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바닷가 도시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으레 수영을 잘하겠지 넘겨짚게 됩니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수영하길 좋아하긴 하지만, 수영을 제대로 할 줄 알게 된 것은 청소년기였어요. 좀 더 어이없기로는 바다에서가 아니라 당시에 처음 생겨난 실내 수영장에서였다는 사실이지만, 가장 어이없기로는 저 같은 바닷가 출신들이 지리적 이점을 누리기는커녕, 자라는 내내 줄곧 ‘물가에 가면 큰일난다’는 위협과 함께 물놀이하다가 빠져 죽은 사람들에 관한 괴담을 들어야 했던 일입니다.
그러니 바닷가에 가더라도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거나 파도가 잔잔할 때 잠깐 무릎 깊이까지 몸을 적셨다가 어른들 고함 소리에 황급히 달려나오기 일쑤였지요. 실제로 인명 사고가 나는 현장을 목격하곤 했으니, 이래저래 넘실대는 바다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바다가 그토록 위험하다면 생존 수영을 가르쳤어야지'라는 것은 당시 우리 사회의 교육 문화 수준을 떠올리면 금세 답이 나오는 의문이고요.
박희진이 처음으로 쓰고 그린 그림책 『물속에서』는 팬데믹이 가장 삼엄한 태세로 빗장을 지른 ‘수영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다리며 허리도 욱신욱신 쑤신다며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소파와 한몸이 된 할머니가 주인공인데, 어린 손녀가 찾아와 수영장에 가자고 졸라댑니다. 아마도 가까이 살지 싶은 이 손녀는 보호자가 필요했는지, 아니면 할머니와 함께 수영장에 가기로 한 엄마와의 약속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싫다고 도리질하던 할머니는 투덜투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손녀에게 끌려 수영장에 갑니다.
작가는 처음부터 ‘싫다’ 할머니를 곱다랗게 그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샤워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할머니는 축 늘어진 포대 자루 같고, 몸을 끼워 넣어야 할 수영복은 검정 비닐봉투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탱글탱글 자두 알 같은 손녀가 어느새 빨간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 모자까지 챙겨 쓴 채, 어서 물에 들어가자는데도 천근만근 꽁무니를 빼며 중얼거리지요. “싫다!”
그러나 할머니는 점점 물에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손녀처럼 풍덩 뛰어들지는 못하겠으되, 물끄러미 수영장을 들여다보니 물빛이 참 좋다 싶고, 많이 차갑겠지 망설이던 끝에 한 발 넣고 두 발 넣고 허리까지 쑥 넣고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겁니다. 마침내 쑥, 물속으로 미끄러진 할머니는 여태 축 늘어졌던 눈꼬리며 입꼬리가 올라간 채 팔다리를 펴고 싱긋 웃습니다. ‘가볍네! 몸이 가벼워지네.’
지구 행성 표면 71퍼센트를 덮고 있는 물 대부분이 바다이고 수영장은 미니어처 바다 중에서도 가장 작은 미니어처 격이지만, 여기서 최초의 생물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물은 다정한 모성 그 자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이 담담한 수채 그림책은 ‘할머니, 수영장 가요!’ 같은 그림책 특유의 아기자기한, 그래서 그림책 장르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거나 조손 관계 이야기로 오해될 수 있는 제목을 버리고 ‘물속에서’라고 담담한 표지판을 들어 보이고 있는 듯합니다.(모쪼록 이런 식의 그림책 제목이 많아지길!)
할머니는 물속에서, 물의 다정한 모성을 마음껏 유영하며 물살이가 그득한 생래의 바다를 숨 쉽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원기를 회복하지요.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어린이에게 여성 노인이 ‘싫다’고 외치는 모습에서 새삼 생존 수영을 터득한 당당한 존재성이 느껴집니다.
얼마 전 태백 지역 강연길에 도서관 옆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세워진 커다란 비닐 돔을 엿보고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깊고 깊은 산골에 비닐 풀을 설치해 어린이들에게 생존 수영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물 위에서 최소한의 체력으로 최대한 오래 머무는 생존 수영 학습 전후에 이 그림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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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h02
2022.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