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한 소설가 배이유의 첫 소설집 『퍼즐 위의 새』에는 새 이미지가 가득하다. 새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듯, 새는 구속을 벗어난 자유와 현실을 벗어난 이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새 이미지가 보여주는 알레고리를 통해, 작가는 일상의 탈주를 꿈꾸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작가는 일상이 비루함을, 현실에서는 우리 자신을 괴물로 만들고 있음을, 상투적인 악몽 같은 세상을 고발하고자 함일까? 이 질문을 풀기 위해 작가를 만나 보았다.
2011년에 <한국소설>을 통해 등단한 후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시다가 드디어 첫 소설집을 냈습니다. 첫 책이니만큼 모든 독자가 첫 독자일 텐데요. 작가 소개를 좀 거창하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수히 실패한 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저 자신에 대해 거창하게 소개할 만한 특별한 이력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한 건 맞지만, 작가는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천부의 권리로서 부여받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저는 작가가 될 거라는 꿈을 감히 꾸지 못했습니다. 또 어린 제 눈에는 뭔가 불운의 냄새를 풍기는 작가가 썩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차라리 세계 일주를 꿈꾸는 여행자가 되고 싶었지요.
걸작을 남긴 작가들의 생애를 보더라도 다 비범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천재라거나, 아니면 사생아라거나, 신경질적인 질병을 갖고 있거나, 자폐적이거나, 몹시 불우한 일생을 살거나, 부유한 엘리트 가문이거나. 그래도 문학에 대한 선망은 늘 있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전공인 교육학보다 다른 데 한눈을 많이 팔았습니다. 연극 극단에 들어가서 배우도 꿈꾸고, 연출도, 희곡 쓰기도 꿈꿨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냈지요. 협업이 아름답기는 했지만 힘에 부쳤어요. 공동 작업을 견디기엔 내 자아가 너무 강하든지, 아니면 멘탈이 약하든지. 그러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 목말라 하게 되었고, 연극을 완전히 접었지요. 그러고도 한참 방황했어요. 호수의 물안개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소설을 쓰자’, ‘소설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어요.
에움길로 돌다 뒤늦게 거울을 마주 보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늦게 출발했지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문자를 가지고 유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지금이 좋습니다.
『퍼즐 위의 새』를 들여다보니, 그림들이 특이하게 모두 새 그림이군요. 작가께서 갖고 계신 원초적 이미지 같은 게 연상되네요. 혹시 자유나 이상에 관한 소설입니까? 혹은 끈질긴 희망에 관한 소설인가요?
비록 책에 새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새를 알레고리적 기법으로 사용한 건 아닙니다. 새에 대한 상징이나 이미지는 자칫 진부하지요. 자유니 비상이니 이런 기존 이미지들이 오히려 이 책을 하나의 규정된 틀에 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책이란 각 독자에게 선입견 없이 자기식대로 자유롭게 읽힐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전혀 알레고리 기법이 아닙니다. 배경이나, 소도구, 장면 전환 등, 실내의 도배지 무늬처럼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단지 오렌지나 별 무늬가 아니라 새가 선택됐을 뿐이죠. 왜 하필 ‘새’였냐고 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글 쓰면서 그냥 호흡처럼 딸려 나왔다고 하면 가장 근접한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옛 동화 속에서 저주받은 소녀가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두꺼비나 뱀이 줄줄이 튀어나왔듯이, 제 입에서는 새가 튀어나왔지요.
작가님의 작품들은 모두 단편들인데, 작품들을 주로 어떠한 주제나 소재로 그리시는지 간단히 묶음별로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설프게 언급되면 오히려 작품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소개하는 게 망설여집니다. 일관된 주제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세계가 나옵니다. 굳이 묶자면 공통된 하나의 공간으로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조리한 폐쇄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벌이는 고투를 주로 씁니다.
「압정 위의 패랭이꽃」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모델로 했습니다. TV에서 방영하는 뉴스나 다큐를 보면서 체르노빌에 이어 핵발전소의 위험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해운대 바로 옆에서 돌이킬 수 없는 원전사고가 일어난다면……. 그런 끔찍한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문단 구성을 퍼즐 조각처럼 잘게 나누어 과감한 형식을 시도한 「퍼즐 위의 잠」, 어머니와 아들의 어긋난 관계를 연극적으로 풀어낸 실험적인 「그린그레이」, 책과 죽은 연인의, 죽어도 죽지 않은, 살아남은 이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Sasa’의 함수를 이미지로 풀어본 「너라는 책」 등도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특이한 시도가 있더군요. 「창궐」이란 작품이 거의 같은데, 결말만 달리해서 「창궐2」로 수록되어 있지요? 의도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또, <작가의 말>도 보통 읽어보는, 접하게 되는 그런 게 아니고, 무척 진솔하게 쓰셨더군요. <작품을 읽는 레시피>도 있고요. 이런 아이디어들은 문학에 대해 진지함을 갖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파격으로 느껴질 것 같아요.
그게 그렇게 파격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의 말까지 무겁게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또 책은 꼭 책방, 닫힌 공간, 고정된 장소에서만 팔아야 할까, 하는 의문도 있었고, 생동감 있게 만나고 싶다는 소망도 더해졌고요.
원래 「창궐」은 「창궐2」의 결말로 끝맺은 40매짜리의 짧은 소설이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90매 정도의 단편으로 개작하면서 결론도 자연스럽게 바뀌어 지금의 「창궐」이 되었지요. 「창궐」로 발표되었지만 「창궐2」의 결말도 나쁘지 않다 생각되어 같이 실었습니다. 언어의 교감,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의 결말도 흥미 있을 거 같아서요. 어떤 결말에 더 공감을 하게 될지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 다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혹은 소설 쓰기를 마칠 때마다 반드시 독자에게 이런 것을 들려주어야겠다는 메시지 같은 게 있으신가요?
반드시 들려주어야겠다는 메시지라기보다, 어떤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오면 그걸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경과 인물과 이름이 들어와요. 어떤 문장, 혹은 공간에서 발화되기도 하고요. 메시지는 부차적 요소입니다. 이것이 메시지다, 라고 강하게, 단순하게 드러나는 걸 꺼리는 쪽입니다.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화와도 다른 낯선 세계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입구도 여러 개, 출구도 여러 개인 주름으로 풍성한 미로 같은 풍경을 독자 앞에 내보이고 싶어요.
학생으로 치면 만학도이시죠?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하셨습니다. 가뜩이나 한국 소설계가 최근에 침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군요. 후학 아니면 후배에게도 용기를 주는 말씀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누구한테 용기를 줄 수 있는 입장은 못 되고요, 첫걸음을 내딛는 마당에 오히려 제가 용기를 수혈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의 가치판단에 휘둘리지 말고, 그 누구보다도 자기 안의 목소리를 잘 들어주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비록 남들이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고, 하찮은 것같이 보일지라도, 지켜내고 싶다면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 세상에 지켜내야 할 무엇이 그다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등단제도 너머를 보라고 말을 하고 싶어요. 우리 문학계가 어딘가에 등단해야만 공식적으로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소설가라는 자격증이 주어지긴 하지만, 좀 더 과감하게 입시제도 같은 틀을 벗어나서 다른 방식을 찾아보라고 말하겠습니다. 꼭 유명 출판사가 아니더라도, 지향점이 다른 다양한 출판사들이 있으니까요. 쉽게 문이 열리지는 않겠지만, 준비하면서 계속 두드려 가며 기다려야죠.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기만의 언어를 탐색하면서. 단편 쓰기에만 매몰되지 말고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보고 글을 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문하면서.
앞으로 문학판의 흐름도 변화가 오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이 첫 번째입니다. 앞으로 얼마만큼 더 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소재로 소설을 쓰실 계획인가요?
적어도 80세까지는 쓰고 싶어요. 그만큼 생이 허락된다면. 머리 허연 할머니가 스타벅스의 창가에 앉아 손가락으로 노트북을 천천히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되네요. 그때는 노트북이 아닌 다른 무엇이겠죠? 손가락 대신 홍채로 문장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갑자기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작업하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지네요. 유난히 홍채가 반짝이는 사람들은 다 작가인 거죠.
근원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쓰고 싶어요. 정말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란 존재거든요. 글을 쓰는 지극히 이성적이면서 성찰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상하기도 싫은 잔인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동물이면서 동물보다 못한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그 가늠할 수 없는 편차와 부조리에 대해,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는 문명과 인간에 대해. 인간은 이해 불가한 하나의 우주죠. 그 안에 얼마나 광대하고 오묘한 세계가 있겠어요.
현재 쓰고 있는 작품은 틀림없이 카프카의 『성』에서 연유한 것일 텐데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성을 지키는 파수꾼에 대한 얘기입니다. 언제 그의 임무가 끝날지 알 수 없는, 어떤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홀로 지켜야만 하는 불가항력의 본연적 임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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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위의 새배이유 저 | 알렙
유년 시절부터의 책에 대한 탐닉이 제대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빙빙 떠돌다 인생의 중반에 소설 쓰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2011년 [한국소설]에 등단해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지면에 소설을 발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거듭된 낙선으로 각종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한 등단심사 제도에 강하게 회의를 품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기존 제도에 화려하게 편입되고 싶은 인정 욕구에 부대꼈다. 문학 자체의 논거보다 치열한 경쟁에서 선택될 수 있는 여러 비기들과 심사의 불공정성이 소문으로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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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