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 심화 (2)
이렇게 메모로 축적된 기록이 독자를 심화 단계에서 마니아 단계로 밀어 올린다. ‘미스터리 마니아’란 독자로서의 자기 역사가 없이는 탄생하지 않는다.
글ㆍ사진 권일영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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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심화 단계에 들어서며 메모를 권했다. 미스터리를 꼼꼼하게 읽기 위해서는, 그리고 작가의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독자에게 메모만큼 소중한 무기가 없다. 메모가 본격추리에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일본 미스터리는 전체적으로 플롯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일본추리작가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설문 조사에 응한 작가 가운데 9퍼센트만 플롯을 짜지 않고 흐름만 따라 써내려가는 반면, 나머지 91퍼센트의 작가는 모두 작품에 착수하기 전에 플롯을 짠다고 한다.


일본추리작가협회가 엮은 『미스터리 쓰는 법』에 소개된 미야베 미유키와 또 한 작가의 플롯 구축법을 도표로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야베 미유키는 『마술은 속삭인다』라는 작품을 예로 든다. 원 안의 숫자는 작가의 작업 순서이고, 괄호 안의 숫자는 작품 내용의 순서다.

 

[미야베 미유키의 플롯 구축]

 

① 소년 캐릭터를 설정한다.

 

사건 해결을 위해 ‘자물쇠 열기’라는 특기를 이용하는 소년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3)

 

②마지막 장면을 결정한다.


주인공 소년이 낯선 여자로부터 ‘어디로 가니?’라는 질문을 받고 ‘집에 갈 거야’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23)

 

③ 소년의 아버지와 그를 죽인 사람 이야기를 만든다.

(20) (22)

 

④ 다음에는 글을 쓰면서 여러 요소를 조합해 살을 붙인다.

 

(2) (14) (21) (4) (11) (16)
(15) (7) (1) (17) (12) (10) (18)
(13) (9) (6) (8) (5) (19)

 

 

미스터리로는 단순한 흐름을 보이는 미야베 미유키도 이런 식으로 플롯을 짠 뒤에 쓰기 시작한다. 같은 책에 실린 다른 작가의 플롯 구축 과정과 결과는 훨씬 복잡하다.

 

 

[다른 작가의 플롯 구축]

 

① 중심이 될 이야기를 만든다.
(1) (6) (11) (16)

 

②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23)

 

③ 위의 두 이야기를 연결할 이야기를 만든다.
(3) (10) (13) (20) (22)

 

④ 트릭을 위한 이야기를 만든다.

(9) (14) (19) (21)

 

⑤ 이야기에 살을 붙이기 위한 요소를 넣는다.
(2) (4) (5) (7) (8) (12) (15) (17) (18)

 


위 표에서 보이는 괄호 안 숫자를 카드라고 한다면 독자는 작가가 뒤섞어놓은 카드를 한 장씩 뒤집으며 카드와 카드 사이에 숨은 힌트와 복선을 통해 숨은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 말하자면 미스터리는 작가가 힌트와 복선을 매개로 독자와 벌이는 ‘밀당’이다. 수수께끼, 논리적 전개, 의외의 결말을 기본적으로 지녀야 하는 소설의 운명이기도 하다.

 

심화 단계로 접어든 미스터리 독자들은 더 복잡한 플롯을 지닌 작품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시마다 소지의『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는 흔히 ‘본격추리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융합’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독서 메모를 남기지 않으면 꼼꼼한 독후감이나 서평을 쓰기 쉽지 않다. 사회파 미스터리로써의 스토리라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까지 파악하지 않으면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심화 단계에 들어선 독자들이 찾는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시리즈물이라는 점이다.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가 해결하는 다양한 사건들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준고전 반열에 오른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같은 경우에는 노트를 따로 마련하여 메모를 남기고 정리해도 좋다. 요즘 작품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나 ‘갈릴레오 시리즈’,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으로 시작되는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시리즈’, 아즈마 나오미의 『탐정은 바에 있다』를 비롯한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혼다 데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도 메모를 남기면 시리즈의 전개 및 발전 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아직 국내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신작 『블루 머더』를 보면 히메카와 레이코는 경시청에서 이케부쿠로경찰서 형사과로 자리를 옮겼다.


시리즈물은 순서와 관계없이 어느 한 권만 읽었을 때와, 순서에 따라 읽었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또 시리즈 다음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시리즈 새 작품을 읽기 전에 이전 작품에 대한 메모를 훑어보고 신간 독서에 들어가면 이전 작품과 신작을 연결하기 편하다. 시리즈물 독서 메모에는 주인공의 역사, 작품의 역사, 그리고 작가의 역사까지 기록으로 쌓인다.

 

기발한발상하늘을움직이다.jpg  부호형사.jpg  손가락없는환상곡.jpg

 

취향이 영향을 미치겠지만 메모를 통해 더 큰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묘한 작품들도 있다. 예를 들면 쓰쓰이 야스타카의부호형사』가 그렇다. 텔레비전 드라마 때문인지 ‘돈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만 지나치게 부각되어 독자들도 그런 면에 더 눈이 가는 듯하다. 하지만 작품 속 네 가지 사건 모두 메모를 남기며 꼼꼼하게 읽다 보면 입문자들이 느끼는 재미 이상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작품을 읽더라도 입문 상태의 독자보다 심화 단계의 독자가, 심화 단계의 독자보다 마니아가 더 많은 재미를 발견해야 당연한 노릇이다.


메모는 스토리 요약이나 트릭 분석 기록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슈만의 손가락』이 원래 제목인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손가락 없는 환상곡』 같은 작품은 그 안에서 소개되는 음악을 들으며 그 감상을 함께 적을 수도 있다. 나중에 듣기 위해서라도 곡목을 적어두면 편하다. 내 『슈만의 손가락』 메모에는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그 제자의 관계는 물론 슈만의 결혼과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았던 병, 그의 최후에 관한 메모가 함께 남아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 여러 조사 결과들이 함께 적혀 있는 것이다. 물론 클라라가 작곡한 피아노곡들 목록과 함께.


비슷한 예로 카메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포 유이치의『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에서 메모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 우치다 야스오의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같은 작품으로는 주인공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 스케줄을 잡을 수도 있다. 수수께끼 풀이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는 하드보일드라도 메모는 유용하게 사용된다.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를 읽으며 그가 던지는 마음에 드는 대사를 모아 수집하는 것도 심화 단계에서는 해볼 만한 정리다. 마치 필립 말로우의 ‘명언록’이 책자로 나와 있듯이.


책을 읽으며 메모하는 습관은 일찍 들이는 편이 좋다. 숙제 때문에 쓰는 단순한 독후감이 아니라 텍스트를 차근차근 읽고, 자기가 느낀 바를 자유롭게 적어 남기도록 한다. 미스터리에 관심을 보이는 어린이를 심화 단계로 이끌 만한 탐정소설 시리즈들이 여러 종 나와 있다. 일본 소설 번역판만 이야기하자면 우선 ‘미스터리 랜드 시리즈’를 추천한다. 유명 미스터리 작가들이 어린이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소설들이다. 조금 더 어린 독자를 위해서는 ‘괴짜 탐정의 사건 노트 시리즈’도 살펴볼 만하다.

 

요즘은 스마트폰은 물론 태블릿처럼 메모에 편리한 장비들이 많다. 에버노트를 비롯한 무료 클라우드 서비스 정도만 이용해도 독서 기록용 별도 계정을 마련하면 걱정 없이 쓸 수 있다. 일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할 수도 있고, 전자책이라면 더욱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로 메모를 넘기는 것은 최종 단계로 넘기고, 평소에는 아날로그적인 메모가 오히려 편리할 수 있다. 미스터리는 작품 초반에 파악하는 사실과 종반에 알게 되는 진실 사이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추리를 수정한 흔적도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또 디지털 메모에서는 남길 수 없는 육필을 통한 감정, 느낌이 아날로그 메모에서 간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메모로 축적된 기록이 독자를 심화 단계에서 마니아 단계로 밀어 올린다. ‘미스터리 마니아’란 독자로서의 자기 역사가 없이는 탄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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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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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ru

2014.10.30

심화(2)가 올라온 지 두달이나 지났는데 다음 편이 도통 올라오지 않네요. 기대하며 종종 들어와보는데 올 때마다 실망이,,,ㅠ_ㅠ 다음 편도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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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ru

2014.09.16

심화(2)로 오니 비교적 익숙하지 않은 작가들이 보이네요. 가이도 다케루는 제가 읽다 읽다 포기한 작가였죠,, 아직 이 작가의 책은 단 한 권도 완독하지 못했다는 비극이,,ㅠ_ㅠ 상성이 맞지 않는 작가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다른 분야가 결합된 장르소설이 눈에 많이 띄더군요. 이노우에 유메히토의 [러버 소울]이 문득 생각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혹은 책을 읽는 도중이라도- 책 속에 나온 노래를 찾아서 듣게 되죠. 참고로 이 책에서 가장 놀란 것은 러버가 "RUBBER"였다는 것,,,,(응??ㅡ_ㅡ;;)
여기서는 [손가락 없는 환상곡]이 가장 읽어보고 싶네요. 그보다! 칼럼 다음 편은 언제쯤 올라올까요? 여기서 뚝! 끊기니 몹시 아쉽네요. 연달아 읽고 싶은데,,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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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4.09.12

한국 픽션이 이제는 일본 작가의 플롯전개를 배워야 할것 같네요. 요즘은 일반 블로거들이 글을 더잘쓰기도 하죠 웹툰도 다양하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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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영

전업 번역자. 중앙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일본미스터리즐기기’ 카페 운영자이며 아직 창작은 하지 않지만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기리노 나쓰오의 《다크》, 《IN》,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과 존 딕슨 카의 《셜록 홈즈의 미공개 사건》을 비롯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오리하라 이치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니와 몬스터》을 비롯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와다 료의 《노보우의 성》, 《바람의 왼팔》을 비롯한 시대·역사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