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랑 칼럼] 만화 전시는 곤란하다 - 〈Read Game Book: 게임북을 읽어라〉
는 웹툰 이후 쉴 새 없이 변모하며 분열하고 있는 만화의 ‘불순한’ 상황에 각각의 매체들이 어떻게 만화의 그릇이 될 수 있는 지를 다만 특정 매체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으면서 모색해보려는, 또한 그 모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모험적인 시도인 것이다.
글ㆍ사진 윤아랑(평론가)
202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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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게임 북: 게임 북을 읽어라> 포스터


지난 6월 1일 부산에 다녀왔다. 중구의 전시공간 오픈 스페이스 배에서 열리는 전시 (이하 )를 관람하기 위해, 또 전시의 연계행사인 집담회 <만화, 전시라는 매체로 무엇을 하나>에 패널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시는 『데미지 오버 타임』과 『나의 살던 고향은』 등의 작품을 만든 만화가 선우 훈의 개인전으로, 까르띠에의 기획전이나 광주 비엔날레 등의 미술 전시에 출품된 적은 있으나 그의 작품만이 전시공간 전체를 채운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날은 서울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의 16차 집회가 동시에 열린 날이기도 했다. 하여 부산으로 가는 길에 나는 자꾸만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는 에 대해 집중해야 할 포인트가 몇 가지 있었는데, 첫번째는 픽셀아트와 웹툰을 교묘하게 착종시키는 선우 훈의 작업에 나름 오랫동안 지지를 보내왔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개인적으로 한때 그(와 이번 전시의 기획자로 참여한 만화평론가 오혁진)의 동료였다는 것이었으며, 세번째는 웹툰이 전면화된 ‘동시대 미술’ 전시 내지는 ‘전시로서 만화’가 우리에게 낯선 만큼 이를 잘 파악하고 남들에게 설명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었고, 마지막 네번째는 당장 오후 3시에 집담회가 시작되는데 전시장에 도착한 건 오후 1시 반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여 최대한의 집중을 준비한 채, 나는 서둘러 전시장에 들어섰다.


전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 들어서면 왼편에 (이전의 다른 기획전에서 몇 번 전시된 바 있는) 이 벽 한 면에 크게 투사된 것이, 오른편에 (원래는 웹툰인) 『나의 살던 고향은』 1화를 인쇄한 아코디언 소책자가 벽 한 면에 가로로 활짝 펼쳐진 것이 눈에 띈다. 이 대비는 내게 퍽 신경 쓰였는데, 1980년대 이래 한국의 광장을 온라인적 평면성의 차원에서 재해석한 ‘거대서사적’인 전자가 전자 기기를 매체 삼고 선우 훈의 개인사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은 ‘소서사적’인 후자가 종이를 매체 삼았다는 데서, 매체와 역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선우 훈과 (본 전시의 큐레이터를 맡은 미술가) 조나경의 의중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사이의 기둥에는 QR 코드가 붙어있으며, 현재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이 공간을 맵으로 간단히 구축한 (선우 훈이 직접 제작한) 도트 게임 <큐브룸>에 접속할 수 있게끔 해 놓았다.


다음 전시장은 4층과 5층에 마련되어 있는데, 이를 관람하려면 1층 안의 계단이 아니라 바깥의 다른 출입문을 통해 구식 건물다운(혹은 대안공간다운)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은 참고하시라) 힘겹게 4층에 도착하면 우리는 (역시나 대안공간 답게, 혹은 RPG 게임 속 던전같이)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공간들과, 그 속에 마치 미니 게임처럼 배치된 웹툰과 큼지막한 픽셀 그림 그리고 옛날 싸이월드 풍의 (진짜) 게임을 만나게 된다. 그 중 빛의 3원색이자 픽셀의 기본 색상인 빨강, 초록, 파랑에 따라 , , 로 나뉘어진 웹툰들은 각각 선우 훈이 이번 개인전을 하게 된 연유, 픽셀 아트에 매료된 연유,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연유를 담고 있으며, 를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현장에서 관람자가 직접 스크롤을 오르내리며 관람하는 인터랙티브 형식과 QR 코드를 통해 관람자 개개인의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는 온라인 형식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한데 선우 훈은 를 포함한 작품들을 이미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하였다.)


전시를 훑은 직후의 첫 인상은, 묘하게도 생각보다 얌전하고 담백하다는 것이었다. 상술했듯 여러 기획전에 참여하기도 했고 대안공간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 훈은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거의 ‘보편적인’ 형태의 웹툰을 여기서 선보였다. 내심 이 전시가 만화에 대한 종래의 관념을 뒤흔들거나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길 기대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던 나로서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 역시도 비평가 특유의 자의식 강한 아집이 아니었을까. 당시 나는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 채 서둘러 집담회 준비를 시작했었다. 한데 집담회에 참여해 (선우 훈, 정원교, 란탄 등의 패널들 그리고 플로우의 청중들과) 열띤 논의를 주고받다 보니 생각들이 꽤나 정리되었고, 이를 여기에 풀어놓을 필요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하여 가 우리에게 던진 쟁점들을 잠시 간단히 논해보려 한다. (참고로 집담회에서 나눈 얘기는 추후에 제작될 전시도록을 기다려 주시기 바란다.)


에서 가장 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상술한 인터랙티브 형식과 온라인 형식의 혼재다. 전시장 내부의 오브제가 어찌 배치되었든 간에, 보통의 동시대 미술 전시에선 그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경험이란 가능한 전시장의 장소특정성에 기반을 둔다. (이는 QR 코드를 미적 수단으로써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전시 역시 ‘일단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RPG 게임 속 던전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도 오픈스페이스 배로부터 그런 장소특정성을 어느 정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런데 선우 훈은 여기에 배치된 모든 만화들에 QR 코드를 붙이거나 미리 블로그에 공개적으로 게재해 전시장 바깥에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즉 만화들에 대한 전시(장)의 시공간적 인력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형식을 활용함으로써 전시의 장소특정성을 강하게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에 실린 선우 훈과 조나경의 대화가 떠오른다.


선우 훈,


"만화를 읽을 때에는 내 몸이 존재한다는 걸 잊게 되는데... 그런 독서의 경험이 미술 관람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전시가 그런 경험을 줄 수 있을까요?"(선우 훈)


"음... 제 생각에 전시 관람은 몸이 강하게 인식되는 행위인 것 같은데요, 만화 독서와 전시 관람 사이의 긴장감을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해 봐야겠네요."(조나경)


어쩌면 이 혼재된 형식들은 조나경이 말한 “긴장감”이 모종의 불화로서 소화된 결과가 아닐까? 서로 통합되지 않는 차이를 가시화하는 것으로서 불화말이다. 말하자면 전시(장)을 요하는 동시에 요하지 않는 전시. 나는 집담회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이란 오랜 비유를 (앙드레 바쟁과 유운성을 의식하며) 빌려 이를 ‘만화에 대한 전시의 유효성’ 자체를 문제 삼는 제스쳐 같다고 묘사했는데, 그 점에서 는 게임을 질료로 ‘애매하게’ 끌어들이는 김희천의 최근 영상 작업이나, 기호의 기호성을 교묘하게 유보시키는 임다울의 설치 작업과 따로 또 같이, 전시장 속 만화의 위상의 변동에 대한 ‘적극적인 유예’로서 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제스쳐가 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는가 하면 나는 아직 의문스러운데, 왜냐하면 여기서 인터랙티브 형식의 힘과 온라인 형식의 힘이 서로 멀리 떨어진 영역에서 큰 파동 없는 불화를 지속해, 전시(장)의 위상을 건드리는 수준까진 가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우 훈은 거기에 목표를 두지 않았을 지 모른다. 혹은 의 유효함을 거기서(만) 찾으면 안될 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왜 굳이 만화를 전시로 배치해야 하나?’라는 (혹 당신도 하고 싶을 지 모르는) 질문을 일부러 한참 우회한 게 아닐까? (혼재된 형식들을 비롯한) ‘전시로서 만화’에 얽힌 여러 문제들에 의도적으로 부딪혀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만화의 곤란을 수면 위에 올리기 위해. 이 전시에서 또 하나 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의 존재이다. 4~5층에 배치된 만화 중 오직 만이 책자로 만들어져 마치 게임 속 고급 아이템이나 최종 스테이지처럼 배치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전자 기기를 매체 삼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그 만화적 형식에 있어 학습만화나 신문용 ‘컷툰’을 몹시 닮았다. 달리 말해 만이 책자로 만들어져도 별 이물감이 없는 만화인 것이다.


요컨대 선우 훈은 여기서 웹툰에 어울리는 형식과 아니어도 괜찮은 형식을 그 매체로서 구분한다. 웹툰과 만화를 별개인 것 마냥, 나아가 웹툰만이 만화인 것 마냥 취급하는 최근의 ‘곤란한’ 정세에 미시적인 반항을 하듯 말이다. 에서 모니터, 프로젝터, 아코디언 책자, 관람자의 스마트폰에 이르는 만화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게끔 만드)는 것을 이런 ‘웹툰 이후’의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테다. 만화의 가능한 매체를 가능한 많이 끌어들이고 교차시켜보기. 달리 말해, 는 웹툰 이후 쉴 새 없이 변모하며 분열하고 있는 만화의 ‘불순한’ 상황에 각각의 매체들이 어떻게 만화의 그릇이 될 수 있는 지를 다만 특정 매체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으면서 모색해보려는, 또한 그 모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모험적인 시도인 것이다. 이런저런 아쉬움과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것은 바로 이 전시의 이런 시도의 성격이었다.


한데 이런 생각도 든다. 선우 훈이 ‘웹툰 이후’의 정세를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웹툰이 아직 마땅히 효과적인 이미지 생성의 방법을 갖지 못했다는 의심에 따른 게 아닐까? 웹툰을 온전히 믿을 수 없기에 이런 설치를 하게 된 거라면? ‘웹툰 특정적’이라 할 만한 만화를 줄곧 발표해온 그의 결론이 그런 것이라면 다소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뒤풀이 자리에서 선우 훈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웹툰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신 건 아닌가요?” 그러자 선우 훈 역시 조심스럽게 대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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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