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장래희망은 여행이다’라는 문장을 썼을 때 내 장래희망도 여행이었다. 돌이켜보면 안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다. 거의 언제나 여행을 꿈꾸며 살아왔다. 적어도 최근 십년 동안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 중 하나가, 온 세상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번 마감이 끝나면 쿠바에 간다거나, 장편원고 수정은 파리에 한 달 머물면서 할 예정이라거나, 역시 북해도는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거나 하는 동료들의 숫자가 다른 직종에 비해 약간, 아주 약간 더 많기는 한 것 같다. 그래도 뭐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가만, 눈물 좀 훔치고........ 그렇다, 지금 나는 내가 그렇지 못하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중이다.
가물가물하지만 내게도 한때 ‘떠남’이 마음과 결심의 문제로만 인지되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하면 어디로든 홀연히 갈 수 있는 줄 알았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라고 쓰려다 보니 손가락이 떨린다.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없던 시절은커녕.......황금시절이었다. 훌쩍 떠날 수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주체가 더 이상 ‘나’가 아님을 깨달았을 때 그 시절은 이미 장렬히 끝나고 없었다. 여행 여부를 결정하는 건 ‘상황’이었다. 생활인인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상황. 떠난다는 건 곧 ‘집’을 비운다는 의미이고, 집에서 내가 하던 역할을 누군가 대신 감당해줘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가뭄에 콩 나듯 하게 되는 출장여행 외에 홀가분한 개인적 여행을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 되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각지의 여행서를 충동 구매한 다음, 손이 닿지 않는 책장 높은 칸에 꽂아놓고 우울한 밤이면 한 권씩 펼쳐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말하자면 욕구에 대한 좌절로 인해 심사가 복잡하게 꼬여가는 사람이라고 해 두자. 최근에 가장 기발한 제목이라고 나를 감탄시킨 책이 『여행이야기로 주위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기술』 인 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낯선 도시의 뒷면을 밝혀내는 비법을 공개하라. 절대로 지도를 참고해서는 안 된다. 당신 사전에 지도 따윈 없다. 당신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방랑하고, 되는대로 구석구석 골목길을 뒤지고, 밤에는 경찰조차 꺼리는 위험한 지역을 배회하기를 즐기는 진정한 여행자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한 도시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라. 한 도시에서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데는 24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고 우겨라 (중략) 지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갈망은 당신의 신분까지 바꾸었다. 이제 당신은 진정한 유목민, 고행을 찾아 떠난 순례자다. 곳곳에 당신의 발자취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을 알려주어라. (마티아스 드뷔로, 『여행이야기로 주위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기술』 60-61쪽 중에서)
작가는 갑자기 사진첩 4권을 들고 찾아온 부모님 친구의 딸로부터 세계일주 여행의 후일담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들어야만 했던 어린 날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위트와 냉소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글을 읽고 있으면 자주 무릎을 치게 되고 계속 웃음이 새나오지만 마음이 완전히 후련해지지는 않는다. 혹시 내 웃음이 부러움이나 자기합리화의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자꾸 셀프 분석하는 못난 습관 탓이다.
언스플래쉬
‘당신의 인생을, 그리고 당신의 일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버린 여행에 대해 길게 떠들어라. 결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당신의 특별한 여행에 대해’(같은 책 142쪽) 라는 구절을 읽다가 문득 우리가 언제부터 여행이란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됐을지 궁금해졌다. 그 생각은 어떤 여행은 특별하고 어떤 여행은 그렇지 않은가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작년 여름께부터 짧은 여행을 떠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주말 일박이일의 일정으로 종종 영동 지역에 갔다 돌아오는 여정을 감행하게 된 거다. 전적으로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된 덕분이다. 물론 혼자일 리 없다. 평소에도 나를 꼼짝없는 생활인의 위치에 붙들어 매주는 아이들을 뒷자리에 태우고서다. 처음엔 주말에 답답한 집에서 뭉개느니 어디든 나서보자 싶었다. 초등학생 둘을 데리고 나서는 가족 나들이는 가슴 뛰는 여행이라기보다 생활인으로의 연장전 혹은 지방 원정경기 같은 느낌을 준다. 집을 비우는 대신 아예 집을 끌고 길에 나선 기분이랄까. 그럼에도 틈만 나면 강원도에 또 가 볼까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건 거기가 내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현실이기 때문이리라.
강원도에서 보내는 일박이일은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루는 그냥 일상처럼 흘러간다. 매번 거의 같은 숙소에서 묵고 몇 군데의 식당을 돌아가며 들른다. 시간을 보내는 일정한 패턴도 생겼다. 일요일 오전엔 웬만하면 속초 ‘동아서점’에 간다. 식구들 각자가 말없이 자신의 책을 고른다. 그 다음엔 고성 천진해변의 커피숍 ‘론존’으로 간다. 그곳의 넓은 테이블에서 각자 자신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오후를 보낸다. 생각해보면 우리 동네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구태여 거기까지 가서 반복하는 셈이다. 실제로 그런 일요일, 내가 느끼는 감정은 평안함과 안도감이다. 그 부드럽게 흐르는 시간의 결은 우리 동네의 하루와 미세하게 닮았고 미세하게 다르다.
출판사 온다프레스의 책을 처음 만난 곳도 동아서점이다. 『이야기를 그려드립니다, 시장과 그 너머의 삶에 관한 인터뷰』 . 펼쳐 읽은 곳도 론존이다. 강원도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눈으로 엮은 그림과 글이 퍽 좋았다. 서지정보의 출판사 주소가 강원도 고성의 아야진이었다. 서울의 큰 출판사에 다녔던 분이 그리 내려가 일인 출판사를 차렸다는 사실을 후에 전해 들었다. 그곳에서 펴낸 또 한 권이 『온다 씨의 강원도』 다. 부제는 ‘막연하지 않은 강원도 살이’다. 타지에 살다 강원도 양양 속초 고성으로 이주한 아홉 분을 인터뷰해 엮은 책이다.
여행이 타지로 멀리 떠났다 내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이주는 아예 그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다. 옮겨서 계속 살아가는 일이다. 옮긴다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야 할지 살아간다는 부분에 그어야 할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8년 여름, ‘어른들의 장래희망은 이주(移住)일지도 모른다’라고 가만히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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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씨의 강원도김준연 저 | 온다프레스
동네 구석구석의 산책길 등을 취재한 인터뷰집이다. 주로는 본래 대도시에 살던 20, 30대 연령의 직장인이 강원도 모처로 새롭게 터전을 잡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을 담아냈다.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멋진아이
2018.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