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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왜 사장님들은 등산을 좋아하는 걸까요? 그것도 꼭 직원들 다 끌고 가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 사장님도 정초부터 등산하재요ㅠㅠ”
모처럼 휴일을 맞아 전기장판 뜨겁게 올려놓고 감자칩 씹으며 ‘미드(미국드라마)’나 폭풍질주하겠다고 계획했던 그녀의 꿈은 산 좋아하는 사장님 때문에 박살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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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직원과 산에 같이 가자는
홍익사장의 정신
나이 들면 산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야 거의 자연법칙에 가까운 보편적 현상이다. 인간관계에 지치고 은근히 건강관리가 신경 쓰일 때 말 없는 산을 말없이 오르는 것은 정신건강, 몸 건강에 아주 그만이다. 게다가 주름이 늘어나면서 감성도 세밀해져서 젊어서 본 꽃이 지금은 예사롭지 않고 청춘 때 무덤덤했던 나무도 이제는 자꾸 좋아지고 있으니 땅에서 난 자 땅으로 돌아간다고 자연은 그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넉넉하며 편안한 느낌으로 실감 나게 다가오는 것이다.
더구나 매달 한 번씩 산통을 치르듯 월급 지급으로 골머리를 썩고 치통을 치르듯 몇몇 직원들로 인해 속을 썩으며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세 번은 희망을 갖고 일곱 번은 절망하는 사장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한 발 한 발 자기 힘으로 천천히 산을 오르며 쉬고 싶을 때 쉬고 가고 싶을 때 나아갈 수 있는 산. 평지에서처럼 응석부리는 이 하나 없어 좋은 이 산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정이 가는 대상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를 직원과 공유하려는 오지랖 넓은‘홍익사장의 정신’이다. 내가 몇 년 전 짧은 기러기 아빠 생활을 결정할 때 옆에서 그 결단을 한사코 말렸던 퇴직 여직원은 걱정이 한 바구니는 담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친구 회사 사장은 몇 년째 기러기 아빠인데 그 회사 직원들이 다 죽으려고 해요. 그 사장님이 퇴근 후에는 직원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주말이면 함께 영화를 보자고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직원들을 불러내는데 직원들이 다 모여서 고사를 지냈대요. 타국에 계신 사모님이 빨리 귀국하게 해달라고.”
그러면서 나에게도 직원들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기러기로의 변신을 그만두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러기가 되었고 그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 친구의 사장을 따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나는 직원들이 아니어도 혼자 놀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했고 같이 놀아줄 사람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복 터진 팔자를 대부분의 사장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젊어서 열심히 일했으니 취미를 가질 여력도 없었을 것이고 늙어가면서 친구도 떠나는 법이라 지금 있는 것은 회사, 직원 그리고 TV가 전부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찌할까? 사장을 쥐어패며 정신 차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몇 달 동안 빈방에 가둬둔 채 군만두만 먹이며 반성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산 좋아하는 사장의 마음을 헤아리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란 질문의 정답일 테다.
산 좋아하는 사람은
산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직원과 등산을 하고자 하는 사장의 요구가 거의 매주 표출된다고 하면 이건 위의 기러기 사장 경우처럼 처절하게 외로운 인간의 몸부림이니 좀 더 진지하고 심도 높은 대화의 자리가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등장한 출판사 사장처럼 어느 특정한 날에 직원과 등산을 함께하기를 원하는 경우라면, 글쎄. 이런 것을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아마도 그 사장은 새해를 시작하면서 등산을 통해 직원들과 좋은 공기를 마시고 덕담도 주고받으며 파이팅도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직원들과 정상을 함께 밟으며 우리 회사도 꼭 이렇게 정상에 서보자는 마음을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금은 힘들더라도 같이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면서 한 식구라는 가족의식도 가져보고 싶었을 것이다. 왜? 이유 없다. ‘파이팅’, ‘정상’, ‘가족’ 같은 단어는 사장 명함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예외 없이 무한애정을 갖는 키워드들이다.
게다가 이 땅의 장남들이 그러하듯 무언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의식’이라는 것에 일종의 강박증세를 가지고 있다. 종갓집에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일 년에도 몇 번씩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지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강박증의 좋은 예이다.
마찬가지로 주간회의, 월례회의 등 각종 회의를 꼭 챙겨야 하고 체육대회, 단합대회에 집착하는 사장의 마음도 이런 의식에의 강박증세와 닿아 있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이 신성하고 거룩한 시간은 사장에게 있어 의식에의 절정에 놓인 순간이다. 바로 등산이라는 의식 말이다.
이러하니 설령 미드를 못 보고 개 끌려 나오듯 나왔더라도, 그리하여 앞에 가는 사장의 궁둥이에 벼락이라도 꽂혔으면 하는 증오심이 등산 내내 솟구치더라도 이왕 간 산행에서는 철저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씩씩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예쁨 받으며 월급 받는 자의 마땅한 행동양식이다. 아주 발랄하고 힘 있게 워킹을 하며 등산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당신 사장의 마음속에는 건강한 젊은이를 향한 호박 같은 믿음 덩어리가 뭉근하게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면접자리에서나 사장과의 술자리에서 “자네, 등산 좋아하나?”라는 질문을 받거들랑 주저 없이 우렁차게 준비된 대답을 발사하라. “그렇습니다. 제 부친은 심마니셨고 조부는 땅군이었습니다!”
희한하게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동질감과 신뢰를 갖게 된다는 사실, 당신의 처세목록에 밑줄 한 줄 그어도 좋을 팩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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