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여성들의 로맨틱한 성장기
로맨스판타지 장르가 넘어설 여성들의 읽기에 관한 편견.
글 : 손진원
202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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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삽화. 위키피디아


낭만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여성 독자의 형상은 흔히 ‘보바리 부인’으로 대표되곤 합니다. 문학 고전인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속 주인공 엠마는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합니다. 그렇지만 금방 단조로운 결혼 생활과 무미건조한 보바리 씨에게 권태를 느끼지요. 보바리 씨는 아내를 위해 이사를 하지만, 엠마의 갈증은 쉽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남자들과 밀회를 가지면서도 그랬죠. 지루한 현실을 떠나 화려하고도 열정적인 삶을 꿈꾸던 엠마의 삶은 결국 파국으로 끝납니다.

 

엠마가 현실에 권태를 느꼈던 이유는 독서에 있습니다. 수도원에 머물던 시절, 그곳을 방문했던 한 노처녀로부터 사랑 노래들을 전해 듣고, 흥미진진한 모험과 안타까운 애정 이야기들을 담은 소설책을 따라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정열, 특히 다정다감한 남자의 모습을 책에서 읽고 배워온 엠마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갈구하게 됩니다. 한갓 시골 의사의 아내, ‘보바리 부인’으로서는 실현할 수 없는 삶을요. 그래서 쥘 드 고티에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화된, 그리고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망상하는 인물형으로서 보바리 부인을 분석하고, ‘보바리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보바리 부인’은 부정적인 인물형으로 읽히곤 했습니다. 문학을 비평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는 ‘보바리 부인’과 같은 독서 방식은 폄하되었죠. 애정 이야기나 환상적인 모험에 ‘푹 빠져서’ 현실을 잊고, 소설의 내용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몰입적 읽기’의 방식은 옳지 못한 것이라면서요. 이는 도피주의적이고 영웅적 망상에 빠지는 것으로, 특히 상상력이 풍부하고 피아 식별이 어려울 아동과 여성들이 자주 하는 읽기 방식이라고 여겨지곤 했습니다. 모름지기 정확한 읽기는 소설과 독자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가능하다고 본 것이죠.

 

‘보바리 부인’을 향한 우려는 비단 서구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국은 소설을 읽는 감수성 풍부한 여성들을 ‘문학소녀’라 지칭하곤 했는데, ‘보바리 부인’과 견주어 생각해 볼만한 단어지요. 비범함을 열망하던 ‘전혜린’과 그의 수필들, 그리고 ‘문학소녀’라는 용어를 사유한 김용언은 『문학소녀』를 통해 여성의 읽기와 쓰기를 평가절하한 사회적 맥락을 짚어냅니다. 1950-60년대 ‘지성이 부족한’ 여학생들에게 문학 고전을 권장하면서도, 막상 독서에 심취한 ‘문학소녀’들의 읽기는 잘못된 것이라 보았던 것이죠. ‘감수성이 예민한’, ‘센티멘털한’, ‘미성숙한’ 어린 여성들은 작품에 쉽게 몰입하고, 현실에 도피적이 되거나, 과도한 열정에 빠져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여성은 원래 ‘감성적이므로’ 낭만적인 글들을 읽고 쓰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가정을 잘 꾸리고 관리하는 여성의 모습만 떠올리던 당시의 빈곤한 상상력은, 친밀성에 능숙하고 감성이 예민한 여성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웹소설 리뷰에 갑자기 웬 ‘보바리 부인’과 ‘문학소녀’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해하실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사정을 설명하자면, 우선 웹소설 시장에서는 독자의 성별에 따라 장르의 취향도 갈린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웹소설 플랫폼이 명시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여성향’과 ‘남성향’으로 장르를 나누어 작품을 유통하지요. ‘여성향’에는 로맨스, 로맨스판타지, BL과 같은 장르가 배치됩니다.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을 다루는 장르들이죠. 이런 까닭에, 웹소설에서 ‘여성향’ 장르들을 논하려면 여성의 글쓰기나 읽기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특히 ‘로맨스판타지’는 2000년대 후반 (지금은 남성향으로 분류되는) 판타지 카테고리 안에서 다양한 여성 주인공의 활약과 낭만적인 사랑을 주로 그려내던 작품들이, ‘로맨스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재분류된 장르입니다. 장르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중세 유럽과 유사하면서도 마법적인 힘이 존재하는 배경 속에서 낭만적인 사랑의 과정을 그려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여성 주인공은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거나 라이벌과 정치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불화하던 가족과 오해를 풀고 화해하거나, 어릴 적부터 간직해오던 오랜 꿈을 이루기도 하죠. 심지어는 육탄전으로 나라와 세상을 구하기도 합니다.


『상수리나무 아래』영문판 표지

 

한국에서의 인기를 넘어,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른 김수지 작가의 『상수리나무 아래』는 이 장르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말더듬이로 태어나 학대를 받으며 자라온 공작 영애 맥시밀리언 그리고 천한 출신에서 영웅으로 추앙을 받게 된 기사 리프탄의 이야기는 낭만적인 연애 서사이자, 두 인물의 성장과 모험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연재 당시의 댓글을 분석한 글을 살펴보면, 로판 장르의 입문작으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작품에 몰입해 인물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주인공의 성장을 응원하고, 그 과정에서 뿌듯함과 행복을 느꼈다는 것입니다.2 방안에 틀어박히거나 아버지에게 매를 맞던 맥시밀리언이 리프탄과 얽히며 세상을 배우고, 이 과정에서 마법을 배워 뛰어난 마법사가 되며, 더 나아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전하고…. 이 과정을 지켜본 독자들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행복을 위해 용감하게 걸음을 내딛는 주인공의 성장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환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이야기들에 깊이 몰입하는 독자를 향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습니다. 로맨스판타지는 이를 흥미롭게 돌파해 냅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책 속 세계로 들어가서 활약을 한다는 ‘책빙의물’이라든지, 다른 세계의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나 사랑받고 성공적인 삶을 시작해 보는 ‘육아물’처럼, 로맨스판타지는 ‘몰입하여 읽기’를 장려하다 못해 그것을 장르적 문법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을 제공합니다. 물론, 『상수리나무 아래』처럼 촘촘하면서도 디테일한 세계관 설정, 그리고 섬세한 감정선을 그려내면서 문학이 해왔던 ‘정공법’의 방식으로 승부를 거는 작품도 있지요. 원래 문학 독자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인물에 감정 이입하면서 그와 동일하게 느끼고, 자신의 일상과 내면을 돌이키면서 감동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문학소녀’가 느끼는 감동은 특수한 부류의 특이 체험이 아닌, 문학 읽기 본연의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지요.

 

일찍이 고티에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병리적인 의미에서의 ‘보바리즘’에서 더 나아가, 이것의 긍정적인 면모를 언급하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킨 바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발전하는 것이” ‘보바리즘’이라면서,3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간 성장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죠. 실제로 로맨스판타지는 여성이 스스로를 격려하고 사기를 고양하는, 여성 임파워링(empowering) 콘텐츠로서의 역할을 자처합니다. 연애 서사를 중심으로 하되, 색다른 여성 인물들을 그려내 보이고 다양한 이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주체적 여성’의 이상을 상상해 보는 것이지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의 읽기와 쓰기는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혹자는 로맨스 대신 페미니즘을 부르짖었고, 새로운 로맨스의 가능성을 점치거나 ‘여성 서사’의 문제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지칭되며 문제시되었던 ‘보바리 부인’과 ‘문학소녀’와 다르게, ‘로판 독자’는 스스로 읽기와 쓰기를 고민하며 장르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여성들의 로맨틱한 성장기, 로맨스판타지라는 장르가 궁금하시다면 『상수리나무 아래』에 한 번 몰입해보시는 것은 어떠실까요?






1 김용언, 『문학소녀』, 반비, 2017, 145-163쪽.

2 <500만 년 동안 읽힌 로맨스판타지 웹소설>, 리디

3 쥘 드 고티에, 진인혜 역, 『보바리즘』, 도서출판b, 2024,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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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저/<김화영> 역

출판사 | 민음사

문학소녀

<김용언>

출판사 | 반비

보바리즘

<쥘 드 고티에> 저/<진인혜> 역

출판사 | b(도서출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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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원

로맨스판타지 작가, 대중문화 및 장르 연구자. 웹소설과 로맨스, SF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장르 비평집 『비주류 선언』, 『웹소설 큐레이션:로맨스·로판·BL 편』, 『블레이드 러너 깊이 읽기』의 공저자이며, TRPG 룰/리플레이 북 『안녕이라 하기 전에』와 인터랙티브 픽션 제작 노트 『B사감:The New World』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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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플로베르

노르망디의 중심 도시 루앙에서 1821년 12월 12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앙 시립병원의 외과부장이고 어머니는 노르망디 태생이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였던 사실은 그가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고 세밀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열다섯 살 여름휴가 때 트루빌에서 만난 젊고 아름다운 엘리자 슐레징거 부인에게 격렬하고도 신비스러운 애정을 기울인다. 『감정교육』(1869)에서 마리 아르누 부인의 윤곽이 슐레징거 부인의 모습을 통하여 표현되어 있다. 1840년에 바칼로레아에 합격하고 파리의 법과대학에 등록하지만, 『감정교육』 초고 집필 중이던 1843년 10월에 신경병 발작 이후 법학을 그만두고 문학에만 몰두한다. 이 무렵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는다. 이후 플로베르의 인생은 여행과 친구들(특히 시인 루이 부예)이 중심이 된다. 그 무렵 ‘뮤즈’라고 불리던 여류 시인 루이즈 콜레와의 관능적 연애도 경험한다. 플로베르가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플로베르가 쓰고 있던 작품이나 문학에 관한 생각들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다. 1851년 이집트 여행에서 돌아와 『마담 보바리』 집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1857년 1월에 기소되어 경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시인 라마르틴이 변호 서한을 보내주었고 2월 7일에 무죄판결이 났다. 이듬해는 소설 『살람보』를 준비하기 위해서 튀니지를 여행한다. 1862년에는 『살람보』가 미셸 레비 서점에서 출판되어 성공을 거둔다. 5년의 시간을 바쳐 1869년에 『감정교육』을 탈고했으나, 평이 별로 좋지 않아 실망하게 된다. 그해에는 친구 부예와 동료 생트뵈브를 잃고 신경병이 재발했다. 1870년에는 쥘 공쿠르를, 1872년에는 어머니를, 1876년에는 조르주 상드를 잃었다. 만년은 『성 앙투안의 유혹』(1874) 등이 호평을 얻지 못하여 낙담했으나 『세 가지 이야기』(1877)가 좋은 평을 받았다. 또한 그가 대부가 된 모파상의 성공은 침체되어 있던 그의 만년에 생기를 주었다. 1880년 5월 8일, 뇌출혈로 급사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미완성작으로 사후에 출판(1881)되었다. 한편 아홉 권에 이르는 『서간집』은 비평가들에게 최대의 걸작으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