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웹툰 <미지의 세계>로 신드롬을 일으킨 이자혜 작가가 20대의 파인다이닝 도전기와 사회 초년생 성장담을 담아낸 ‘미식’ 만화로 돌아왔다. 가난하고 평범한 20대 신입사원 ‘한밀알’이 회사에 갓 취직하여 생애 처음 생긴 수입으로 새로운 맛을 탐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만화는 음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어른’이 되어 와인부터 오마카세 스시야를 즐기는 과정까지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세계의 지평을 미식을 통해 넓혀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는 작가의 작품 중 이례적이게도 웹 연재 없이 단행본으로 처음 공개되는 만화인만큼 출간되자마자 팬들의 관심뿐만 아니라 여러 궁금증을 자아냈다.
주로 웹툰 정기 연재나 비정기 연재를 하시다가 단행본을 위한 장편 만화를 그린 것은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가 처음인데요, 작업을 끝낸 소감을 허심탄회하게 부탁드립니다.
몇 년 동안 혼자 작업하다가, 마감이 정해져 있고 다른 사람들이 엮인 일을 아주 오랜만에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그림에 솜씨가 부족하고 스타일이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행본 작업 기회를 통해 이번에는 최대한 그림을 깔끔하게 그리는 데 공들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에, 처음엔 깔끔하되 단순하고 가볍게 그릴 생각이었는데, 힘 조절에 실패해서 작업량이 많아져 힘들었습니다. 이전에는 매번 짧은 분량의 작업물을 완성하자마자 발표했기 때문에 12화 분량을 혼자 침묵 속에서 만들고 있는 것도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책으로 나온 모습을 보니 만족스럽습니다.
주인공 '한밀알' 외에도 다른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입니다. 혹시 '한밀알'의 직장 동료인 국제물류 2팀 사람들의 이야기도 따로 생각한 것이 있나요? 또, 밀알이 덕질하는 작중 작 『도봉 히스테리아』 또한 실제로 있다면 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워 보입니다. 그 작품의 스토리, 인물 구성 등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이 만화의 콘셉트를 짤 때부터 밀알의 회사 사람들을 나름대로 매력 있고 귀여운 인물들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어떤 호감 가는 캐릭터를 만들자고 생각하면 막연하고 힘든데, 나름 나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캐릭터는 어떤 성격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가끔은 어떤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들끼리는 어떠한 일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대충은 생각해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도 선보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도봉 히스테리아』 같이 미청년, 미소년들이 나오는 인기 만화·애니메이션을 잘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에 열광하고 있는 팬들의 덕질을 접할 때마다 매번 놀라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팬들은 항상 SNS에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와 작품의 내용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지와 함께 캐릭터 해석를 내놓는데, 막상 원본 작품들을 보면, 완성도와 흥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냥 뭐 괜찮고 볼만한데 딱히 그렇게 엄청나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는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항상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상 작품인 『도봉 히스테리아』도, 그 내용과 캐릭터의 짜임새가 얼마나 완성도가 있는지, 혹은 독창적인지는 거의 의미가 없고, ‘대충 이 정도 설정이면 요즘 애니메이션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척 피상적으로 지어냈습니다. 작품을 향한 밀알의 애정과 흥분이 독자들에게는 다소 뜬금없고 유머러스하게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전작의 캐릭터가 많이 나와서 재미있습니다. <라비니아>(2019)는 그렇다 치고, <미지의 세계>(2014) 인물들과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인가요?
『미지의 세계』와 세계관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배경이 비슷한 시대의 서울 주변이므로 나이대, 경제적 여건, 취향이 밀알과 비슷한 '미지'를 등장시켜 보았습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의 '미지'였다면 아마 밀알에게도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고 거리를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밀알이 가진 것들, 예컨대 나름 고통스럽지 않은 회사에 다니면서 회사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일상에서 가끔은 작은 사치를 한다는 점 등등이 말이죠.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에 등장하는 미지는 조금 나이를 먹고 스트레스와 분노가 완화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미지와 밀알이 같은 것을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결속력에 의해, 밀알의 거슬리는 면도 미지에게는 어느 정도 용납이 가능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의 후속편이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일 것 같은가요?
한 권짜리 단행본용으로 만들어졌지만, 후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짰습니다. 후속편의 결은 본작과 크게 벗어나지 않겠지만, 좀 더 다양한 음식과 상황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밀알이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 초년생의 에피소드들, 사람들을 사귀고 같이 노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대학생 때부터 살고 있던 원룸에서 나가게 되어 좀 더 나은 집을 구해보는 이야기라든가, 혹은 로맨스를 살짝 심화시켜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밀알이 남성들과 인간관계를 맺게 되면서 불안이나 안정을 느껴보고, 자신도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독립된 성인으로서의 자아를 확립하는 내용에, 상황에 맞는 식사의 에피소드를 곁들여서 말이죠.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 가장 마음에 들게 그려진 장면과 음식은 어떤 것인가요? 덧붙여 음식 만화를 그린 만화가로서, 재미있게 읽은 요리·음식 만화, 혹은 콘텐츠가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카레돈카츠의 에피소드 「세 끼. 여인의 향기」가 구성적으로 가장 마음에 듭니다. 음식을 먹는 장면도 음식 만화의 정석적인 느낌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음식 그림 중에서는 스시 오마카세의 스시 그림들이 깔끔하게 그려졌다고 생각하지만, 스시 종류의 나열이 대부분이고 오마카세의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인생 처음으로 경험한 사람의 느낌과 결합하여 연출적으로 잘 살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밖에는 각종 엑스트라를 그리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이상하고 독특한 패션과 외모의 캐릭터들을 아무렇게나 넣어놓고 과격한 대사의 말풍선을 그려 넣는 것이 좋습니다. 또, 조연으로 미청년들을 그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만화 중에서는, 이시야마 아즈사의 『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과 다른 번역되지 않은 작가의 책들)의 음식 그림이 무척 아름다워서 여러 번 보았습니다. 주인공이 집에서 작업하다가 야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 이외의 서사는 없으나 그림 자체로 환상적입니다. 쿠스미 마사유키와 미즈사와 에츠코의 『하나씨의 간단 요리』도 기승전결로서의 이야기는 그다지 없고 남편의 전근 때문에 혼자 사는 유부녀가 집에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들어 먹는 내용일 뿐인데, 사소한 소재들로 귀여운 에피소드를 전개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자연스러운 요리 장면을 설명 없이 고화질로 보여주는 채널이 좋습니다.
출간 후 인상 깊었던 독자의 반응이 있었나요? 또 궁금해하는 팬들을 위해, 단행본 발간 후 근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미지의 세계』만 기억하고 있던 독자라면,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와 같은 귀엽고 가증스러운 캐릭터들을 그린 것을 보고 놀라는 것 같습니다. 배신감을 느끼거나, ‘인기를 끌고 싶어서 영혼을 팔고 노력 좀 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등 말이죠. 반면, 제 기존 작품이나 서브컬쳐에 별 관심이 없는 상태로 무심코 이 책을 보게 된 사람들은, 귀여운 음식 만화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약간의 이상함과 껄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책과 게임을 할인할 때마다 많이 사놓고 정작 감상은 못하고 있습니다. 작업하는 틈틈이 해외 동물원과 생물 덕후들의 SNS를 팔로우하면서 다양한 동물과 곤충의 영상 및 사진을 자주 봅니다. 동물 중에서는 비버와 웜뱃을 가장 좋아합니다. 또, 주방용품과 식기류의 각종 브랜드 물건들이 얼마나 좋은지, 혹은 별로인지를 탐구하고 싶지만, 보관할 공간이 넓지 않아서 작은 물건만 가끔 사곤합니다.
후속권은 언제 나올 예정인가요? 또,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만화 장르가 있다면요?
후에도 이 만화를 작업하게 된다면, 연재처가 생겨 연재 분량을 모아 책으로 만드는 형식이 부담이 덜 할 것 같습니다. 연재를 한다고 해도 작업은 언제나 힘들다는 점에서는 조삼모사 같지만요. 다시 생각하니 이 퀄리티로 정기 연재를 한다면 그것도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연재의 텀이 길거나, 비정기 연재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현대인들의 사적이고 미시적인 관계를 다루는 장르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고, 개그를 잔뜩 넣은 로맨틱 코미디 같은 것이 작업하기 즐거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어떤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내가 일부러 지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제게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이용한, 장르로 구별하기는 애매한 이야기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드라마’ 장르 안에 있는 인디 영화 같은것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장르물이라고 할만한 것에 나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자혜 (글·그림) <미지의 세계〉(2014), 〈라비니아〉(2019)를 연재했다. 비정기적으로 만화를 그리고 있다. 음식에 대한 문장을 저장하는 것을 즐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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