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의 연이은 솔로 분화다. 다년간 갈고 닦은 뮤지션으로서의 역량을 이번 EP에 아낌없이 담아낸 슬기가 홀로서기를 향한 밑거름을 뿌린다. 콘셉트 소화력, 보컬 연주력, 뉘앙스 표현력, 비주얼 등 K팝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고르게 가지고 있는 그인 만큼, 음반의 종합적인 매력이 충분하다. 하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며, 안전함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얼마간의 보수적인 색채도 느껴진다.
앨범 전반적으로 레드벨벳의 몇몇 곡에서 들려준 깊은 그루브의 사운드가 흐른다. 사랑이 불러온 어두운 면을 다룬다는 점에선 'Peek-a-boo'가 떠오르지만, 팀 전체의 앙상블을 신경 써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28 Reasons>는 한발 더 나아가 슬기의 매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과거의 팝 현장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의 비트에 슬기의 기민한 보컬을 얹어 세련미를 더했다. 1990년대의 스타 알리야를 K팝적으로 재해석한 모양새다.
가장 'SMP'다운 음악을 만드는 프로듀서 유영진이 참여한 타이틀 '28 Reasons'는 슬기를 어떤 특정한 사운드를 위한 배우로 고용한다. 할 줄 아는 것이 매우 많고, 또 그걸 전부 잘하는 슬기는 자신의 역할을 거뜬히 해내며, 음악의 매무새를 괜찮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그러나 괜찮은 퀄리티만으로는 첫 솔로 앨범의 타이틀로 충분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슬기로 마침표를 찍은 곡이지만 슬기로부터 시작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타이틀보다 수록곡들의 신선한 시도가 더 귀에 들어온다. 슬기가 직접 가사를 쓴 트랙 'Dead man runnin''은 과감한 드랍 편곡을 이용해 묵직한 금속성의 사운드를 맘껏 드러내며 무게감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부드러운 멜로딕 래핑이 도드라지는 아티스트 비오와 함께한 'Bad boy, sad girl'도 귀에 들어온다. 6곡만 수록된 EP지만 일관된 템포로 끌고 가지 않고, 정규 앨범에서나 볼 수 있는 음악적 다양성으로 지루함을 막는다.
아직 예술성을 발산하며 이렇다 할 메시지를 음악에 담아내는 것까진 닿지 못했으나 훌륭한 연주력과 콘셉트 소화력이 이 아티스트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기대하게 한다. 레드벨벳의 음악을 들었다면 누구나 알 만한 그의 실력은 양날의 검이다. 그들의 오랜 활동이 솔로 앨범에서 보여준 슬기의 역량을 얼마간 당연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신선함을 수반하는 사운드가 몇몇 수록곡에서 흐른다. 풀어야 할 숙제와 힌트가 한 앨범에 담겨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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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