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라는 장르의 거의 모든 것을 완성한 작가. 대실 해밋은 자신보다 조금 앞선 세대(주로 영국에 살고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화려한 범죄 트릭과 아름답고 평화로운 부르주아의 시공간을 망설임 없이 부숴버렸다. 그 자신이 1915년부터 1921년까지 핑커턴 탐정 에이전시에서 탐정으로 일하며 온갖 험한 일을 보고 들었기 때문에(해밋이 담당했던 많은 업무 중에는 노조 분쇄라든가 파업 방해, 파업 주동자의 린치 등이 포함되었다. 해밋은 탐정 에이전시를 그만두고 나서도 그런 일을 지시받았다는 것 자체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며 늘 괴로워했다),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거친 세계, 정의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 불법과 합법 사이를 심상하게 넘나드는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소설을 썼다.
해밋이 쓰는 소설에서는 어떤 범죄를 감추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트릭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지켜봤고 종이 위에 새롭게 되살린 뒷골목 남자들의 음험한 세계에는 배신과 거짓말과 협잡이 일상이었고, 오히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리얼리즘’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종류의 미스터리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해밋의 후배 작가들, 즉 레이먼드 챈들러라든가 로스 맥도널드가 좀 더 공들여서 다양한 종류의 욕망이 뒤얽히며 꿈틀거리는 부르주아 가정의 윤택한 풍경 너머로 탐정이 느끼는 내면의 갈등을 상세하게 서술했고, 미키 스필레인이 거의 희화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폭력(정확하게는 살인. 미키 스필레인의 탐정은 그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과 섹스로 점철된 강력한 액션활극으로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켰다면, 대실 해밋에게는 그 어떤 과시적인 욕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 모든 사건들이 제멋대로 굴러가다 파국을 맞이하는 순간의 씁쓸한 냉소와 환멸을 과장 없이 기록할 뿐이다.
대실 해밋의 장편 소설 다섯 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무래도 『몰타의 매』와 『붉은 수확』이다. 샘 스페이드와 컨티넨털 옵(소설 속에서는 ‘나’로만 등장한다)이라는 하드보일드계의 걸출한 아이콘을 탄생시킨 두 작품은, 날카로운 유머와 피의 분출이 엮어내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비교적 ‘읽기 쉽게’ 펼쳐진다. 그런데 해밋 본인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평했던 작품 『유리 열쇠』의 경우는 다르다. 아마 위의 두 작품에 이어서 곧장 『유리 열쇠』를 읽는다면 그사이의 간극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도시의 거물 폴 매드빅은 합법과 불법,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세력을 넓혀가는 정치인이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상원의원 헨리와 손을 잡았다. 매드빅과 형제처럼 지내는 보좌관이자 도박꾼인 네드 보몬트는, 매드빅의 선택이 탐탁하지 않다. 특히 매드빅이 헨리 의원의 딸 재닛을 흠모하여 이번 기회에 청혼까지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네드는 매드빅이 헨리 쪽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던 중 재닛의 오빠 테일러가 한밤중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매드빅이 범인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번져간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과 언론과 조직폭력배의 결탁은 도시를 혼란으로 밀어 넣고, 네드는 사건 이면에 더 추악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유리 열쇠』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점은,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밋은 전작 『몰타의 매』에서도 비슷한 문체를 사용했지만, 『유리 열쇠』에서는 더한층 복잡한 지하세계를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표정 변화와 미세한 움직임, 방에 혼자 있을 때의 루틴 등만 기술할 뿐이다. 우리는 주인공 네드 보몬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그가 어떤 동기로 이렇게 움직이는지, 폴 매드빅과 재닛 헨리에 대한 그의 마음은 언제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달복달하게 된다. 그런데 잠깐,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안다’라는 인식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현실에서 마주치는 타인들의 의도와 속내를, 우리는 그들의 외양과 발화되는 말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픽션에서는 전지전능한 작가가 등장인물의 내면의 베일을 걷어 올리며 그들의 독백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사실상 방백이나 다름없이, 등장인물들은 독자에게 ‘나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는 중이다’라고 누설한다. 대실 해밋은 그 기법의 편의성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더 까다롭고 불편하며 불친절하지만, 그 선택이야말로 하드보일드라는 장르가 고전적 미스터리를 넘어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네드 보몬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몇 군데 띄엄띄엄 등장한다. 소설 초반, 경마에서 딴 돈을 받지 못한 네드가 자신을 속인 사기꾼을 직접 잡기 위해, 지방 검사의 특별 수사관 자리까지 억지로 얻어낸다.
“단지 돈 때문은 아니야. 3천2백 달러가 큰돈이긴 하지만, 5달러여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두 달 동안 한 번도 못 이겨서 정말 힘들었어. 내게 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면 나란 놈이 무슨 쓸모가 있겠어? 그럴 때 돈만 따면 괜찮아진다고. 남들 앞에서 어깨를 펴고, 나도 여기저기 발에 걷어차이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 한 번도 못 이기고 계속 지기만 하는 게 문제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계속 밟히기만 했단 말이야. 그런데 드디어 징크스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그놈이 날 엿먹인 거야. 견딜 수 없어. 이번에도 참으면 난 또 밟히는 거고,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난 절대 참지 않고 그놈을 찾아낼 거야.”(37쪽)
그리고 네드가 폭력배 일당에게 납치되어 감금되었다가 방에 불을 지르고 탈출하는 순간을 묘사한 문장이 있다.
“그는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밖은 밤이었다. 그는 양쪽 다리를 차례로 창틀에 올리고 배를 대고는 몸을 아래로 내려 창틀을 붙잡고 매달렸다. 발에 닿는 게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자, 그는 손을 놓아 버렸다.”(130쪽)
네드 보몬트는 그 자신이 풀어야 하는 사건 한복판에 연루되어 있으며 가담자이자 피해자, 가해자인 복잡한 위치에 놓여 있다. 여기서 그가 내리는 결단과 행위의 원인을 굳이 짐작해보자면, 네드의 원래 ‘직업’이 도박꾼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단서일 것 같다. 냉철한 상황 판단이 가장 중요한 덕복인 정치인 보좌관으로서 움직이면서도, 네드가 때때로 무모하리만치 이상한 디테일에 집착하며 목숨을 걸고 덤벼들 때, 그것은 운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도박꾼의 생리에 더 충실한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블랙 달리아』와 『LA 컨피덴셜』의 작가 제임스 엘로이는 대실 해밋에 관해 쓴 에세이에서, 평론가 데이빗 T. 바젤런의 말을 인용한다. “해밋의 작품 세계의 핵심은 미국 사회의 남성적 형상이다. 그 남성은 기본적으로 직업인이다. 내키지 않게 시작하지만 결국엔 그 일을 끝장내고 말겠다는 추진력으로 미친 듯이 덤벼든다. 일과 맺는 이러한 관계는 아마도 전형적인 미국인의 태도일 것이다. 일을 제대로 하느냐 혹은 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더 큰 선악의 문제를 대체해왔다.” 엘로이는 대실 해밋이 핑커턴에서 겪었던 괴로운 상황이 이후의 그의 윤리 의식과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이기도 했다. “『유리 열쇠』는 하나의 기나긴 계략이다. 부질없는 해결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계략.”1)
나름의 원칙에 따라 ‘공략법’을 작성해두었지만, 막상 그 공략이 먹혀들었을 때 도출되는 결과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다면 그다음엔 뭘 해야 할까? 네드 보몬트는 폴 매드빅에 대한 우정(이라기보다는 사랑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다)을 유일하게 지켜가는 가치로서 간직했지만, 어쩌면 그 우정마저도 결국엔 운에 맡겨버린다. 뭔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듯) 걸어보는 내기야말로 도박꾼이라는 직업인의 본질이자, 간전기의 미국, 대공황 시대에 진입한 1930년대의 미국이라는 정글 한복판에서 목숨을 가까스로 부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황량한 영혼을 그대로 포착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리 열쇠』의 잊을 수 없는 마지막 문장은,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인 패배를 예감한 도박꾼의 텅 빈 초상일 것이다.
1)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07/sep/29/crime.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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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범죄소설』, 『문학소녀』 등을 썼고,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죽이는 책』 등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