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3월 우수상 - 우리 살길 참 잘했다 그쟈?
뒤돌아볼 작은 여유조차 주지 않던 삶에서도 엄마는 종종 잊지 않고 내게 말하곤 했다. "우리... 잘 살아 보자"
글ㆍ사진 김정인(나도, 에세이스트)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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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지 않아, 엄마” 

초등학교 3학년에게도 '죽고 싶다'는 말은 너무 직설적이었다. 10살의 나는 죽는 건 무서웠지만 그렇다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 당시 내 삶에서 ‘산다’ 는 건 꽤나 재미없고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무능한 아빠가 보기 싫어 도피하듯 숨었던 작은 방에서 엄마는 저녁을 차리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니 나이에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인아”  그날 밤 우린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아마도 낮에 친구 민을 만나고 와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집 앞 상가 한의원 집 둘째 딸이었던 민은 3학년 올라와서 처음 같은 반이 되어 친해졌다. 민은 닮고 싶을 만큼 흐트러짐이 없는 친구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두 눈에 별빛이 가득했던 아이. 민의 자신감은 어떤 뿌리 깊은 자존감에서 나온 듯했고 그건 아마도 든든한 민의 가족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가끔 민의 아빠가 있는 한의원에 놀러 갔고 나는 자주 다정한 부녀의 모습을 목격했다. 나에겐 그런 멋진 아빠를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마냥 그들의 따뜻함이 좋아서 한참을 멀리서 지켜봤다. 민의 가족은 아껴보고 싶을 만큼 완벽하게 행복해 보였다. 그들과 함께하면 할수록 즐거웠지만 마음 한편에 있는 외로움도 커졌다. 나는 어디에서도 이방인이라는 걸 또렷하게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들에게서도, ‘행복’ 에서도.

민의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 집은 현관부터 서늘한 공기가 가득했다.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일 년 넘게 각자 방에 숨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사업 꿈을 꾸느라 몇 년 동안 돈을 벌어오지 않던 아빠와 실질적 가장 노릇을 했던 엄마는 지난한 다툼을 끝내고 무거운 침묵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지워내는 집에서 나의 자리 또한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묵직한 불편함을 매일 인내하는 건 어린 내게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이런 게 사는 거라면 관두고 싶었다. 살아내는 건 재미없는 일. 10살의 결론은 40살의 엄마가 늘 하던 생각과 사뭇 닮아 있어서, 그날 밤 엄마와 나는 허무한 위로 한마디 서로 건네지 못하고 조용히 울었다.

 “그래도 인아... 우리 살길 참 잘했다 그쟈?” 

찬 바람이 불던 토요일 밤, 맥주 캔 입구를 어루만지던 엄마가 20년 만에 어렵게 꺼낸 한 마디는 잊고 살았던 그날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어느새 서른이 된 나와 60살을 앞둔 엄마는 식탁에 앉아 눈이 빨개진 채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나에게만 아프게 남아있을 줄 알았던 '그날'은 엄마의 기억에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마음에 맺혀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까. 10살의 내가 받고 싶었던 위로는 내 나이 서른을 넘어서야 돌아왔다. 엄마 어깨 위에 조용히 손을 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적절히 도착했다.

겨우 10살밖에 안된 니가 살기 싫다고 했을 때 엄마가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차마 못 하겠더라. 이상하게도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말만은 잊히지 않더라고. 엄마도 그때는 사는 게 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몰랐으니까. 맥주 한 캔 따서 먹을 여유가 생긴 이제야 사는 맛이 뭔지 조금은 알겠거든. 인아, 20년 동안 우리 숨 돌릴 틈도 없이 참 열심히 잘 살아왔다. 그쟈?” 

엄마는 내가 12살 되던 해 아빠와 이혼하고 세 식구 가장이 됐다. 40살 넘은 중년 여성이 생계로 선택한 일은 녹록지만은 않았다. 10년 넘게 동네 마트 캐셔로 벌어들인 월 80만 원은 고단한 삶을 한순간도 쉽게 잊지 못하게 했다. 뒤돌아볼 작은 여유조차 주지 않던 삶에서도 엄마는 종종 잊지 않고 내게 말하곤 했다. “인아, 우리... 잘 살아 보자”  그럴 때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가끔은 품에서 펑펑 울었고 어떤 날은 배시시 웃어넘겼다. 어쩌면 20년 전 '그날'의 위로는 어느 날 문득 도착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김정인 꾸준히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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