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다 못 읽은 것까진 어쩔 수 없다 쳐도 책 얘기를 안 하고 자기 얘기만 할 거면 뭐 하러 독서 모임에 오나요. 그런 분들은 아는 자조 모임 있으면 거길 소개해 주시는 게 좋겠어요. 저는 책을 이해하고 싶은 거지, 남 얘기나 듣자고 독서모임 오는 거 아니에요.”
이 메일을 받았을 때 조금 찔렸다. 나도 독서모임에서 넘치는 자의식을 주체 못하고 내 얘기를 지나치게 자주 꺼내는 독자니까. 내가 모임 진행자라 말을 많이 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게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메일의 발신자가 원한을 품은 대상과 나는 공범이 아니었다. 아, 아닌가? 나도 그들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울고 웃으며 모임장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책으로의 회귀를 시도하지 않았으니 공범인 건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비난은 어쩌면 나를 향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독서모임을 운영하다 보면 이런 유의 메일을, 그러니까 ‘도대체 네 얘기가 뭐가 중요한데… 제발 책 얘기나 하자…’는 피드백을 자주 받는다. 책을 너무도 사랑하는 어떤 독자들은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독서모임을 견디지 못한다. 이해한다.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도무지 책 이야기라고는 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모임에서는 나도 다른 참여자와 모임장을 미워한다. 제발 남 얘기도, 책 얘기도 좀 들으세요… 하면서.
책은 만들어진다. ‘만든다’는 말 안에는 여러 사람의 노력과 헌신은 물론 ‘선택’이 내포되어 있다. 글쓴이에 의해 한 번, 번역서라면 번역가에 의해 또 한 번 선택된 재료들은 급기야 편집자에 의해 다시 한번 다듬어진다. 책은 읽히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상품이기에 독자에게 선택받을 수 있도록 정교하게 도려내고, 다듬고, 강조하는 식으로 조형된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읽고 접하는 ‘이야기’는 탈락하지 않은 말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독자는 책이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전 정보를 알고 있는 채로 집어 든 책이라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돌연 찾아온다. 책과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자극을 준다. 특히 모르는 이야기일 때 더욱 그렇다. 이 세상에 책과 나, 단 둘만이 남겨진 기분이 들 정도로 황홀하고 짜릿하다. 아마 독자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필시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오직 한 권의 책만을 필터 삼아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 이때 책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그러면 독자는 책이 수많은 선택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고로 결코 투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 언어가 되지 않은 그 무엇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책의 둘레에도 바깥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아예 문자를 ‘살해’해 버리고, 사람이 뱉는 ‘말’만을 남긴다면 어떨까? 『문자 살해 클럽』은 문자 과잉을 박멸하겠다는 일념하에 모인 문자 살해 클럽과 클럽에 갑작스레 합류하게 된 ‘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문자 살해 클럽의 회원들은 이야기를 구상할 권리를 주장하는 독자들, 정확히는 독자’였던’ 사람들이다. 도서관들이 “독자의 상상력을 짓밟았고 소수 작가 그룹이 내놓은 전문적인 글들이 서가와 머리를 토할 정도로 가득 채웠”다고 말하는 그들은 구상할 권리가 “프로나 아마추어 모두에게” 주어졌음을 강조하며 각자가 구상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이곳에서 문자는 허용되지 않는다. 어떠한 기록도 가능하지 않은 이 공간에서 클럽의 구성원들은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쏟아내며 상상력을 펼친다. 그러나 그 곳을 벗어나는 순간, 그들에게는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삶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책의 어디에도 그들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구술로 전해지는 이야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문자 살해 클럽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남긴 ‘나’는 문자 살해 클럽의 ‘말’을 기록한 책을 이렇게 마친다. “이제, 말들을 돌려주려 한다. 전부, 단 하나만 제외하고. 그 하나는 바로 ‘삶’이다.”
애초에 독자는 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의 경험에 기반한 해석들은 책에 개입되어 책을 만드는 과정에 합류한다. 책은 독자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다. 나와 당신이 같은 책을 읽었다 해도 그것은 읽기의 노정을 마친 순간 다른 책이 된다. 한 권의 책을 읽은 그대로 남기는 게 아니라 하나의 책을 100명의 독자가 읽고 100권의 새로운 책으로 만드는 게 독서다. 독서에는 끝이 없다. 둘이 만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또 다른 독서가 시작되고, 셋이 만나면 다른 방향으로 튀어간 독서가 시작된다. “끈기 있게, 자신과 자신에게서 밀려나온 그 무수한 것을 최대한 쥐어짜 삐걱거리게”1 하는 것이 ‘읽기’라면 ‘함께 읽기’는 삐걱이다 헤매고 어긋나버린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며 다가가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건 문자 살해 클럽에서 이야기한 ‘구상할 권리’와 닿아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새로이 구상하는 것, 재구성하여 전혀 다른 여러 개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 그러나 ‘이야기의 구상’이 독서의 본질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구상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때로 우리를 책 속에 가두고, 삶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문자 살해 클럽』의 ‘내’가 썼듯 이야기를 향한 과도한 집착은 삶을 밀어낸다. 사람을 삭제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책에 다가간 끝에 삶이 있다는 사실이다. 책은 삶에 도달하기 위한 경유지일 뿐 도착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완결’이라는 이름으로 책이 열어젖힌 문을 닫아 버린다. 그들은 삶에 다가서기 전에 이야기를 멈춰 세운다. 결별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독서모임이다. 독서모임에서 우리는 책을 ‘과정’으로서 마주한다. 독서의 여정에는 책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책의 귀퉁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뒤로 한 채 무정하게 책과 결별하는 독자들도 독서모임에 온다. 책과의 관계를 서둘러 종결짓는 연쇄결별러들과 책의 귀퉁이에 거주하는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2들의 만남은 유쾌하지 않다. 앞서 말한 메일 같은 피드백이 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시 메일로 돌아가자면 나는 아직도 앞서 언급한 그 메일에 답장을 쓰지 못했다. 뻔뻔하게도 채널예스의 연재분에 메일을 인용해도 되겠냐는 새로운 메일만 보냈다. 1시간도 안 되어 인용해도 좋다는 답장이 왔는데, 그 메일의 하단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생각은 변함없다지만, 나는 이제 그에게 이렇게 답장을 쓸 참이다. “독서모임에서는 서로 다른 시공간이 부딪힙니다. 부딪힘 또는 마찰은 우리를 갈등하게 만들겠죠. 저는 이야기를 끝내기보다 삶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독서를 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끝내려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아요. 갈등을 함께 겪으며 책을 만나고 싶어요. 만약 갈등이 끝내 봉합되지 않는다면 그건 각자의 잘못이라기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페이지가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다음 장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서로의 삶이 만나는 다음 장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우리 이야기 말고 삶에 도착하기 위해 함께 걸어보면 어때요?”
1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2 “마지네일리아는 "여백(margin)에 있는 것들"이란 의미에서 파생됐다. (9쪽) (...) 마지네일리아는 여성적 읽기의 공간으로 열려 있다. 읽기가 쓰기로 쓰기가 다시 읽기가 되는 이 순환적 공간에 타자가 기거한다. 여성 작가/독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의 마지네일리아로 존재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읽기는 타자의 도움으로 나를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실천이다.(15쪽)" 김지승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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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
연경
2025.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