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것>의 한 장면
<그것>에 관한 호평이 넘쳐난다. ‘춤추는 피에로’ 페니와이즈(빌 스카스가드)를 두고 공포물의 역대급 캐릭터라는 찬사가 있고 1985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가 <이티>(1982) <구니스>(1985) <스탠 바이 미>(1986) 등 1980년대의 청소년 모험물의 향수를 되살렸다는 평가도 있다. 원작자인 스티븐 킹도 ‘천재적인 작품’이라며 극찬을 보냈다. 나 또한, 이들의 호의적인 평가에 동의하는데 좀 다른 지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소설은 주인공들이 성인이 된 1985년과 소년소녀 시절이었던 1958년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펼쳐간다. 그와 다르게 2부작으로 구성된 영화는 첫 번째 챕터 <그것>에서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우되 배경은 1989년으로 가져간다. 원작에서 아이들이 활약했던 시절을 31년이나 훌쩍 건너뛰었다. 나는 이와 같은 설정이 1986년에 출간된 소설을 무려 31년 만에, 게다가 한 차례 동명의 TV 시리즈(1990)로도 만들어졌던 이 프로젝트를 2017년에 리메이크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시간 배경만 변화했을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시골 마을 데리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종과 살인이 빈번하다. 13살 소년 빌(제이든 리버허)도 비가 오는 날 동생을 잃었다. 부모님과 다르게 동생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는 빌은 친구들과 모임을 결성하고 수색에 나선다. 이 모임의 이름은 ‘루저 클럽’이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힘이 센 동년배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약골’이다. 무엇보다 빌과 아이들에게 풍선을 들고 괴기한 분장을 한 피에로가 눈에 보인다. 27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그것’이 마을에 공포를 몰고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루저 클럽은 당당히 맞서기로 한다.
영화 <그것>이 배경으로 삼은 1989년에는 미국에서 <리쎌 웨폰 2> <배트맨> <나이트 메어 5-꿈꾸는 아이들>이 개봉해 인기를 끌었다. 굳이 이 작품들을 특정해 언급한 이유가 있다. <그것>에서 아이들이 데리 거리를 지나칠 때 극장 간판으로 노출되는 것이 하나요, 이 영화들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가면 도달하는 주제가 있어서다.
<리쎌 웨폰 2>와 <배트맨>은 소위 ‘하드 바디 hard body’로 요약되는 강한 남자가 등장한 당대의 영화와는 다르게 묘한 균열 지점이 발견된다. <리쎌 웨폰 2>의 마틴 릭스(멜 깁슨)는 하드 바디의 계보를 따르지만, 그와 짝을 이루는 로저 머터프(대니 글로버)는 흑인이라는 점에서 백인 홀로 활약하는 <람보>나 <코만도> 등과는 다른 정서가 있다. <배트맨>은 또 어떤가. 그전까지 ‘슈퍼맨’으로 대표되는 슈퍼히어로는 그야말로 미국 영웅의 초상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말끔한 얼굴을 하고 미국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했다면 가면으로 얼굴을 온통 가린 <배트맨>은 임무가 없을 때면 집 지하에 처박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반(反)영웅이었다.
영화 <그것>의 한 장면
이들 작품이 1989년에 등장한 배경은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 조지 부시(George H. W. Bush)가 당선됐던 것과 관련이 깊다. 공화당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에 이어 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가치가 여전했다. 할리우드는 이에 호응해 근육질의 백인 남성을 앞세운 하드 바디 영웅담을 퍼뜨리기에 바빴다. 이들 작품이 수호하는 정의는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가치와 직결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백인 남성 이성애자에 속하지 못한 소수자들은 비정상으로 간주되면서 <나이트 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처럼 흉측한 몰골을 한 괴물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에 사회적 약자가 가졌을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다. <그것>에서 페니와이즈의 공포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면면은 예사롭지 않다. 빌처럼 말을 더듬거나 비벌리처럼 여자고 스탠리처럼 유대인이다. 에디는 몸이 약해 늘 호흡기를 손에 달고 살고 벤은 뚱뚱하다며 놀림당하고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는 리치의 별명은 네눈박이다. 흑인인 마이크는 말해 뭐해, 에디가 좀 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에디의 어머니는 루저 클럽이 못마땅한 나머지 “이 괴물들아!” 비하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에디 어머니와 같은 기성 세대에게는 페니와이즈가 보이지 않는다. 페니와이즈는 사실 실체라기보다 소수자를 비정상으로 여기는 미국 주류 사회를 향해 루저 클럽의 아이들이 느끼는 공포의 어떤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페니와이즈를 ‘그것’이라고 지칭한다!) 레이건 재임 시절부터 조지 부시의 당선까지, 보수적인 가치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소수자에게 더는 미래가 없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리쎌 웨폰 2>의 마틴과 로저처럼 흑과 백이 짝을 이뤄야 했고 <배트맨>의 어둠의 기사처럼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다. <그것>의 어린 주인공들이 페니와이즈에 맞서 이겨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토대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부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1989년의 영화들을 노출하면서 함께 소환하는 노래 중 하나는 ‘뉴 키즈 온 더 블록 New Kids On the Block’의 <유 갓 잇 You got it>이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은 전 세계의 보이 밴드의 개념을 처음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뉴 키즈’는 루저 클럽의 아이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저 클럽이 뉴 키즈인 이유? 1989년 당시 십 대였을 이들이 성인이 되어 뽑은 대통령 중 한 명은 ‘버락 오바마’이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그렇다면 <그것>의 아이들이 약자를 향한 온갖 유무형의 폭력을 이겨내고 비주류가 중심이 되는 시대의 관문을 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너희들이 해냈어! 유 갓 잇!
그걸로 된 것인가? 함정이 하나 있다면 <유 갓 잇>은 과거형이다. 버락 오바마의 시대는 지났고 지금 미국의 지도자는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건 2016년 11월이었다. <그것>의 마을 데리에서 아이 대상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주기는 27년이다. 루저 클럽이 그것에 맞서겠다며 분연히 일어섰던 게 1989년이었다. 거기에 27년을 더하면 정확히 2016년이다. 강한 미국(Strong America), 그러니까,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영광을 부르짖는 트럼프의 출현은 미국의 소수자들에게는 다시 찾아온 ‘그것’이다.
<그것>은 1989년의 아이들이 페니와이즈를 이겨내는 결말로 첫 번째 챕터를 마무리한다. 소설에서는 이 아이들이 깨진 병 조각으로 손바닥을 그어 피가 나는 손을 맞잡고 그것이 되돌아오는 27년 후에 데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챕터인 속편은 2016년이 배경인 영화가 될 텐데 1편을 해독(?)한 결과, 주제가 무언지는 이미 예상이 된다. 트럼프를 몰아내고 새로운 오바마를 불러줘. 영화 <그것>이 부러 주인공의 유년 시절을 소설과 다르게 1989년으로 설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그것>을 향한 호평의 우선순위로 이에 대해 꼭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년의 뉴 키즈는 다시 한번 미국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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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