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이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엄청나게 멋진 거군요!"
놀이터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정자에서 할머니 일곱 명이 가로세로 널브러져 낮잠을 즐기고 있는 그때, 아기 고양이 '그루'의 장난으로 할머니들의 자기 자랑이 시작된다!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는 구돌 작가가 글, 그림을 동시에 작업하여 세상에 내놓은 그림책 데뷔작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마음을 담아낸 구돌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로 '제27회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 그림책은 우리 곁에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듯싶은 할머니들이 놀이터 정자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나 '내가 왕년에 말이야!'를 외칩니다. '내가 왕년에...'로 말을 꺼내면 보통 옆에서 콧방귀를 뀌잖아요. 과장된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니까요. 콧방귀를 들은 일곱 할머니는 가만있지 않습니다. 차례대로 나서서 본인의 왕년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다 동물 학대범이 나타나며 놀이터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지요. 그런데 평일 낮이라 아이들은 학교에 있거든요.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그 이야기가 이렇게 책으로까지 나온 걸 보면 그날 목격자들이 좀 있었나 봅니다.
작업 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스타일 또한 새로운데요. 어떻게 진행하셨고, 특히 신경 쓰신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책의 모든 장면을 몇 개의 모양자로 그렸습니다. 배경과 캐릭터가 모두 도형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리는 도형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면 저는 악기와 놀이 기구의 모양을 좋아하는데요. 악기는 작은 동그라미와 네모의 조합이고, 놀이 기구는 그보다 큰 동그라미와 네모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색과 질감을 제외하고 사물의 외형에 집중하거나 혹은 그림자를 관찰해 보면, 우리가 하루에도 수천수만 개의 도형을 보고 만지며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 역시 약간의 단순화를 거치면 도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에서 꽃은 동그라미로, 풀은 세모로 나무 몸통은 네모로 표현되어 있어요. 뭔가 익숙하지 않나요?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이 그렇거든요. 우린 어릴 때 단순화, 도형화를 시켜 사물의 본질만 뽑아 그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커가면서 잊었을 뿐이지요. 표지 제목 타이포 그래픽 역시 모양자로 그렸습니다. 도형을 리듬감 있게 배치하고 색과 패턴을 입혀 나온 결과물이랍니다.
놀이터 곳곳에 숨겨진 동물 학대범의 공개 수배서와 할머니들이 요란스럽게 실력을 뽐내는 사이 놀이터로 몰래 숨어드는 의문스러운 남성의 모습 등 디테일이 돋보이는 작품이에요. 이처럼 읽는 독자가 찾아냈으면 하는 부분이 또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는 모든 장면에 '목격자'가 존재합니다. 조퇴한 아이일 때도 있고, 동물이나 곤충일 때도 있어요. 때로 화면에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요. 그 각각의 시선을 따라가 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요. 그리고 본문에 소개되지 않은 일곱 번째 할머니의 과거와 현재 직업은 무엇일까요? 저와 관련이 되어 있답니다. 약간의 힌트를 드리자면, 저는 반복 속에서 일어나는 변주를 매우 좋아하고 즐기는 편인데요. 그림과 글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통통 튀면서도 오랜 세월을 담아낸 할머니들의 과거 이야기가 인상 깊어요. 혹시 이야기 속 할머니들의 실제 모델이 있을까요? 어디서 영감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동네 놀이터 평상에서 주무시던 할머니들에게 영감을 받았습니다. 매일 옆을 지나치다 불현듯 깨닫게 되었지요. 제가 그분들의 지나간 시간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사실을요. 그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끄적이다 '여섯 할머니와 놀이터'라는 더미북을 만들었어요.
그 뒤로 덮어놓았는데, 2020년에 <갤러리현대 50주년> 전시회를 가게 되었어요. 한국 전쟁 직후부터 전위 예술 작가들을 후원하며 수집한 작품들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벽에 적힌 작가 리스트를 읽다가 그곳에 여자 이름이 없다는 걸 알아챘어요. 지금은 전위 예술을 하는 여성 작가들이 많은데, 그 시절 인구의 반이던 여자는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여자에게 사회적으로 기대하지 않고,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시대가 있었어요. 근사한 미술관에 전시되지 못한 그 시절 여자의 삶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 제 책에 전시하기로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있던 원고를 깨웠어요. 여름 내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을 했고, 그해 가을 비룡소 공모전에 응모했지요.
일곱 할머니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가 있나요?
일곱 번째 할머니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 '뽀글머리'를 하고 있지요. 아이들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산 캐릭터예요. 그런데 뒤표지를 보시면 모두 웃는데 혼자만 입을 비죽거리고 있어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마치 저 같지요. 일곱 번째 할머니의 현재 모습으로는 뒤표지에 그려진 과거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어요. 그렇습니다. 누구도 지금 제 모습에서 과거에 록 콘서트 1열에서 긴 핑크 머리를 흔들며 헤드뱅잉 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않지요.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시간을 가지고 있어요. 나이는 경험이 쌓인 영수증 같은 거란 생각을 하는데요. 그 영수증을 본인이 내보여 주기 전까진 그 사람을 잘 알 수 없지요. 간혹 타인의 주머니에서 예상치 못한 영수증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흥미로운가요. 아이들은 과거란 개념을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를 읽고 부모 혹은 조부모에게 '어떤 지나간 시간이 있었는지' 물음을 가지는 아이가 한 명쯤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목에 나왔듯 일곱 할머니의 이야기는 놀이터라는 장소에서 전개돼요. 혹시 놀이터에 관한 작가님만의 추억이 있으실까요?
저는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건너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 놀이터도 가끔 지나가요. 그러면 작은 내가 미끄럼틀 아래서 함정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판 후 신문지를 덮고 그 위에 모래를 살살 뿌리고 나뭇잎도 몇 개 던져 놓습니다. 아주 감쪽같지요. 그게 뭐가 그리 재밌는지 매번 열성을 다해 만들었는데, 누구도 그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른과 아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그림책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의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빠 팔베개를 하고 이야기를 듣던 시간을 어른이 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너무 재밌어서 더 읽어 달라고 조르다 잠이 들곤 했어요. 아빠는 저에게 '이야기의 즐거움'을 유산으로 남겨 주셨어요.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는 글이 조금 많아요. 일반적으로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상호 작용을 맺으며 겹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기도 하는데, 저는 일부러 글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알 수 있게 만들었어요. 그림책은 아이들이 읽는 책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들려주는 책이기도 하니까요. 가만히 눈 감고 부모의 이야기를 듣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잖아요. 더 과장하고 효과음을 내시면서 아주 재밌게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구돌 (글·그림) 경계를 넘나드는 장기 여행자로 살다가 지금은 정착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손바닥에 매달려 있는 다섯 손가락 같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존재들에 관심이 많다. 『장벽을 넘는 법』을 독립 출판으로 만들었다. 『국경』으로 제6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로 제27회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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