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홀리데이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의 하와이는 진짜 천국이었다. 나도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조금 다정해졌고 순해졌다.
글ㆍ사진 최지혜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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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간의 여름휴가가 끝났다.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너무 빨리 지나간다. 여행을 계획할 때의 나는 지나치게 의욕적이다. 돈을 준다고 해도 절대 산에 안가는 내가, 이번 여행에서는 꼭 트래킹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휴대폰 메모장도 잘 안 쓰면서, 여행 기록을 빠짐없이 남길 거라며 노트와 펜을 챙긴다.

 

이번 목적지는 하와이였다. 굳은 표정도 단숨에 활짝 웃는 얼굴로 바꿔주는 마법 같은 말 “하와이-이, 와이키키-이”의 덕분인지 하와이에는 유독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고, 천혜의 자연들은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시차가 발목을 잡았다. 밤에 출발해 현지 오전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는데, 심사가 너무 길어졌다. 허겁지겁 렌터카를 찾아 숙소에 도착해 씻고 한국에서 챙겨간 라면을 끓여 먹고 났더니 와이키키고 뭐고 눕고 싶어졌다.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지 했는데, 눈을 떠보니 창 밖의 풍경이 새까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숙소 주변을 조금 산책하다가 목이 말라 마트에 갔다. 하와이 맥주를 박스째 사와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휴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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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마셨을 때 별 감흥이 없어 기억에 남진 않았던 맥주 ‘BIG WAVE’. 그래도 하와이에 왔으니 하와이에 가장 어울리는 맥주를 마셔야 할 것 같아서 사왔다. 한 모금 마신 순간,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게 이렇게 상큼하고 향긋했던 맥주였나? 벌컥벌컥 한 캔을 금방 비우고 또 다른 캔을 땄다. 쨍한 하늘색의 바다, 밀려오는 파도의 리듬에 맞춰 카누를 타는 사람들, 양 옆과 바닥에는 야자수가 가득. 이렇게나 환상적인 패키지라니! 맥주 캔에 그려진 큰 파도를 타면서 마시는 맥주는 끝도 없이 들어갔다.

 

와이키키가 해운대 같다던 친구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모래사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 조리 피해 잠깐 걷기만 했는데도 너무 피곤해졌다. 정말 기대 없이 왔지만, 그래도 진짜 해운대 같은 줄은 몰랐다. 친구들의 말이 맞았다. 물놀이고 뭐고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모래를 대충 털고 근처 펍에 들어갔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실내에서 맥주를 들이키고 났더니 살 것 같다. 맥주를 마시고 30분 정도 걸어서 숙소에 돌아오니, 온몸이 노곤했다. 잠깐 눈 좀 붙일까?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된 것 같아…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깜깜했다. 어쩐지 꿀잠 잔 기분이더라.. 그 날 오후에는 트레킹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꺼냈다. 어머 이건 뭐야? 코코넛향과 커피향이 가득 나는 진한 흑맥주였다. 하와이 맥주는 한결같이 맛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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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흥미롭게도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외적인 여정은 내적으로 욕망하는 여정의 은유다.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르고, 카리브 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로키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파도타기하고, 이러한 것들은 이국적이고 유익하지만, 훨씬 심오한 동기를 가리는 시시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 동기란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288쪽

 

한국을 떠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착각에 자주 빠진다. 한국에서는 귀찮아하는 일들을 여행지에서는 쉽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장소가 바뀐다고 내가 바뀌는 건 아니다. 내려올걸 왜 힘들게 올라가냐며 등산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른함의 절정에서 낮잠 자는 걸 사랑하는 나는 여행지에서도 그대로다. 트레킹은 여행 마지막 날까지 미루고 미루다 하지 않았고, 여행 노트는 펼치지도 않았다. 아 물론, 맥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마셨다. 낮잠도 많이 잤다.

 

함께 여행한 친구는 현명했다. 하지 않을 것 같은 액티비티는 애초에 계획하지 않았다. 여행할 때마다 매번 착각에 빠져 하지 않을 것을 계획하고, 계획한 것을 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결국엔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아내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며 안도하는 나와 비교해, 얼마나 현명한지. 친구는 행복하게 낮잠을 자고 난 뒤에, 하와이의 해안도로를 질주했다. 친구는 솟아오른 산을 앞에 두고, 또 갑자기 펼쳐지는 바다를 한 눈에 내려보며 운전하는 그 시간을 정말로 좋아했다. 드라이브를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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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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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

 

 

번아웃 상태까진 아닐지라도 우리 대부분은 에너지가 간당간당하다. 가끔 휴식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지만 터무니없이 짧다. 당연히 귀한 휴식이니 함부로 쓸 수가 있나. 제대로 된 계획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또 애쓴다. 쉬는 동안에도 온전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완전히 에너지가 소진되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발적 백수가 됐던 경험이 있다. 푹 쉬면서 충전할 생각이었는데 충전이 잘 안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낭비라 생각했기에 뭐라도 해야 했다. 뭘 했냐고? 고민했다. 그 긴 시간을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 채웠다. 그것을 노력이라 착각하면서. 결국, 마음을 편하게 갖지 못하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인간은 뇌의 95퍼센트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쓴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리는 현재를 살지만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 고작 5퍼센트의 뇌로 현재를 살고 있으니 금방 방전될 수밖에 없다. 방전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하는 게 아니라 ‘덜’ 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좀 덜 하고, 노력도 좀 덜 하고, 후회도 좀 덜 하면 좋겠다. 그것이 방전되지 않는 지혜가 아닐까?
- 하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중

 

여행까지 와서, 하마터면 또 열심히 살 뻔했다 내가. 트레킹을 하고 하지 않고, 여행 기록을 남기고 남기지 않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기어코 뭔가를 하려는 부담감, 그걸 하지 않았을 때의 죄책감 같은 무거운 마음을 굳이 이 먼 곳까지 짊어지고 온 거다. 충전이 필요해 하와이까지 와놓고, 하마터면 또 방전될 뻔했다.

 

여행 후반부에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지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해변에서 물놀이를 했고, 돌아오다가 발견한 피자집에서 한 조각이 얼굴만한 거대한 피자도 2조각 샀다.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바다거북이를 보기 위해 차를 타고 북쪽 해변에 가기도 했고, 미세먼지 걱정 없이 차 뚜껑을 열고 바람을 흠뻑 맞으며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밤이 되면 집 앞 작은 테라스에 앉아 수많은 별을 봤다. 물론, 맥주도 열심히 마셨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의 하와이는 진짜 천국이었다. 나도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조금 다정해졌고 순해졌다.

 

바베이도스에서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도시는 고집스럽게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파란 하늘과 거대한 말미잘을 보았고, 라피아 방갈로에서 자고, 킹피시를 먹었으며, 새끼 거북이들 옆에서 헤엄을 치고, 코코넛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다가 왔다. 그러나 내가 살던 도시는 그런 나에게 무심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원은 여전히 물웅덩이였다. 하늘은 여전히 음울했다. 기분이 좋고 날씨도 화창하면, 우리 안에서 생기는 일과 바깥의 일을 연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와 런던의 모습을 보자, 세상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전개되는 일에 무관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집에 있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나의 삶을 보내야 할 곳 가운데 지구상에 이보다 나쁜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329쪽

 

하와이에서의 시간을 가득 끌어안고 왔지만, 일상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하루가 지나고, 회사로 출근하자 내 상태와 성격은 원복되었다. 회사의 풍경은 참 고집스럽게도 변하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랬다. 아무튼, 홀리데이. 7일간의 짧은 행복이 끝이 났다.

 

오늘 밤에는 하와이 맥주를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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