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후로 여러 연극과 소설, 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어머니와 딸의 서사를 만났다. 그때마다 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는데, 그 경험들이 내가 엄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어쩌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딸들의 서사는 교육받지 못했고 가난한 어머니를 극복하거나 혹은 대신해 자신의 길을 걸어가 마침내 다른 세계로 진입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대체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애증,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도 우리 엄마와 같은 유형의 엄마를 본 적이 없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것들이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또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이고 나와 엄마의 이야기 역시 수많은 형태의 모녀 서사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백수린 작가의 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백수린 소설가 편>
오늘 모신 분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중 한 분입니다. 2017년 문지문학상과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9년에 또 한 번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받으셨고요. 2019년 예스24 젊은 작가 후보에도 이름을 올린 바 있습니다.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등단한지도 벌써 9년!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중편 소설을 발표하며 이제는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하셨죠. 백수린 소설가님입니다.
김하나 : 『친애하고, 친애하는』 이라는 제목에 ‘친애’가 두 번 나옵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과는 다르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왜 제목을 이렇게 붙이셨는지 궁금해요.
백수린 : 한국어로 들었을 때 ‘친애하다’라는 말은 ‘사랑하다’라는 말하고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전을 찾아보면 ‘친애하다’는 ‘친밀히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제가 ‘친애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따뜻한 느낌이 들기보다는 조금 격식 있는 말 같이 느껴져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 한국어로는 ‘친애하는 ~씨’라고 쓰지 않잖아요. 영어에서 ‘Dear’는 더 친근한 표현이 되기는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제가 느끼는 ‘친애하다’라는 단어는 속뜻은 굉장히 가깝고 애정이 넘치지만 들었을 때는 거리가 느껴지는 단어였어요. 그런 느낌이 모녀 관계를 보여주기에 굉장히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애하다’라는 단어를 선택했고요. 소설에 모녀 관계가 두 쌍이 나오다 보니까 『친애하고, 친애하는』 이라고 두 번 반복해서 연결을 지었습니다.
김하나 : 말씀하신 것처럼 『친애하고, 친애하는』 에는 할머니와 ‘나’가 있고 그 사이에 엄마가 있죠. 사이에 있다기보다는 삼각형처럼 약간 떨어져 있는 인물처럼 그려져 있어요. 할머니와 ‘나’는 아주 가깝고, 엄마는 할머니와도 거리가 있고 ‘나’와도 거리가 있죠. 그 관계 안에서의 이야기들인 건데요. 궁금해지는 것은, 작가님은 엄마와의 관계가 어떠셨나요?
백수린 : 저도 어렸을 때는 굉장히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은 아니지만, 저희 엄마도 굉장히 바쁜 워킹맘이셨기 때문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저희 집에 사셨는데, 그래서 저는 친할머니와 유대관계가 굉장히 좋고 엄마와는 사이가 조금 멀...었다고 하면 섭섭해하시려나요(웃음).
김하나 : 어머니께 책읽아웃에 출연했다고 말하지 마세요(웃음).
백수린 : 그래야겠어요(웃음). (엄마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면서 관계가 훨씬 좋아졌어요.
김하나 : 어떻게 관계가 조금은 다른 양상이 됐다고 기억하세요?
백수린 : 엄마랑 제가 조금 거리가 있었던 것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생각을 하는 편이었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저한테 나쁘게 하지는 않았거든요. 『친애하고, 친애하는』 의 엄마보다 훨씬 다정하고, 일과 가정을 양립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는 엄마였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저에게는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생각을 굉장히 오래 하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는데, 그러다가 깨닫게 된 거죠. ‘이것은 엄마의 잘못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고, 시스템의 문제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것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해보게 되고 엄마한테도 다가가려고 하고 엄마를 이해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또 제가 성인이 되고 나니까 엄마가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을 힘듦을 이해할 수 있게 됐잖아요. 그러니까 ‘당시에 엄마가 나에게 줬던, 내가 작다고 느꼈던 것들이 사실은 굉장히 큰 거였구나’ 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힘이 생겼던 것 같아요.
김하나 : 엄마가 작가님께 보였던 것들이요?
백수린 : 네. 예를 들면 엄마가 일을 많이 하면서 우산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거나...
김하나 :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죠(웃음). 모든 아이들이 결정적으로 느끼는 포인트가 ‘엄마는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지’인 것 같아요.
백수린 : 그렇죠. 저도 그 이야기를 굉장히 많은 사람들한테 들었어요. 저도 ‘우리 엄마는 왜 우산을 가지고 오지 못하지?’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었는데요. 그래서 예전에는 ‘우리 엄마는 정상적인 엄마랑 조금 다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는 나에게 결여를 주고 있어’라는 것에 더 골몰했다면, 저도 성인이 되고 일을 하고 여성으로서 살아가다 보니까 ‘그런데도 우리 엄마는 매일 아침 나에게 도시락을 싸줬어, 그건 얼마나 큰 사랑인가’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김하나 : 『친애하고, 친애하는』 에 여러 이미지가 있지만 제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는 아주 판타지적인 부분인데요. 할머니가 언젠가의 여름을 회상하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죠. 작가님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백수린 : 네, 할머니가 손녀딸에게 들려준 장면을 손녀딸이 자신의 방식대로 다시 회상하면서 나오는 장면인데요. 30대 초반의 젊은 엄마였던 할머니가 어린 딸-지금은 ‘나’의 엄마인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옆길로 새서 바닷가로 갔다가, 딸은 잠깐 세워두고 엄마가 옷을 다 벗은 채로 바닷가를 향해서 달려가는 여름날의 풍경, 그걸 할머니한테 듣고 ‘나’가 다시 생각하는 장면이에요.
김하나 : 굉장한 해방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어요. 이 장면을 쓰실 때 작가님은 어떤 느낌이셨을지도 궁금해요.
백수린 : 저도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고요. 물론 모든 장면에 공을 들였지만, 이 장면도 공들여서 쓴 장면 중에 하나인데요. 거기에 ‘딸이 엄마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본다’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독자들도 알몸인 할머니가 바다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외설적이라거나 ‘왜 저래?’ 이런 느낌이 아니라, 황홀하게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장면을 아름답게 쓰고 싶은 욕심이 굉장히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빛에 대한 언급도 많이 하면서 공을 들여서 썼죠. 이걸 통해서 여성들이 자유를 추구하는 여정 같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김하나 : 개인들의 이야기는 다 다를 것인데 모녀 서사가 비슷한 구조를 띄게 되는 것은, 가부장제와 떼어놓고 생각을 할 수가 없죠. 할머니의 삶도 그렇고, 자신이 너무 많은 걸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엄마도 그렇고요. 사람들이 엄마에게 묻는 책임이라는 것도 공부는 공부대로 잘해야 되고, 그런데 아이를 떼어놓고 공부를 하면 안 되고, 아이에게도 잘해야 되고 등등 너무 많은 것들이 주어지잖아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모녀 관계가 왜 서로를 아프게 하는지 이야기하려면 가부장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백수린 : 모녀 관계가 조금 특수한 인간관계가 되는 많은 원인은 결국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들이 어떤 것들을 포기하도록 종용되어온 것, 그리고 포기하는 대신 모성신화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실현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 그런 것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되고요. 제가 불문학을 공부할 때 여성 작가들의 자전 소설, 자서전이 관심사였는데요. 여성 작가들이 쓴 자서전이나 자전 소설을 보면 흥미롭게도 엄마와의 관계가 되게 복잡하고, 엄마 때문에 힘들고, 이런 게 20세기 초반 프랑스에서도 똑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한국이나 프랑스의 문제가 아니고, 20세기나 21세기의 문제도 아니고, 가부장제가 있는 한 계속 반복되어 온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김하나 : 여성과 세계 사이에는 한 겹이 더 있죠. 남자가 만들어 놓은 틀이라는 한 겹이 더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여자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묶이지 않고 개별적이고 사사로운 것이 되는가.
백수린 : 저도 그 생각 진짜 많이 해요. 제가 여성 작가이고, 여성 주인공을 많이 쓰는 작가이기도 한데, 제가 쓴 이야기가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으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 때문에 특수한 이야기로 한정이 되어 바라봐지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할 때가 있죠. 이 고민도 여성 작가들에게는 굉장히 유서 깊은 고민이에요. 작가의 말에도 썼듯이, 제가 이 소설을 여성 삼대의 이야기로 썼지만 이것이 그냥 여성 서사로 한정되어 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고요. 인간의 이야기, 인간들이 서로 보듬고 사는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고요.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하나 :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쓰셨죠.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삶과 죽음, 상처와 용서, 궁극적으로는 다정하고 연약한 인간들을 끝내 살게 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다.” 너무 멋있는 거 아닙니까(웃음).
김하나 : 작가님의 소설 중에는 외국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소통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하잖아요. 이를테면 「감자의 실종」 같은 경우에는 어느 날 ‘나’가 ‘감자탕이라고? 감자를 먹는다고?’ 하고 너무 놀라서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하는데, 주인공에게는 ‘개’라는 단어가 ‘감자’로 대치되어버린 거죠, 아무 설명도 없이. 그래서 나중에는 이런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끼리 호소하는 카페에 글을 쓰는데, 그 글을 쓸 때조차 ‘내가 지금 이 단어를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인지, 이게 제대로 뜻이 전달될지’에 대해서 고민하는데요. 그 장면이 되게 우화적으로 읽혀요. 작가님이 글을 쓰실 때도 이런 고민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내가 쓴 글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백수린 : 저는 기본적으로 그런 회의감이 많은 사람이고요. 오독될 거라는 것을 확신해요. 「감자의 실종」에서도 주인공이 인터넷 카페에서 글을 쓸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감자’를 ‘개’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결국은 완벽하게 이해를 받을 수는 없는 걸 알면서 글을 쓰는 건데요. 저는 언어라는 것이 굉장히 투박한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언어를 통해서 쓰는 작업이니까 거기에서 오는 불안이나 두려움이 항상 있죠. 이게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투박한 도구인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은 각자가 느꼈을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제가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이라고 아무리 주입을 해봤자 전달이 되지 않으니까 제가 그린 그림을 통해서 각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고유한 사랑을 꺼내볼 수 있으면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그런 작업을 계속 하고 있어요.
*오디오클립 바로듣기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391/clips/200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