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엔티스튜디오 김준연
마흔다섯, 홀연히 대학 강단에서 내려와 스페인 마드리드 건축대학의 강의실에 앉은 한 남자가 있다. 그곳에서 복원과 재생 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다시금 여러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한 남자.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의 저자 김희곤은 우리나라 1세대 스페인 건축 전공자다.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단순한 ‘길’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곳을 인류의 역사가 서려 있는 거대한 건축물로 본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박물관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라고 선언하면서 말이다.
『스페인은 건축이다』 , 『스페인은 가우디다』 에 이은 그의 스페인 3부작 완결판인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에서 김희곤 작가는 스페인 건축 전공자답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하나의 거대한 건축 박물관으로 설정하고, 그곳에 놓인 건축물들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자세히 조명하고 있다. 최근 한국인들에게 버킷리스트 여행지로 손꼽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핵심 정보를 김희곤 작가에게 물어봤다. 순례길을 걷기 전 마음가짐에서부터 실질적으로 필요한 용품들까지, 그곳의 베스트 포인트와 여행 꿀팁까지. 전문가의 조언에 귀기울여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 대성당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버킷리스트 여행지들이 있다. 수많은 여행지들 중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집필한 이유가 무엇인가?
스페인 유학에서 돌아올 때 두 가지 다짐을 했다. ‘가우디 건축’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간 국내에서 출간된 산티아고 순례길 책들은 대부분 여행안내서이거나 에세이다. 그 책들 모두 좋은 정보를 담고 있는 양서들이지만, 이런 성격의 책이 주를 이루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 그곳을 올레길 정도의 풍광 좋은 관광지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길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서구인들은 대체로 그곳의 신화와 문화를 사유하며,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그곳을 걷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역사는 서기 813년 산티아고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그 길은 산티아고의 무덤을 참배하기 위해 걸어가는 길이다.(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명인 사도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9세기, 10세기, 12세기 순례길이 프랑스 파리로 이어져 지금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완성됐고 이후 그곳은 유럽에서 가장 성스러운 길이 됐다. “유럽은 산티아고의 길 위에서 태어났다”고 괴테는 말했다. 그 길을 따라 세워져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중세의 신화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그래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를 쓴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 길이 단순한 올레길이나 둘레길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의 인기가 남다르다. 〈스페인 하숙〉의 배경도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오늘날 지구촌은 인류 역사 이래로 가장 진보한 문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매일을 ‘경쟁’으로 살아가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순례자들보다 과연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한 순교자의 무덤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곳은 이런 것들을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며 걸어가는 길이다.
뿐만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사색과 풍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거다. 눈부신 자연경관이 그림처럼 놓인 길을 따라 중세 인류가 가슴으로 쌓아올린 석조건축들이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처럼 이어져 있다. 이런 산티아고 순례길의 진면목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최근 그곳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전경
우리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산티아고 순례길은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가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며 헝클어진 삶을 정리하고 다시 내일로 건강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길이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운 고비 때마다 보름 정도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선다.
1등만 살아남는 사회 속에서 돈이라는 종교를 신봉하다가 영혼이 황폐화된 오늘날의 우리가 삶의 진정한 가치를 통찰하기에 산티아고 순례길만 한 곳은 없다. 배낭을 둘러메고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신화와 역사가 어우러진 길을 따라가다가 중세 사람들이 영혼으로 쌓아 올린 돌의 신전에 들어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그런 곳은 지구상에 오직 산티아고 순례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의 발걸음에 집중하며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버린 진정한 삶의 주인을 불러내는 길. 생에 꼭 한 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길 추천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수많은 도시, 수많은 건축물들로 연결돼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베스트3 포인트’를 짚어 달라.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었던 곳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첫 번째는 부르고스 남쪽 56km 거리에 위치한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Santo Domingo de Silos) 수도원’이다. 장식 없는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연세 지긋한 수도사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화음이 더럽혀진 영혼을 말끔히 청소해주는 느낌이었다. 또한 이곳 수도원의 중정은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 수도원 중정에서 나는 세상 모든 잡념을 지워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는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n)’이다. 레온 대성당은 부르고스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과 더불어 순례길의 3대 대성당으로 꼽힌다. 그곳에 들어섰을 때 1,800㎡ 공간에 128개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슴푸레한 붉은 기운이 내 영혼에 엄습했다. 어두웠던 두 눈 앞에서 실내 곳곳이 천천히 밝아지자 마치 천국의 중심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고, 동시에 우리 문명의 토대를 마련한 중세 인류의 절절한 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 공정은 13∼14세기의 최첨단 공정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다채로운 빛들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황홀감은 스페인의 다른 대성당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운치다.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 수도원 중정(좌)과 레온 대성당(우)
세 번째는 ‘무시아(Mux?a)’다. 무시아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지나야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그곳에는 세상의 모든 고요가 침잠하는 해안이 있다. 무시아의 해안에 서면 마치 죽음 이후의 삶의 공간에 서 있는 착각에 빠진다. 해안 끝에는 17세기에 지어진 ‘바르카 성모 성당’과 성모마리아가 타고 왔다는 ‘돌로 만든 배’가 기묘하게 앉아 있다. 그곳에서 사도 야고보가 성모마리아의 위로를 들었다는 전설에 걸맞게 그곳의 공기는 나를 감싼 모든 시간의 속도와 상념의 무게를 지워버리는 듯했다. 나는 무시아에서 과거와 미래를 벗어던지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서 있었다.
무시아 해안
산티아고 순례길로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의 저자이자 스페인 건축 전문가로서 그분들을 위한 ‘여행 꿀팁’을 알려 달라.
첫째, 미리 그곳의 역사를 공부하라. 신입 사원이 오리엔테이션을 거치듯, 산티아고 순례길은 몸과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고 떠나야 하는 길이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박물관이 산티아고 순례길이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에서 하루 종일 그림들을 홀로 감상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자체로 신화와 역사가 꿈틀거리는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다. 건축과 역사와 문화의 소양은 현장에서 채울 수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역사를 중심으로 문화적 양식을 미리 채우고 길을 떠나지 않으면 몸만 걸어가는 길이 될 수 있다.
둘째, 미리 육체를 단련하라. 떠나기 전 집과 가까운 곳에서라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듯 가벼운 등산화에 실제 무게의 배낭을 메고 걸으며 몸을 단련시켜야 한다. 나는 한 달 동안 9kg의 배낭을 메고 매일같이 올림픽공원을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신과 육체가 하나임을 깨닫는 길이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올바로 서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기부하라. 산티아고 순례길의 정신은 기부와 나눔의 문화가 기반이다. 많은 유럽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기부하는데, 그것은 중세 산티아고 순례길의 정신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기부는 자선의 의미가 아니라 꼭 지불해야 하는 약속어음에 가깝다. 순례길의 값싼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는 모두 익명의 기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한국 여행자들에겐 ‘기부’나 ‘팁(봉사료)’ 문화가 어색할 수 있다. 미리 염두에 두고 기부를 실천하자.
ⓒ 아이엔티스튜디오 김준연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기 전 반드시 챙겨야 할 것들은?
역시 세 가지 정도로 말씀드리겠다. 첫째는 세계인과 소통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가능하면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정식(약 12유로)’을 먹고 즐기면서 세계인들과 소통하기 바란다. 세계인들과 하나가 되어 지구촌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길들인 등산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배낭을 둘러메고 자신의 두 발로 걸어가는 고난의 연속이다. 직접 걸어보며 짐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연구하고, 등산화는 반드시 떠나기 전 한 달 정도 길들이기 바란다. 순례길에서의 두 발은 산티아고의 품으로 자신을 데려다주는 동지다.
셋째는 지팡이다. 아무리 걷는 데 자신 있더라도 지팡이는 꼭 챙겨야한다. 지팡이는 발을 헛디딜 때 몸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하고 배낭의 무게를 줄여주기도 한다. 오솔길이나 비탈길에서 자칫 발을 헛디디게 되면 다음 일정을 지속할 수 없다. 지팡이 없이 기세등등 걷다가 발목이나 다리를 다쳐 중도에 완주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에서도 품질 좋은 초경량 지팡이가 생산되고 있으니 꼭 준비하기 바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최근 불탔다. 850년의 역사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850년이 맞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두 세기 전, 프랑스대혁명으로 무너진 것을 복원해놓은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비극이 21세기에 다시 재현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슴 아프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유명한 것은 3세기 중엽, 파리의 초대 주교이자 수호성인인 생 드니의 순교 장면을 조각한 부조가 성모마리아 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잘린 머리를 받치고 왼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는 생 드니의 조각이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다. 노트르담은 프랑스어로 성모마리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앞마당에는 ‘프랑스 길(산티아고 순례길)’의 ‘제로 포인트’가 놓여 있는데, 그것은 성모마리아의 품에서 순례길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프랑스 길을 떠나기 전에 노트르담 대성당부터 찾는다. 중세 스페인 건축의 대문이자 프랑스 길의 제로 포인트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12세기 노트르담 대성당은 유럽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 반드시 들르는 대문 역할을 했다. 또한 오늘날 파리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바라보는 서쪽 대서양을 향해 샹젤리제가 놓여 있고 그 언덕 위에 개선문이 서 있다. 이는 파리가 중세 역사의 기초, 즉 노트르담 대성당의 품에 안겨 있음을 의미한다.
김희곤 작가가 직접 스케치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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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순례길이다김희곤 저 | 오브제
작가가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정리한 글들과 직접 그린 건축 스케치들, 직접 찍은 사진들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산티아고 순례길’을 더욱 깊고 정연하게 사색할 기회를 제공한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