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번역한 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한다는 독자들이 있을 정도로 신뢰가 두터운 번역가가 있다. 번역가 노지양. 『나쁜 페미니스트』 등 주목받는 페미니즘 도서를 여러 권 번역했고, 까다로운 에세이도 뉘앙스를 잘 살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 는 이러한 노지양 번역가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린 책이 아닐까. 보이지도 않고, 끝도 없는 감정노동에 지친 여성들의 경험담은 생생하다 못해 뒷목을 잡을 정도이니 말이다. 거기다가 감정노동을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간의 페미니즘 도서 번역 이력이 신뢰감을 더해준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부터 이 책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 까지, 페미니즘 도서들을 유독 많이 번역하셨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나쁜 페미니스트』 가 가장 큰 계기였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여성 저자의 에세이를 많이 번역한 편이었지만 『나쁜 페미니스트』 이후로 출판계에 페미니즘 도서 붐이 일면서 저에게 많은 의뢰가 왔습니다. 그 한 권 한 권이 모두 흥미로웠고 깊이 공감되었고 독자들이 제가 받은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번역하려 노력했어요. 페미니즘 관련 번역서들이 쌓이니까 이제는 페미니즘 에세이 하면 저를 먼저 떠올리시는 편집자님들이 많은 것 같고 저 또한 이 분야의 책을 번역할 때 가장 자신 있고 즐겁습니다.
책의 부제가 ‘여자들에게만 보이는 지긋지긋한 감정노동에 대하여’인데요, 여자라서 부당하게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고 가장 심하게 느끼실 때는 언제인가요?
가정에서는 사춘기 아이와 아빠와의 사이를 조율할 때 가장 큰 감정노동을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의 표정을 살피고 남편이 원하는 걸 고려하면서 가족이 만족할 만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제 욕구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리게 되지요.
SNS에서는 거친 댓글을 받아도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게 무던하게 넘어가려고 애썼죠. 그러다가 생각했어요. 왜 나는 감정이 상했는데도 상대방의 기분을 이렇게 살펴야 하지? 『남자들은 항상 잔소리하게 만든다』 의 제마 하틀리도 길에서 “웃으라”며 시비를 거는 남자들 앞에서 순간적으로 움츠러드는데 상대의 반응을 짐작할 수가 없어서입니다. 결국 더 큰 피해가 올지 모르니 나를 보호하고 싶은 거죠. 하지만 하틀리의 친구가 공원에서 접근하는 남자에게 그랬듯이 단호하게 대처했을 때 사과를 받기도 하고 오해도 풀린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집안일을 나누어서 하시는 편인가요? 이 책의 저자처럼 집안일과 감정노동의 균형을 맞추어 가기 위한 선생님만의 노하우가 있으시다면 알려주세요.
신혼 때는 남편도 같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프리랜서다 보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성미가 급해서 먼저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익숙해지고, 결국 제가 거의 모든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하틀리가 가정 내 가사노동의 불균형이 왜 이렇게까지 심해졌을까? 질문하고 “한 번에 하나씩(one step at a time)”이라고 말할 때 정답이라고 외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제 저도 남편에게 한 번에 하나씩 맡기려고 노력합니다. 남편이 주말에 요리를 하고 있으면 참견하고 싶어도 꾹 참고 기다렸더니 장보기부터 남편이 주도적으로 하게 되었어요. 또한 저자처럼 허심탄회한 대화의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 이 억울한 감정을 나만 느끼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해준 이 책이 고맙죠.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절 지지해주고 있고 제게 더 풍부한 관점과 언어가 생겼으니까요.
위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책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시잖아요. 책에 실린 저자의 에피소드 중 어떤 내용에 가장 공감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꼽아야 할지… 하틀리가 서재에서 일하고 나왔을 때 엉망이 된 집을 보고 경악하죠. 저도 마감을 위해 숨차게 일하고 집에 왔는데도 제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100가지 정도 있는 집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제2의 직장으로 출근한 기분이죠. 또한 할 일이 항상 남아 있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아이 장난감을 챙기지 못했을 때처럼 저도 아이 교복을 빨아놓지 못하거나 학교 행사를 잊어버리면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요. 더 잘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 건 결국 내게 게을러서라고 자책하게 됩니다.
책을 번역하시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단어나 문장이 있으셨나요?
저자는 감정노동이 보이지가 않아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감사해하지 않기 때문에 몇 배로 힘들다고 강조합니다. 배우자가 여건상 가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할 수 있어요. 하지만 가정이 문제없이 돌아가기 위해서 배우자가 어떤 발버둥을 치고 있고 어떤 정신적 부담을 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남편에게 이해받고 나서 말합니다. “나는 목격되고 싶었다. 나는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었다. 내가 하는 매일의 감정노동이 가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다른 책 중에 이 책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을 한 권 추천해주신다면?
『남자의 시대는 끝났다』 는 남자다움의 기준이 변하고 있고,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남성들도 여성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그 적응은 ‘감정노동 나눠서 하기’일 것입니다.
이 책이 요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특히 꼭 보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면요?
저자가 “감정노동은 주변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모든 일”이라며 감정노동의 정의를 확장하고 우리 일상 곳곳에 적용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성의 신화』 의 베티 프리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름 없던 문제에 이름을 붙여준 것 같습니다. 앞날을 약속한 커플이나 신혼부부가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가사와 육아를 처음부터 더 잘하는 사람은 없고 “내 일”이라고 여기면서 잘하게 될 뿐입니다. 그렇게 짐을 나누었을 때 얼마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지는지, 또 우리 자녀들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이 책으로 미리 배우길 바랍니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KBS와 EBS에서 라디오 방송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에세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를 썼으며, 『그런 책은 없는데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여자라는 문제』, 『싱글 레이디스』, 『에브리씽 에브리씽』 등 80여 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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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제마 하틀리 저/노지양 역 | 어크로스
제마 하틀리는 이름 없던 감정노동에 이름을 붙이는 데서 더 나아가, 실용적인 조언을 통해 감정노동에 억지로 끌려다니지 않고 감정노동이라는 돌봄의 기술을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