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장애, 발암 유발자, 암 걸릴 것 같다, 장애인 같다, 발작 버튼… 특정 질병을 언급하는 말들이 마치 재밌는 농담처럼 쉽게 쓰이고 있다. 실제로 그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사정과 상관없이 한낱 웃음거리로 소모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가닿을 수 없는 것일까. 『제 왼편에 서지 말아주세요』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아픔을 맞닥뜨린 사춘기 소녀가 자신의 아픔과 주변의 불편한 시선에 맞서 당당히 나아가는 한 편의 성장기이다.
『제 왼편에 서지 말아주세요』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에요. 간단한 책 소개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태어나서 타인에게 “제 왼편에 서지 말아주세요”라는 부탁의 말을 제일 많이 한 김슬기입니다. 2007년 10월 14일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왼쪽 얼굴에 안면 마비가 와서 표정을 지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채로 살던 어느 날, 제 왼편의 모습을 본 친구가 저를 ‘옆모습 병신’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뒤로 누군가 제 왼편에 서는 것이 너무나도 무섭고, 불편한 행위로 여겨졌어요. 13년 동안 아픈 얼굴을 숨기기 위해 항상 남들에게 내 왼쪽에 서지 말라고 부탁했고, 다시 남들처럼 평범하게 웃기 위해 견뎌내야만 했던 시간을 담아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안면마비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본 사람들한테 “너 이제 장애인 된 거야?” “너 얼굴 진짜 이상하다” “표정이 왜 그래?” 같은 말들을 반평생 들어오셨잖아요. 특히 그러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그저 ‘웃기다’는 이유로 계속 작가님의 표정을 따라 했던 직장 동료들이 기억에 남는데요. 그분들과 이제 친하게 지낸다니 다소 놀랐어요. 너른 아량으로 그들을 품으신 건가요.
마음이 안 맞는 대상이 친구나 애인 같은 관계일 때면 다시는 안 만나면 그만이지만, 회사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회사를 관두지 않는 이상 아무리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야 하잖아요? 심지어 그들은 내게 일을 시키는 입장이고, 나는 그들의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니까 제 나름대로 계산을 했어요. ‘어떻게 하면 그들과 잘 지내면서 그들의 무례함을 지적할 수 있을까?’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내린 행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어요.
그들에게 업무 지시를 받으면 부족하지 않도록 열심히 일했고, 그들이 무례한 장난을 던지면 똑같이 무례하게 맞섰어요. 간혹 주변에서 ‘아무리 그래도 윗사람이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 네가 참지…’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똑같이 갚아줬어요. 그들의 무례함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참지 않았죠.
사람들이 함부로 저에게 상처 주었다고 해서 제가 조용히 피하기만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를 함부로 대했던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꼭 서로 좋아하는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자유롭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도 ‘친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그들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제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친하다’는 표현을 빌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느 직장 상사분이 “왼편 좀 그만 우려먹어. 무슨 사골 국물 우리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저를 ‘김 사골’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에게 “책이나 사고 말해. 내가 쓴 책 한 권도 산 적 없으면서 사골이네 뭐네 말하는 거 되게 웃긴 거 알아?”라고 되받아쳤어요. 그랬더니 이번에 나오는 책은 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배 욕 많이 나오는데 괜찮겠냐 했더니 자기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고 하더군요. 참나, 선배가 언제 날 키웠다고….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대처하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학창 시절과 사회초년생 때까지만 해도 누군가 제 아픔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게 뭐라고 마치 제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우물쭈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이제는 사회생활을 오래한 덕분일까요? 언제부턴가 상대의 무례함이 오로지 저만의 상처로, 제 몫으로 남는 게 무척 억울하더라고요. 정작 상처를 준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안 할 텐데….
그래서 상처받기보다 그들에게 무례함을 지적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저에게 던진 말들은 너무도 무례했고, 간혹 본인이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함부로 상처 주는 짓을 그만할 때까지 지지 않고 계속해서 무례함을 지적했어요. 누구에게도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으니까요.
반대로 주변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었던 순간도 많았던 것 같아요. 새벽에 오동나무 가지를 꺾어와 교정 기구를 자체 제작하신 할머니, 방방곡곡 함께 다니며 같이 울고 웃은 어머니, “웃을 때 눈이 예뻐”라고 해준 남자 친구, 긴 치료 시간을 기다려주던 친구들… 덕분에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따뜻했어요. 나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 어떤 의미일까요?
내 사람들과 있을 땐 내가 어떤 표정으로 비칠지, 나를 보고 어떤 오해를 할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덕분에 종종 저의 아픔을 잊곤 해요. 적어도 내 사람들과 있을 때만큼은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죠. 이 아픔은 나를 형용하는 수만 가지 요소 중 겨우 하나의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특히 할머니와 엄마, 할아버지는 저의 전부예요. 지난 13년간 오로지 이분들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고, 이렇게 책도 쓸 수 있었답니다.
나의 아픔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 기록들이 한데 모인 이 책이 독자에게 어떤 의미로 가닿기를 바라나요?
저는 현재도 왼쪽 안면 마비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어떤 노하우나 해결책을 알려주지도,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주지도 않아요. 다만 우린 저마다 다른 아픔을 안고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의 아픔에 닿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저만의 희망이 담긴 책을 냄으로써 아픈 사람들이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보내야 하는 시간을 함께 들여다보고, 그들의 아픔을 십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누군가의 아픔에 저의 책이 감히 전해지기를, 용기와 위로를 전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들이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그 이상의 새로운 세상을 권하고 싶습니다.
안면 마비를 앓은 지 13년이 되었어요. 그 시간을 담은 책도 나왔고요.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긴 느낌일 것 같은데요. 요즘 작가님의 일상은 어떠한가요?
이번 책을 통해 제가 채우는 하루하루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더욱 피부로 느꼈어요. 덕분에 하루를 더욱 차분히 들여다보고, 하루를 더욱 조심스럽게 지키기 위해 일기도 밀리지 않고 쓰고, 블로그도 열심히 관리하고, 사진과 동영상도 많이 찍으면서 기록의 힘을 기르고 있어요. 동시에 하루도 빠짐없이 제 책이 놓인 서점에 가서 책이 잘 있나 구경도 하고, 온라인 서점에 책 리뷰를 검색하고, SNS에 제 책 이름을 검색해보기도 해요.
가끔 제 책을 읽은 뒤 본인의 아픈 경험담을 털어놓은 독자분들의 리뷰를 보곤 하는데요. 저를 비롯한 저희 가족 모두가 이 책이 이렇게 귀하게 쓰이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감사를 느낍니다.
남들이 정하고 생각하는 길만이 옳은 길이 아니라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에는 내가 걷고자 하는 목적과 주제가 되고, 나아가 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는 것도 책을 통해 몸소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상상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한마디 날려주세요. 그러한 공감이 필요한 분들에게는 응원의 한마디를 부탁드려요.
우리는 모두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저마다 서로 다른 아픔을 안고 살아가요. 그 아픔은 본인만 느낄 수 있거나,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죠. 혹은 본인도 미처 자신의 아픔을 모를 수 있고, 내가 아픔이라 생각하지 않는 범위도 아픔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 아픔의 범위에 대해선 그 누구도 기준을 내릴 수 없어요. ‘아무렇지 않은’ 아픔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타인의 아픔이 더 크게 번지지 않게 지켜주는 길이에요.
* 김슬기 나다운 하루를 글과 그림으로 블로그와 일기장에 담았다. 나를 위해 들였던 시간은 나를 더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나는 내 아픔에 대해 온전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답다는 것은 결국 슬기롭다는 것, 그 자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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