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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사라지지 않는 소녀 시절에 대하여

열다섯 살을 떠올리면 킥킥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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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 번째 이유로 나는 제일 바빴다. 연애편지였다.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 내 고향 P시에서 이름 좀 날렸던 킹카와 양아치들이라면, 한 번쯤은 내가 쓴 연애편지를 받아본 적 있을 테다. 나는 P시 D여중, 사랑에 빠진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숱하게 대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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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때 나는 무척이나 바빴다. 거기엔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하이틴 로맨스였다. 삼중당 문고에서 나오던 연애소설 시리즈. 나는 그 낯간지러운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위험한 바캉스』, 『라이언의 봄방학』, 『사랑의 섬』등등 제목만 보아도 내용이 대충 그려지는 그 소설들에 열광하면서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 무엇이냐 물으면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던 시절이었다. “『지와 사랑』은 원래 제목이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야.” 라고 얄밉게 아는 척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하이틴 로맨스 시리즈 중에는 제목이 『판결은 침대에서』라는 책도 있었다. 아아, 어떤 줄거리였을까. 어떤 이야기기에 제목이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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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빴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 하이틴 로맨스를 본 딴 소설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도 딱지 모양으로 접은 쪽지를 내게 던졌다. ‘소설 언제 다 써?’ ‘이번엔 내가 제일 먼저 볼 거야. 딴 애 주지 마.’ 그런 내용들이었다. 나는 노트에다 빽빽하게 눌러썼다. 금발의 외국여인이 주인공인 소설도 썼고 우리 같은 깜장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나오는 학원물도 썼다. 담 너머 남자중학교에 다니던 중병아리 같은 녀석들 말고, 매력이 철철 넘치는 남자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밤마다 연필을 입에 물고 골몰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줄을 서가며 내 소설을 돌려보았다. 나는 베드신도 곧잘 섞어 넣는 열다섯 살이었다.

 

사실 세 번째 이유로 나는 제일 바빴다. 연애편지였다.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 내 고향 P시에서 이름 좀 날렸던 킹카와 양아치들이라면, 한 번쯤은 내가 쓴 연애편지를 받아본 적 있을 테다. 나는 P시 D여중, 사랑에 빠진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숱하게 대필했다. 친구들은 내 책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자신이 어떻게 그 녀석과의 사랑에 빠졌는지, 지금 얼마나 잠 못 이루고 애달파하는지, 앞으로 그 사랑을 얼마나 지속시킬 계획인지 줄줄이 고백했고 나는 그걸 바탕으로 간질간질 달콤달콤한 편지를 써주었다. 답장이 빨리 도착하면 나는 딸기우유나 버스회수권 같은 물질적인 보상과 더불어 일진들 가득한 어두운 굴다리 밑을 지날 때에도 언제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답장이 도달하지 않으면 물론 그 닦달을 다 감내해야 했지만 말이다. 하도 많이 썼으니 어떤 킹카들은 다른 이름으로 도착했으나 문장이 똑같은 편지를 받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컴플레인에 시달려본 적은 없으니 그 녀석들도 대충 읽은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내 문장을 못 알아들었거나. 그래도 공들여 쓴 건데 나쁜 녀석들. 어쨌거나 내 대필 연애편지의 답장률은 90%를 충분히 넘겼다.

 

나는 홍콩배우 유덕화에게 보내는 편지도 대필해 주었다. 한 달쯤 지난 후 답장이 도착했다. 학교로 도착한 답장을 받은 친구는 실신을 했다. 그 애는 정신을 차리고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답장을 다시 꺼내 읽고 또 실신을 했다. 답장이라 해봐야 매니저가 대신 써주었을 것이 빤한데도 그것만으로도 청카바 그 애는 나에게 몇 번이나 충성을 맹세했고, 실제로 키 작은 새침떼기였던 나를 찝쩍 대는 덩치 큰 일진 아이들을 매번 막아주었다.

 

그렇게 열다섯 살을 떠올리면 킥킥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내가 쓴 소설이 궁금한 건 아니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를 그 노트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만약 옛 친구 중 하나가 이제 와 “서령아, 그 소설 내가 가지고 있어.” 한다면 나는 복면을 하고 그 집에 몰래 숨어들어가 노트를 훔친 후에 끝끝내 폐기시켜버릴 테다. 이제 중년이 된 킹카나 양아치 녀석이 내가 썼던 연애편지를 아직 가지고 있다 해도 나는 기어코 그 편지를 찾아 불살라 버릴 거다. 부끄럽고 간지러운 소녀 시절. 1988년은 옛날 그 자리에서 잠자코 사라져야 한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이 쓴 『속죄』의 주인공은 열세 살의 소설가 지망생 브리오니다. 스스로가 조숙하고 똑똑하다고 믿었던 브리오니가 내뱉은 한 순간의 거짓말로 언니 세실리아와 그의 애인 로비가 끝내 비극으로 치닫는,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소설이다. 잠자코 사라지지 않았던 인생의 어느 한 장면이 나머지 생애들을 어떻게 장악하는지 이 소설은 하나하나 까발려준다. 부커상 수상작가(『채식주의자』로 한국 작가 한강이 받은 맨부커상이 바로 부커상이다. 부커상은 맨부커상의 옛 이름인 거다.) 이언 매큐언의 이 소설은 <어톤먼트>라는 원제로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예민하고 여리고 아직은 보드라운 소녀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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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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