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쓰는 밤'은 고수리 작가가 처음으로 이끌었던 글쓰기 수업이다. 매주 금요일, 둥글게 둘러 앉은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을 글로 쓰고 낭독했다. 자기가 쓴 글을 소리내 읽는 사람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고수리 작가는 그 에너지를 양분삼아 밤새워 또다른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명의 책 『마음 쓰는 밤』은 그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모두 잠든 새벽녘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마음, 그가 만난 글쓰는 사람들의 마음.
나에게 절실했던 마음 쓰는 밤
글 쓰고 싶어지는 책이었어요.
그게 전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문턱이 너무 높아서 오히려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책도 있잖아요. '글을 잘 쓰려면 지키고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나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요. 반면, 어떤 문장 하나에도 당장 글을 쓰고 싶어지는 책이 있죠. 『마음 쓰는 밤』은 후자였으면 해요. '이 작가처럼 쓰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글 '계속 쓰는 마음'의 첫 문장이 "첫 책을 쓰고 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였어요(웃음). 네 번째 책을 출간한 마음은 어때요?
아마 첫 책의 출간을 앞둔 작가들이라면 이런 상상 한번쯤 하셨을 거예요. '혹시 베스트셀러가 돼서 내가 너무 유명해지면 어떡하지?(웃음)' 특히, 저는 '제1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게 출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마치 인생의 변곡점처럼 느껴졌어요. 책을 내고 나면 내 인생에도 큰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쌍둥이를 임신했고, 그 후로 한동안은 원고 청탁도 거의 없었죠. 사실 제가 지금까지 작가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는데, 벌써 에세이스트로 산 지 8년째더라고요. 그동안 써온 글, 지금껏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모인 책이라 더 기쁘고 애틋해요.
고수리 작가가 글을 쓰는 마음과 그동안 글쓰기 수업으로 만난 학인들의 이야기가 담겼어요.
처음 이끌었던 글쓰기 수업의 이름이 '마음 쓰는 밤'이었거든요.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었어요. 글쓰기는 마음을 쓰는 일이고, 이 모임이 마음을 쓰는 자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당시 쌍둥이 육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그런 밤이 절실했죠. 그때를 생각하며 초심으로 돌아가서 썼어요. 내 감정을 뜨겁게 담아낸다는 느낌으로요.
프롤로그에서 '7살의 나, 글쓰기를 발견했다'고 했죠.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어린 시절,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 들어오는 깡시골에 살았는데요. 집에 있던 몇 권의 위인전을 계속 읽었던 기억이 나요. 마치 탄생설화처럼(웃음) 혼자서 책을 읽고 글씨를 깨우쳤다고 어른들이 종종 말씀하셨죠. 8살 때는 반 정원이 8명뿐인 분교에 다녔는데 백일장에 나갔다가 초등부 장원을 탔어요. 그때부터 '글쓰기는 재밌구나. 내가 글쓰기를 잘하나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말 그대로 글쓰기를 발견한 거죠.
솔직한 마음을 글로 쓰기 시작한 건 17살 때부터예요. 부모님이 헤어졌을 무렵, 우연히 어느 백일장에 참가하게 됐는데, 자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써보라기에 마음을 내려 두고 솔직한 마음을 썼거든요. 그 글이 당선돼 사람들 앞에서 낭독을 해야 했어요. 저절로 목이 메이고,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글을 읽는 동안 사람들이 정말 귀기울여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더라고요. 그 찰나의 경험이 정말 강렬했어요. 그래서 글쓰기 수업에도 꼭 낭독하는 시간을 가져요.
엄마 작가가 글쓰는 법
육아를 하게 되면서 밤에 글을 쓰던 습관을 아침으로 바꿨다고요. 아침 리추얼이 궁금해요.
새벽 5시 30분~6시쯤 일어나서 책을 읽어요. 읽다보면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어떤 문장에서 글감을 발견하거나, 같은 감정을 느낄 때 주로 그렇죠. 그럼 짧은 글을 빠르게 써요. 특히, 코로나19가 한참 심했을 때 매일 아침 글을 썼어요. 그렇게 6개월이 지나니 원고지 700매 가량의 글이 모이더라고요. 조금씩이라도 매일 쓰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첫 책을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되었죠. 육아를 하면서도 간절히 글쓰기에 매달린 건 '선명하게 나로 살고 싶어서(31쪽)'였다고 했어요.
집에서 가장 작은 존재는 아이들이 아니라 엄마예요. 아이라는 약한 존재를 돌보기 위해 엄마는 존재감을 지워야 하잖아요. 내가 사라져야 누군가를 돌볼 수 있고, 희생할 수 있으니까요. 그 생활 속에서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책 읽고 글쓰며 나를 만날 때뿐이었던 것 같아요. 이 책에서는 그걸 '행방불명의 시간'이라고 표현했죠.
사실 임신했을 때는 제가 앞으로 아이들 이야기밖에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니 오히려 내가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내가 어떤 걸 좋아했지? 나는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지?'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러면서 정체성을 더 선명하게 만들 수 있었어요. 육아를 하면서 글을 쓰는 건 나를 빚어가는 과정이었어요.
글쓰는 엄마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도 그 이유에서 비롯된 마음인가요?
엄마들은 작은 상실을 매일 경험한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어릴 때는 '사랑'을 눈앞에서 생생히 보고 있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자라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엄마의 품을 떠나가죠. 아이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때 엄마들이 너무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엄마가 자기 이름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요. 당장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큰 성취를 이루거나, 가시적인 결과가 눈에 보이는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 기간을 인생에서 잠깐 멈추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며 글을 쓰시면 좋겠어요. 글쓰는 엄마들이 많다는 건,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가진 작가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육아 초기, 엄마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두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엄마인 작가가 많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거든요.
두렵고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앞서 걸어간 여성 예술가들의 책을 찾아 읽으신다고요. 그들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이 있나요?
굉장히 성실하고 부지런해요. 품이 넓고요. 또 절박하게 썼다는 게 느껴지죠. 사실 글쓰기가 그래요. 간절하지 않으면 안 쓰게 되거든요. 글쓰기 수업에서도 호기심으로 글쓰기를 배우러 찾아오신 분들은 2~3회차가 지나면 거의 안 오세요. 반면, 간절하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내 언어를 찾아 글을 쓰죠. 결국 글을 계속 쓰고, 안 쓰고를 결정하는 건 간절함의 농도인 것 같아요.
엄마가 되고 일어난 글의 변화도 있을 거예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일단 너그러워졌죠. 누구도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아주 무례한 어른들을 만날 때도 '저 사람 또한 누군가를 길러낸 사람이겠지'라고 생각하면 그 마음을 조금 헤아리게 되는 것 같아요.
반대로 화를 내야할 순간에는 제대로 화를 내게 됐어요. 엄마가 되면 생명 감수성에 민감해지잖아요. 자라나는 것, 살아있는 것을 함부로 대하는 사건이나 사람들을 볼 때 저절로 행동하게 되는 편이에요. 또, '돌보는 존재'에 대해 쓸 수 있게 됐죠. 돌보는 존재는 눈에 띄지 않아요. 돌보는 대상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들여다보려고 해야 보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게 글에도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 같아요.
육아와 가사의 부담에서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해방된 '행방불명의 하루'가 주어진다면 뭘 하고 싶으세요?
누워서 책 읽고 싶어요(웃음). 만약, 그 기간이 일주일정도 주어진다면 바닷가가 보이는 숙소에 묵으며 몰입해서 작품 하나 완성하고 싶어요. 사실 소설을 너무 쓰고 싶은데, 지금은 몰입할 여력이 없어서 잘 안 되더라고요.
글쓰기 수업은 연극 같아요
글쓰기 수업을 하는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운다'는 거죠.
정말 그래요.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인생들을 겪을 수 있거든요. 특히, 글쓰기 수업에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거든요. 학인들이 쓴 글 덕분에 내가 그 사람의 인생에 깊숙이 들어가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글쓰기 수업을 하다 보면 연극 무대에 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다른 사람의 삶을 진심으로 헤아려보기 되는 동시에, 낭독하는 학인의 모습이 무대 위 배우의 독백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수업을 할수록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진다는 걸 느끼죠.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학인에게는 뭐라고 대답하세요?
마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요. 글쓰기는 시간이 있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단련하는 거예요. '한 달에 한 편 쓰기, 일주일에 한 편 쓰기'처럼 자체적으로라도 마감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죠. 짧게는 타이머 30분이라도 맞춰놓고 글을 써보는 거예요. 마감을 지켰을 땐 쇼핑을 하거나,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등 나를 위한 보상을 하고요. 글이 쓰고 싶도록 루틴을 만드는 것도 추천해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글을 쓰는 것처럼요. 이때 분량을 지키는 게 정말 중요해요. 보통 2천자에 맞춰서 글을 쓰라고 말씀드리는데요. 2천자가 길게 느껴진다면 적어도 A4용지 한 장에 맞춘 글 정도는 써봐야 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분량에 맞게 쓰는 것도 글을 잘 쓰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거든요.
글쓰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체력이요. 자아 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에서 온라인 리추얼을 하며 만난 학인이 있어요. 이 책에 '75세 정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분이죠. 매일 인문학 수업을 듣고 책 읽고 글쓰며 홀로 사시는 분이었는데 지금껏 두 권의 책을 썼다고 하셨어요. 한 권은 기부에 관한 책이고, 나머지 한 권은 자기 인생에 관한 책이라고요. 그러면서 "앞으로 남은 5년간 내 인생의 마지막 책을 짓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체력을 관리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는 마냥 밝은 마음으로 "글 쓰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해왔는데, 정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그건 치열한 삶의 문제더라고요. 저도 그때까지 글을 쓰려면 체력을 관리하고, 평범한 일상을 더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였어요.
저에게 사랑은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였어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인간의 사랑이 먼저 떠올랐고요. 그래서 두 번째 책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를 출간할 때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어요. '내가 사랑을 말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은 완전히 사랑 전파자가 되었죠.(웃음)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알게 된 감정이에요. 엄마에게 받은 사랑, 아이들에게 받은 사랑, 독자에게 받은 사랑 같은 것들을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됐어요. 결국, 사랑은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확실히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프롤로그에서 '이 책에도 귀소본능이 있어서 어울리는 독자를 잘 찾아가길 바란다'고 했죠. 이 책과 잘 어울리는 독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글쓰기 수업에서 '살아갈 이유'에 대해 자주 묻는데요. 가장 가슴 아픈 대답은 '책임'이었어요. 책임져야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이 있는데, 그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때 지는 책임은 무거운 과제 같지만, 내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걸 인식한 뒤의 책임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힘'이 되어요.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발견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적절히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고수리 쓰고 돌보는 사람. KBS <인간극장> 취재 작가를 거쳐 휴먼다큐와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모두 사람의 이야기라서 좋았다. 글을 쓰며 보통의 삶에도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배웠다.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고등어 :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를 지었다. 어느덧 11년 차 작가, 책을 짓듯 삶도 부지런히 짓는다. 여섯 살 쌍둥이 형제를 키우는 엄마 작가로 날마다 육아하고, 살림하고, 읽고, 쓰고, 가르치는 생활을 규칙적으로 한다. 지난 5년간 창비학당, 세종사이버대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글쓰기 안내자로 활동하며 1,000여 명의 학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도왔다. 사람을 돌볼수록 나를 돌아보며 마음을 쓰게 되었다. 글쓰기는 나를 지키며 삶을 돌보는 일이라 믿는다. 결국에는 사람을 안아주는 글을 쓰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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