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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코탄 블루와 니세코의 별 헤는 밤(下)

곗돈 타서 다녀온 홋카이도의 시원한 여름휴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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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들었다. 망상이라도 좋고 환상이라도 좋았다. 빗자루로 쓸어 담은 듯한 별 무더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지구는 둥글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아마곗돈 계원들의 니세코 여름휴가 이야기 上편 보기: //ch.yes24.com/Article/View/25879

 

니세코는 물결 모양의 경사가 많은 구릉 분지다. 대중교통엔 한계가 있어 첩첩산중에서 차를 몰아야 했다. 장롱에서 면허증을 빼낸 지 얼마 안 된 나에겐 참을 수 없이 두려운 일이었다. 그 어떤 통신 신호도 잡을 수 없었던 왕복 1차선 도로 위에 놓이기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곳곳에 ‘곰 출몰 주의’라는 표지판이 나타나 서늘한 공포까지 느꼈다. 출구 없는 미로 같은 정글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어쨌거나 사흘 뒤 돌아오는 길에는, 왼쪽 다리는 접은 채 한 손으로 차를 몰 정도가 되어있었다.

 

홋카이도

 

온천 호텔에서의 하룻밤

 

‘두 종류의 슈크림 빵과 카스텔라 한 덩이, 또다시 두 종류의 푸딩과 아이스크림, 치즈 케이크 상자와 롤케이크 반 토막’을 해치우고도 여전히 먹을 게 남아 있었다. 일본식 연회 요리가 첫날밤의 주인공이었다. 현지어로 ‘가이세키 료리’, 그 어감만으로 연상할 수 있는 저렴한 욕을 농담이랍시고 낄낄거리며 호텔 식당으로 향했다. 전채(前菜)부터 디저트까지, 작고 정교하게 장식한 요리가 각자 앞에 1인분씩 놓였다. 계절에 맞는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게 묘미였다. 십여 가지 음식이 순서대로 나왔는데, 서로 다른 재료와 요리법을 사용했다. 아름다운 색과 모양은 물론, 그에 맞는 그릇 재질까지 고려한 듯했다. 오감이 즐거운 식사였다.

 

식사 시간을 빼고는 온천으로 향했다. 썩은 달걀이나 메케한 총탄 같은 유황 냄새가 났다. 노천탕은 숲 속의 높다란 언덕 위에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달 아래로 지나가는 여우의 기운 없는 그림자를 가만히 눈으로 따라가 보기도 했다. 아침에는 햇살 아래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청정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벌거벗은 몸뚱이가 부끄러우면서도 강박처럼 여행의 첫날엔 온천을 찾아 헤매곤 한다. 중독을 부르는 강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알몸이 된 사람들 사이에는 옷 대신 친밀한 기운이 등을 감싼다. 겉치레가 없으니 속세에서 얽히고설켰던 ‘뒷담화’도 쓸모없어지고, 하물며 드잡이도 쉽게 할 수 없다. 입김과 뜨거운 온천수의 아지랑이 틈으로 가벼운 말들을 주고받을 따름이다.

 

신센누마 산책길

 

니세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늪으로 유명한 ‘신센누마(神仙沼)’로 향했다. '누마(沼)'는 '습지' 혹은 '늪' 이라는 뜻이다. 눈으로 확인한 고산지대의 생태계는 신비로웠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구름이 흐르면 흘러가는 대로, 그 자체가 계절의 움직임이자 자연의 순환이었다. 우리는 산책로를 따라 원시림 속을 걸었다. 삼사십 분 정도 지났을까. 붉은 가문비나무로 둘러싸여 있던 숲길이 끝나고, 시원하게 트인 습지대가 나왔다. 이어진 길을 따라가니, 신선이 물놀이했다는 늪을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걸어온 시간만큼 앉아 휴식을 취했다. 하늘이 고인 새파란 물웅덩이 위에 오랫동안 묵혀둔 생각을 띄웠다. 늪의 바닥에는 침수 식물이 무성했고, 물은 조용히 바람 따라 교란되고 있었다.

 

홋카이도

 

기뻐하여라, 불꽃 튕기며 별 헤는 밤

 

석양이 요테이 산에 걸려 붉어질 무렵 바비큐를 시작했다. 두툼한 고기와 새우도 맛있었지만, 채소를 구워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니세코의 흙에서 자란 호박, 옥수수, 양파, 감자 따위가 밤새도록 먹음직스럽게 익어갔다. 마지막 날의 파티는 새벽 두 시경, 강력한 산모기 떼의 습격으로 끝이 났다. 우리는 부스러기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숯을 피워댔다. 왜 그렇게 불에 매료되었는지는 어느 철학자의 말에 기대어 유추할 수 있었다. 가스통 바르슐라는 ‘불은 극단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며,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 부여를 분명하게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현상’이라고 했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절로 동했던 것일까? 불콰한 낯빛으로 아무 반주도 없이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새벽 숲을 뛰어다니는 풋내기 어린 짐승들처럼.

 

홋카이도

 

청정지역 니세코의 밤하늘은 별천지였다. 하늘 문이 열리자, 대지보다 드넓고 불꽃보다 강렬한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별들은 정체 중이었고, 그 사이를 별똥별이 무법자처럼 질주하다 사라졌다. 우린 한껏 목을 꺾어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둥그런 지구 위의 한 점에 기대어 앉아 우주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들었다. 망상이라도 좋고 환상이라 해도 좋았다. 빗자루로 쓸어 담은 듯한 별 무더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지구는 둥글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그리고 별 하나에 시’를 떠올렸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 발췌)

 

아 기뻐하여라, 그대는 여기 혼자 있는 게 아니고 / 별빛 속에 수많은 나그네들이 길을 가며 / 또 그대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_ 한스 카로사, <옛 샘> 중에서

 

여행에서 돌아온 뒤 며칠 동안 근육이 쑤시고 아팠다. 힐링 여행의 여파는 꽤 강렬한 것이었다.

 

 

 

 


[관련 기사]

- 홋카이도 남동부 해안도로 1박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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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에서 지진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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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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