 있긴 하지만 빈티지는 ‘세월을 담은 물건’이라는 시간에 대한 전제조건이 붙어야 한다. 나는 여기에 이야기 하나를 더 더한다.
일과 취미의 균형은 어떻게 이뤄지나?
해외출장이 많은 일이라 항공편이 여의치 않아 현지에서 주말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자주 생긴다.그럴 때면 주저 없이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 열리는 동네 벼룩시장을 찾곤 한다. 벼룩시장의 장점은 역시 이야기가 있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을 확률이 일반 상점보다 높다는 점이다. 물론 빈티지나 골동품 상점에 가면 가게 주인의 안목과 취향에 맞게 정리된 훌륭한 물건들을 만날 수 있지만 자신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아니니 판매를 위해 필요한 정보만 가지고 있을 뿐 정작 그 물건에 대한 이야기는 알기 어렵다. 반면 자신이나 혹은 가족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지고 나온 벼룩시장에서는 직접 물건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서울에 있는 동안 평소엔 수집된 물건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틈틈이 한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오히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잊혀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헌데 이마저도 일이 바빠지면서 주말저녁에나 마음을 먹고 몇 시간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 되었다.
취미 생활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기억해보면 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아들이었다. 워낙 자식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를 둔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젊은 시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늘 즐거웠다. 그런 아버지에게는 내가 늘 갖고 싶던 물건들이 몇 개 있었는데 은으로 된 라이터와 어머니와 결혼할 때 선물로 받으신 손목시계와 같은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팔목에 채워진 시계는 언젠가는 꼭 갖고 싶었던 물건1호였지만 아버지께서는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되면 적당한 때에 물려줄게”라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그리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아버지께서는 약속처럼 자신이 오랫동안 아끼고 차던 손목시계를 물려주셨다. 단지 좋은 빈티지 시계가 생겼다는 즐거움이 아니라 이제 가족들로부터, 혹은 아버지로부터 어른이 되었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은 생각에 무척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아들이나 사위에게 시계를 물려준다는 것엔 앞으로 주어진 시간을 현명하게 잘 사용하기를 바란다는 당부가 담겨 있지 않을까?
지금 꽂힌 빈티지에 대하여?
요즘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남자의 물건들이다. 남자들의 물건, 특히 남자들이 아끼는 액세서리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여성과 비교했을 때 남자들의 물건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시계, 만년필, 안경, 구두, 커프링크스, 라이터 등 항목들도 뻔하다. 하지만 남자들의 물건은 여성의 유행에 민감한 액세서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함께하는 것들이다. 나름의 이야기도 존재한다. 세상의 평범한 남자들에게도 특별한 이야기를 가진 물건들을 조용히 음미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있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어른 남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내가 계속 하는 이유.
빈티지 물건들은 이미 오랜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보냈던 경험 덕분인지 처음 만났을 때도 서먹하지 않고 편안하다. 또 소장용으로 놔두기 보다 실제로 사용하면서 보다 더 가까워진다. 물론 개인적 성향이다. 사용하면서 깨지거나 부서져 더 이상 사용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엔 그 인연 역시 거기까지인 셈이니 예의를 갖춰 잘 정리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이야기의 더께를 더해가는 일상이 좋다.
기낙경
프리랜스 에디터. 결혼과 함께 귀농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 빡세게 적응 중이다. 지은 책으로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