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피해자에게 흔히 세상이 범하는 실수가 있다. ‘잊고 살라고, 잊어야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범죄 피해자를 만나며, 내가 알게 된 것은 분명하다. 잊고 살 수 있는 범죄 같은 건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야 한다. 그게 꼭 범인을 잡는 것만은 아니다. 범죄 피해를 겪으며 손상당한, 또는 잃어버린 존엄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다. 피해자도, 사회도 말이다.
원은지 기자가 쓴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에서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원은지 기자 편>
오늘은 반(反) 성착취 활동가를 모셨습니다. 텔레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이었죠. N번방 사건, 엘 사건, 그리고 서울대 동문들의 주도로 벌어진 딥페이크 불법 합성물 사건을 추적 보도한 ‘추적단 불꽃’ 원은지 기자님입니다.
황정은: 얼마 전이었죠. 5월 20일에 MBC 단독으로 ‘서울대 집단 딥페이크 성범죄’가 보도되면서 세상에 이 사건이 알려졌잖아요. 이튿날인 5월 21일에 원은지 기자님이 얼룩소를 통해서 이 사건의 추적기를 eBook으로 출간을 하셨습니다. 요즘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인터뷰도 하고 계시잖아요. 근황 비롯해서 건강은 좀 어떤지도 묻고 싶어요. 어떻게 지내십니까?
원은지: MBC 단독 보도가 2주 전이더라고요. 2주 동안 국내에 많은 매체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2019년에 N번방 사건 취재 관해 2020년 봄에 계속 언론사들에게 인터뷰 요청이 왔을 때처럼 굉장히 바쁘게 2주를 보냈어요. 하루에 최소한 2~3개 이상의 언론과 인터뷰를 했고 주로 이 범죄의 피해 사실과 제가 어떻게 경찰과 협력해서 범인을 검거하게 됐는지, 그 스토리 위주로 많은 답변들을 했고요.
황정은: 디지털 성범죄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나 반응이 그때(2020년)와 좀 달라졌다는 걸 체감하기도 하십니까?
원은지: 좋은 의미로 달라진 건 아닌데, 처음에 N번방 사건이 막 보도됐을 때 사람들이 ‘이런 범죄가 다 있어? 텔레그램이 뭐야?’ 하면서 되게 생소하다는 반응이었잖아요. 그리고 동시에 미성년자, 성인이 아닌 피해자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는데. 이번 사건은 그냥 ‘텔레그램에서 또 그랬구나’ 하고, 어떤 면에서는 되게 무던해진 것 같은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익숙해진 것 같은. N번방과 이 사건의 피해의 정도 차이를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단순하게 피해의 수준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런 걸 보면서 N번방도 충분히 심한 사건인데 이 사건과 그 사건을 비교하는 게 맞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황정은: 이번에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셨어요. 서울대 동문들이 저지른 집단 딥페이크 성범죄의 피의자를 추적한 기록입니다. 세상에는 이 사건이 ‘서울대 N번방 사건’ 혹은 ‘서울대 지인 능욕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잘못된 명칭이라는 점을 꾸준히 말씀하고 계세요. 왜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지, 그것부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왜 이 사건을 ‘N번방’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원은지: N번방 사건은 아동·청소년이 성학대를 당하고 성착취를 당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잖아요. 이번에 서울대 동문들이 벌인 딥페이크 성착취 사건은 피해자의 연령대가 성인부터 아동·청소년까지 다양하기도 하고, 범죄의 양태를 보면 직접 신체적인 가해를 끼치거나 물리적으로 폭행을 한다기보다는 피해자의 일상 사진에 가해자들이 나체 사진을 합성한다거나, 아니면 피해자의 셀프 카메라 영상 위에다가 자위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물들을 유포를 한다거나, 아니면 딥페이크 기술이 엄청 발전했잖아요. AI 기계를 머신 러닝을 시키는 거죠. 피해자 얼굴을 넣어서 본인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서 본인들끼리도 유포하고, 보면서 성희롱하고, 피해자들에게 보내면서 공포심을 유발한 범죄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두 범죄의 양태가 확실히 다르고요. 피해자가 느꼈을 공포나 이 사건이 왜 심각한 피해인지 주변인 그리고 수사기관에게 인정받기까지의 과정도 N번방 사건의 피해와는 또 다른 방해 요소나 어려움들이 있었거든요. 저는 이런 어려움들이 좀 더 잘 보도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N번방으로 계속 부르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경찰에서 이 사건을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을 할 때 N번방 수준의 범죄는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이 범인들의 신상을 공개하기는 어렵다 이런 맥락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N번방 급 아니라면서 덮어버릴까 봐 우려되더라고요.
황정은: 디지털 성범죄 양상이 다양해지면서 각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야 제대로 대응하고 예방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이 사건을 N번방으로 불러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왜 ‘지인능욕’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원은지: 저도 처음에는 ‘지인능욕’이라는 단어가 왜 문제인지 몰랐어요.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들 중에 ‘지인능욕’ 만 하는 부류가 있었어요. 이 부류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시청하고 소지하고 제작하는 부류와는 또 다른 결인데, 주변 여성들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사는 지역별로 가해자들끼리 무리를 만들어요. 예를 들면 ‘여의도 지역에 있는 김○○을 아느냐’ 이러면서 여성들의 신상 정보를 올리는 거죠. 그러면 여의도에 사는 이들이 모여서 ‘나 걔 알아’ 이러면서 그 여성을 희롱하는 거예요. 텔레그램 같이 안 보이는 곳에서. 가해자들이 본인들의 행위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이 범죄를 지인능욕이라고 부르고, 가해자들을 더 초대하기 위해 텔레그램처럼 좀 안 보이는 메신저가 아니라 X나 인스타그램처럼 공개된 SNS에 게시물들을 올리는 거죠. 어떻게 보면 (‘지인능욕’은) 본인들의 범죄 행위를 계속해서 함께 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용어였던 거예요. 언론에서도 이 범죄를 보도를 할 때 지인능욕이라고 그대로 보도를 했었고, 관련 기사들이 2016년 2017년부터 검색이 되는데 그때부터 언론에서 지인과 능욕이라는 단어를 한 범죄로 소개를 하면서 이 용어가 많이 쓰이게 된 것 같거든요. 수사기관이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서도 피해를 입으신 분들을 도와드릴 때 ‘지인능욕’ 이런 카테고리가 있어요. 그렇게 만연하게 쓰이고 있는 상황인 거죠. 가해자들의 관점이 담긴 언어인데. 그 부분에서 문제의식을 많이 느꼈고, 또 지인능욕이라는 단어가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이 범죄의 특성을 하나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거든요. 피해자가 느끼는 공포 아니면 피해자가 겪은 피해들을 이 단어 안에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딥페이크 스토킹 성착취’라고 하면 어떤 피해가 있을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데, 지인능욕은 너무나 가해자의 놀이 관점으로 만들어진 단어예요.
황정은: 그래서 이번 취재기를 쓰면서 ‘지인능욕 뿌리 뽑기 프로젝트’를 진행을 하셨습니다. 지인능욕이라는 이름을 대신할, 이런 사건을 더 잘 호명할 수 있는 이름을 만들어보자고 요청을 하신 거잖아요. 시민들은 어떤 명칭을 제안했나요?
원은지: 정말 많은 명칭을 제안해 주셨는데 ‘기생형 성착취’ ‘디지털 강간’ ‘망상 성범죄’ ‘능욕 성범죄’ ‘불법 성적 합성 범죄’ ‘합성 성착취 범죄’ ‘불법 합성 모욕 성범죄’ ‘디지털 성추행’ 등 되게 많은 아이디어들이 있었어요.
황정은: 원은지 기자님에게는 어떤 명칭이 알맞아 보였나요?
원은지: 음... 일단 없어요. 되게 어렵더라고요.
황정은: 저도 생각해봤는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근거리에 도착한 이름은 뭘까요?
원은지: 가장 근거리에 도착한 용어는, 이번 사건을 보도하면서 언론에서도 많이 사용한 단어가 ‘불법 합성 성범죄’인데, 이 단어도 너무 중립적이죠. 그래서 ‘딥페이크 스토킹 성착취’... 너무 다 외래어죠. (웃음)
황정은: 다 필요한 말이긴 한데, 한 번에 범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명칭이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새로운 유형의 범죄라서 그런지 정확한 명칭이 잘 생각이 안 나는 것 같아요. 제가 찾아보니까 원은지 기자님이 최근 인터뷰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그리고 ‘딥페이크 불법 합성물 성범죄’라고 말하기는 하셨더라고요. 기자님이 하신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 기사를 쓴 기자님이 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오늘 저는 이 사건을 ‘서울대 집단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이라고 부르겠습니다. 2024년 5월에 세상에 알려지긴 했습니다만, 기자님이 이 사건을 처음 안 것은 언제였나요?
원은지: 이 사건을 처음 안 것은 2022년 7월 중순이었습니다.
황정은: N번방 취재도 다 끝내고 엘 사건을 한창 취재하시던 때네요?
원은지: 맞아요. 보도를 막 준비하던 때라, 한창 원고 작업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황정은: N번방 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만 해도 시민들을 비롯해서 경찰들도 이게 무슨 일인지를 몰라서 ‘추적단 불꽃’이 애써서 사건을 설명해야 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설명을 해도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잘 몰랐고요. 수사기관들의 요즘 인식이나 대응은 어떻습니까? 이번 사건 관련해서 기자님이 느끼기엔 어땠나요?
원은지: 이번 사건은 되게 양가감정이 들어요. 수사관들 개개인이 아무리 잘해도 조직 안에서 이 사건에 온전히 집중해서 수사를 할 수 없는 분위기인 것도 너무 잘 알고, (그런데) 체계 자체가 없는 거죠. 디지털 성범죄는 특히 많은 시간이 들고 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어야 하고 전문성도 필요한데, N번방 사건 이후로 단기간에 이런 사건들이 많이 발각이 되고 있는데도 수사기관에 미흡한 점이 너무 많다 보니까, 하나하나 말하기도 너무 힘들 정도로 좀 많이 아쉬워요. 이번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직접 이 사건을 파헤치려 하고 단서를 모으려고 하고 그리고 사법 체계를 이용해서 본인 사건이 사법 체계 안에서 낙오되지 않게 계속 노력하신 점들도 있고,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황정은: 그간 디지털 성범죄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사회적으로도 이게 문제가 크다는 이야기가 꽤 있었던 것 같은데 개선이 기대만큼 많이 되지는 않은 상황이군요.
원은지: 그렇죠. 아동·청소년 성착취의 경우도 어려운데, 이건 피해자가 성인이다 보니까 ‘다 큰 성인이, 가짜 영상을 만들어서 보내줬다는데, 이거 사실 텔레그램이라 (범인을) 잡기 어려운데’ 하고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거죠. 다 큰 성인이 이런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게 가짜이기도 하니까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다, 정신적 충격이 크지 않을 것이고, 실제 성관계 영상이나 성착취물이 유포되는 것보다는 덜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황정은: 공감을 하지 못하는 거죠. 자신의 일이 될 거라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여성들은 다 알잖아요. 이 공포심. 성인이든 뭐든 간에, 다 알지 않습니까? (수사기관의) 조직 내에 여력이 없기도 하지만 일단은 공감이 많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요.
황정은: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는 전자책으로만 출간이 되었어요. 그리고 약 4천 개의 단어 분량이지 않습니까? 상당히 적은 분량인 거죠. 시기로 봤을 때 뉴스가 보도되고 바로 다음 날 책이 출간이 되었잖아요. 시의성 때문에 이런 형식을 선택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건의 내용과 취재기를 다 담기에는 아무래도 지면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는데, 기자님에겐 어땠나요?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원은지: 그렇죠. 사실 이 책이, 많은 서울대 피해자 분들 중에 루마 님과 만나는 시점부터 전개가 되잖아요. (루마 님을) 만나기 전 2022년도 7월에 제보 받았던 시점부터 쭉 전개하면 조금 더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일단 시간이 좀 촉박하긴 했고요. 어제 이 사건의 주범인 박 씨에 대한 첫 공판이 있었어요. 그런데 원래는 5월 21일이었어요.
황정은: 그러면 공판 일정에 맞춰서 책을 내신 거예요?
원은지: 그렇죠. 공판 앞두고 피해자 분들과 상의를 했을 때, 공판이 시작되면 이 남성의 사회적인 타이틀이 있으니까 법원을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좀 관심을 받을 거라는 생각도 했고, 어쨌든 보도가 한 번 됐던 사건이다 보니까 어떤 형태로든 기사화가 될 것 같은데 되게 짤막하게 나갈 것 같은 거예요. 이 사건이 그냥 간단하게 다뤄질 것 같은. 그래서 공판일에 맞춰서 빠르게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5월 2일에 발행을 하게 된 건데요. 이왕 보도를 할 건데 기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공판 일정에 맞춰서 (책을) 내보자 했던 거죠. 그런데 공판이 미뤄졌어요. 그래서 좀 아쉽긴 하지만, 이미 준비된 건데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히 미루지 말고 일단 내자고 생각하고 출간하게 됐죠.
황정은: 제목 이야기도 좀 해봅시다.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가 피의자 말을 다시 구성한 말인 거잖아요. 왜 이 말을 제목으로 삼으셨어요?
원은지: 그 말이 주범 박 씨가 피해자들이 텔레그램에 가입할 때마다 보냈던 내용이에요.
황정은: 그러니까요. ‘당신의 사진이 딥페이크 성범죄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피해자들이 텔레그램에 가입하거나 접속을 하니까 피해자가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는 거잖아요.
원은지: 네. 그 말이 초고를 검수하는 과정에서 가장 좀 꽂히더라고요. 이걸 제목으로 하면 이 범죄의 시작과 끝이 다 설명이 되는 문장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황정은: 그런 면이 있죠. 그리고 매우 징그럽습니다. 그런 말을 하기까지의 사고 과정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짚여서, 피해자 분들이 이 메시지를 받고 충격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더라고요.
원은지: 그렇죠. 피해자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고, 답장을 계속 안 한 피해자에게는 ‘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답장하면 나 잡을 수 있는 방법 알려줄게’ 이런 식의 메시지도 보내고.
황정은: 그랬습니까? 악랄하네요.
황정은: 이번 취재기를 루마 님과의 만남으로 시작을 하셨잖아요. 첫 꼭지의 글을 루마 님이 보낸 편지를 인용해서 쓰셨어요. ‘루마는 서울대 동문 집단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 중에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애쓴 사람’이라고 책에 소개를 하셨습니다. 두 분이 처음 만난 시점에는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기자님이 루마 님에게 ‘우리 같이 글을 쓰자, 지금을 기록하자라’고 제안을 하셨단 말이에요. 왜 그러셨어요?
원은지: 일단 글을 쓰는 행위는 언젠가는 이 사람을 잡을 거라는 희망을 심는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N번방 사건 처음 보도했을 때 ‘보도를 하는 행위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가해자들이 텔레그램에 가입하거나 정보가 돼서 쓰이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 보도를 결심했던 게 어쨌든 이걸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고 수사하고 있는 수사관이 있다는 걸 좀 알리고 싶었거든요. 그 후에 기자들이 새로운 취재를 해서 수사기관에 도움을 준다거나 아니면 다른 수사관이 저희에게 연락을 해서 취재했던 자료들을 제공을 받는다거나 할 때 글이 마중물이 되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N번방 사건 때 하고 엘 사건 때도 하고 ‘역시 글을 쓰는 게, 글을 남기는 게 중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지금 살아있고 피해를 입었고 앞으로도 계속 피해를 있게 한 그 놈을 잡기 위해서 뭐라도 하겠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고, 그 글이 결국엔 마중물이 되어서 저나 루마 님이나 수사관이 범인을 잡게 된 것 같아요.
황정은: 기록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더 해보고 싶은데요. ‘추적단 불꽃’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이 책을 내셨고, 한 1년쯤 후였나요? 『우리, 다음』이라는 리포트를 만들기도 하셨잖아요. 이번에 추적기도 그렇고, 기록의 힘을 굳게 믿고 계신 것 같습니다. 기자님은 기록과 글에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원은지: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마중물이 된다고 생각해요.
황정은: 저널리스트라기보다는 아웃리처로 자신을 생각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셨잖아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세요?
원은지: 그 이야기는 제가 ‘얼룩소(미디어 플랫폼)’에 들어가기 전 많이 했던 생각인데요. 제가 저널리스트의 정의를, 예전에는 기성 레거시 미디어의 기자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많이 하다 보니까, 그 분들의 일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 같아요. 그때 탐사보도 하는 분들을 많이 못 봐서 그런 건지 좀 회사원 같다는 생각을 좀 많이 들었어요. 물론 지금까지도 만나고 있는 좋은 분들 많고, 취재원과의 어떤 선을 지키는 일은 물론 지금도 어렵지만 그때 당시에 기자 분들이 계속 취재원과의 선을 잘 지켜야 하고 기자는 기사에 깊이 개입하면 안 된다는 말들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저널리스트보다는 피해자를 만나서 조금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글을 쓰고 기사를 써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만나고 같이 이야기도 듣고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는 걸 기자는 다 할 수 없으니 그러면 아웃리처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황정은: 원은지 기자님이 신문 기자를 꿈꾸면서 공모전을 준비하다가 반(反) 성착취 활동가가 되셨잖아요. 앞으로 또 어떤 자리에 계실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원은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제가 범인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알려졌잖아요. 이전에도 이런 류의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의 제보가 많았는데 근 2주 사이에 정말 많은 피해자 분들에게 연락이 왔어요. 일단 그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봐야 할 것 같고요. 사실 범인을 검거한 건 정말 운이 좋았던 거예요. 이런 운이 매번 따라주는 건 아니니까,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신고를 했으나 수사가 미진한 환경 같은 것들을 좀 더 보도를 하고 싶습니다.
황정은: 다 못한 이야기,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혹시 있을까요?
원은지: 공판이 이제 막 시작이 되었거든요. 저는 앞으로 이 사건의 공판도 계속해서 기록을 해 나갈 건데, 사실 공판 기사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류의 기사는 아니에요. 어쨌든 저도 콘텐츠 제작자로서 팔리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되는데, 제가 어떤 취재를 해줬으면 좋겠는지 의견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요. 디지털 성범죄 관련해서 궁금했던 점이나 듣고 싶은 점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저의 SNS나 메일을 통해서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