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 저자가 2018년 청계천 박물관에서 진행했던 <빽판의 시대> 전시를 계기로 『빽판의 전성시대』를 출간했다. 팝송을 심도 있게 소개하는 연구서라기보다는 빽판을 통해 시대별로 국내에서 각광받았던 팝송과 아티스트의 실체 파악에 주력했다. 한국에서 인기 많았던 팝송을 분류하고 번안곡과 내한공연 등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작업과 외래어 표기, 황당한 오타도 챙겨보았다. 또한, 저자가 직접 촬영한 4,000여 컷의 사진 자료들과 함께 빽판의 제작, 유통 과정뿐 아니라, 빽판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LP시대를 마감한 1990년대까지의 가요와 댄스, 경음악, 클래식, 영화, 인기가수와 그룹, 국제가요제, 편집 팝송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추적하면서 이야기한다. 1950년대부터 LP시대를 마감한 1990년대까지의 빽판의 역사를 소개한 책을 집필한 최규성 저자를 만나본다.
※ 빽판이란?
음반 판권 소유자와 라이선스(사용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제작해 유통시킨 해적 음반을 지칭한다.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국외 음악 중에서 국내 음반사와 계약해 들어오는 라이선스 음반이 한정되어 있었기에 음반 수입이 전혀 없었던 1960년대엔 지상파 라디오에서도 빽판을 이용했고, 방송금지 되었던 곡들은 빽판을 통해 음지에서 몰래 유통되었다.
방대한 양의 빽판을 소유하고 계신데 언제부터 관심을 갖고 수집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있나요?
대학입학 때까지 빽판을 2,000여 장 수집했는데 추억이 담긴 800여 장 정도만 남기고 다 버렸습니다. 30대 중반이 넘은 분들은 소장했던 빽판들을 대부분 버렸을 겁니다. 불법으로 제작된 저렴한 음반인지라 음질도 떨어지고 소장 가치가 1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번 책 집필 과정에서 2년 동안 다시 수집해 5,000장 정도를 다시 모았습니다. 사실 제 음반 수집인생의 시작은 빽판이었습니다.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동네 친구 집이었습니다. 딥 퍼플(Deep Purple)의 「Highway Star」를 듣고 충격을 받고 소름 돋았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강렬한 팝송 한 곡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으니까요.
빽판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기억에 남는 빽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처음 접한 팝송에 충격을 받고 중학생이 된 1974년부터 수업이 끝나면 무엇에 홀린 듯 동네 음반가게들을 매일 같이 순례했어요. 당시 청소년들은 음반가게 진열대를 장식한 금발의 외국 여성사진을 사용한 편집 팝송 빽판에 홀려 기꺼이 용돈을 꺼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팝송에 매료된 저는 더 많은 음악에 목말랐죠. 한 음반가게 주인이 ‘청계천에 가면 금지곡까지 수록된 빽판을 살 수 있다.’는 솔깃한 정보를 알려주어 그때부터 주말이 되면 용돈을 아껴 버스를 타고 청계천으로 향했죠. 청계천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멋진 음악이 담긴 음반을 찾아내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처음 빽판을 수집하면서 제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구입 순번과 날짜, 가격까지 재킷에 적었어요. 당시 제가 쓴 자필이 들어 있는 단색 빽판들은 가치와 상관없이 제겐 가장 소중한 보물들입니다. 그중 동네 친구 집에서 우연히 듣게 된 딥 퍼플의 「Highway Star」 빽판은 제가 처음으로 구입한 음반이라 애착이 많이 갑니다.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요?
2018년 청계천박물관에서 <빽판의 시대>라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음악 관련 자료 수집가인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전시는 빽판뿐만 아니라 청계천에서 제작한 빨간 책, 오락기 등등 다양한 물건을 함께 전시했습니다. 그런데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전시된 빽판들을 보며 많은 관람객들이 추억을 소환하며 너무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문득 빽판에 대한 역사를 책으로 정리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빽판은 숨기고 싶은 흑역사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도 정리하지 않은 미개척지란 점도 매력적인 연구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책을 쓰려니 제가 소장한 음반으로는 전체 시대를 다루기엔 너무 부족해 빽판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서울 회현 지하상가, 동묘, 청계천을 비롯해 인천 부평, 경기도 동두천, 파주, 그리고 대전, 전남 무안, 부산 등 전국을 찾아다니며 수집했습니다. 당초 빽판을 구하면 원판과 비교해 보여주려 구입했는데 원판은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지만 빽판은 돈이 있어도 구할 곳이 없어 쉽지 않았습니다.
빽판을 바라보는 시각이 시대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어떤 변화가 있나요?
빽판은 한국전쟁 이후 물밀듯이 유입되었던 서양의 장르 음악들을 담아 트로트 일변도의 한국대중음악에 다양성을 수혈하며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쟁으로 붕괴 직전이었던 국내 음반시장의 재건에도 상당 부분 공헌했습니다. 초창기의 빽판들은 춤바람 난 1950년대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각종 사교춤을 추기 위한 댄스용 연주음반의 인기가 절대적이었습니다.
1960~70년대는 빽판을 통해 접한 다양한 서구 장르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팝송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잡지들과 방송, 다운타운 디제이(DJ)들이 등장하면서 팝 문화 형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빽판 라벨에는 정부에서 정식으로 발행했던 납세필증 인지와 지방자치단체의 검인 인지까지 붙여 판매했는데 저작권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어설픈 시대의 해프닝입니다. 1980년대는 국내 음반 산업을 황폐화시켰을 정도로 과도하게 팽창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아날로그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빽판의 전성시대도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빽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책을 쓰는 내내 주말마다 청계천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어떤 음반을 구할지 흥분했던 추억이 떠올라 행복했습니다. 빽판은 낭만이 넘쳤던 아날로그 시절을 증언하는 추억의 산물이기에 향유했던 세대에겐 추억으로, 존재 자체를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문화적 발견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한국 대중에게 익숙한 과거의 히트 팝송은 거의 대부분 빽판에 담겨 있으니 매력적이죠. 불법적으로 제작되어 음성적으로 유통된 빽판은 태생적으로 숨기고 싶은 흑역사라는 원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땅에 서구의 팝송을 전파시킨 통로라는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빽판은 보존될 가치가 없는 대상으로 인식되었지만, 국내 팝송 문화의 보급과 침체 일로의 한국 음반시장에 회생의 기운을 수혈한 긍정적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빽판은 모두가 공감하는 추억의 산물이고, 한국 팝 문화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공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기에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보고 빽판에 관심이 생겼다면 어떤 앨범부터 구입하거나 들어보면 좋을까요? 추천할만한 게 있나요?
현재 빽판을 파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추천을 해도 빽판을 구하기가 쉬운 상황은 아닙니다. 다만 발품을 파는 노력을 들이며 수집해보겠다면 해외에서도 관심이 많은 비틀스(The Beatles)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추천합니다. 비싸고 귀하긴 하지만 한국인이 좋아하는 주옥같은 팝송이 넘쳐나 소장가치가 높습니다. 1순위로 버려진 빽판은 현재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주 고객층이지만 희귀한 음반은 부르는 게 값인 귀한 존재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개체 수가 희박하고 원판 재킷과 상이한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메탈리카(Metallica) 등 시대별로 인기가 많았던 국내 제작 빽판이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수십만 원에 낙찰되거나 100만원이 넘는 가격을 호가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귀한 빽판보다 개체수가 많아 저렴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들이 들어있는 빽판들과 과거 100만 장 이상 팔렸다는 입소문이 무성했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바카라(Baccara), 보니엠(Boney M), 이럽션(Eruption), 레이프 가렛(Leif Garrett), 립 씽크(Lipps Inc.), 산타 에스멜라다(Santa Esmeralda) 등을 추천해 드립니다.
책도 출간하고, 전시도 하셨는데 앞으로 빽판을 통해 어떤 일을 해나가고 싶으세요?
원래 책 발간과 더불어 전시가 1년 전부터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를 거듭하다 결국 취소되었습니다. 책 발간 이후 시대별로 제작된 다양한 빽판 실물들을 직접 보고 싶은데 전시회가 취소되어 너무 안타깝다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더군요. 지금은 전시를 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안정이 되면 추억을 소환시켜주고 한국 팝 문화 형성에 기여한 빽판 전시를 꼭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강릉 KBS 어린이합창단 단원을 계기로 노래에 빠져든 그는 1986년부터 2006년까지 20년 동안 한국일보 기자와 편집위원 등으로 일하면서 대중가요와 동고동락했다. 현재는 방송 등 여러 매체에서 대중가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KOREAN INDIE MUSICIAN PHOTOGRAPHS』라는 한국 인디뮤지션 사진집을 출간했고, 대중가요 나아가 문화 전반에 대한 폭넓은 강의와 다양한 전시를 진행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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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