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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 불안한 미래는 영혼을 조각낸다

이수연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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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용 식탁>에서 여성은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는, 아니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볼모 잡힌 존재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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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결정적 대목을 유추할 수 있는 문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포물은 시대가 처한 불안 요소를 반영하는 장르다.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위기는 무엇일까. 불안한 미래다. 모든 이슈를 뒤덮은 국정 농단 사태는 차치하고 노골적인 신분 사회가 공고히 된 상황에서 위로의 계층 이동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썩은 동아줄 신화(?)가 되었다. 신분상승은 언감생심, 오히려 한 번 실패가 영원한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 난다.

 

승훈(조진웅)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강남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했던 잘 나가는 내과 의사였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냈던 탓인지 빚이 늘어나면서 병원은 도산하고 그 여파로 아내와 이혼까지 했다. 지금은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선배가 운영하는 병원에 취직한 상태다. 병원 근처에 원룸을 얻은 승훈의 주인집은 건물 1층에서 정육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집의 치매 할아버지 정 노인(신구)이 승훈의 병원으로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온다.

 

정 노인은 검사를 받던 중 가수면 상태에서 “팔다리는 한남대교에, 몸통은 동호대교에” 섬뜩한 내용의 혼잣말을 내뱉는다. 안 그래도 그날은 한강에 머리 없는 여자 시체가 떠오르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터였다. 게다가 승훈이 새로 생활하게 된 이 지역은 한때 미제 연쇄살인 사건으로 유명했다. 혹시나 정 노인이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던 차 승훈을 만나러 왔던 전처가 실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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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은 이수연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전작 <4인용 식탁>(2003) 이후 무려 14년 만의 신작이다. <4인용 식탁>을 본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꽤 좋았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지난해부터 한국 영화계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수연 감독은 훨씬 더 전에 이미 가족 해체에 대한 책임을 여성, 그러니까 모성에 넘기는 이 사회의 모순을 공포물로 은유한 적이 있다.

 

<4인용 식탁>에서 여성은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는, 아니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볼모 잡힌 존재로 묘사된다. 아동학대, 생활고 등과 같은 가정 문제를 모두 끌어안고 밖으로는 별문제 없는 척 위장해야 하는 모성은 남성 중심 사회의 방어 기제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강제적으로 얼어 있어야만 하는 존재, 그 얼음이 녹아서 풀어져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나는 이 사회의 어두운 면. 이수연 감독의 세계관은 그렇게 ‘해빙’이라는 영화의 제목과 맞닿아 있다.

 

한강이 녹자 떠오르는 머리 없는 여자 시체의 정체는 사실 <해빙>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불러일으키는 악몽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은 다름 아닌 승훈이다. 전처의 실종, 정 노인의 살인 고백, 정육 식당 냉동 창고에 숨겨져 있는 의심스러운 검은 봉투, 그리고 스토킹하듯 승훈 주변을 배회하는 정체불명의 전직 형사.

 

녹은 얼음 위로 불어나는 강물처럼 일상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하자 승훈은 공포에 휩싸인다. 근데 ‘일상’이라는 단어, 뉘앙스는 아무 일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지칭하는 것 같지만, 불안한 나날들이 만성이 된 상태라면 어떨까. 아무 일 없는 듯 굴어도 승훈의 일상은 망가진 지 오래다. 서울 강남에서 지방 신도시로의 좌천, 병원 원장에서 직원으로의 강등, 어엿한 가장에서 초라한 혼자가 된 이 남자는 지금 추락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일상을 방어 기제처럼 발동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각자도생으로 얼어붙게 한 신자본주의의 첨예한 경쟁 논리는 불안과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동면시켰다. 행여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경우, 이를 패배와 추락이라고 생각해 웬만하면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한국 사회의 많은 구성원은 나는 누구인가, 잊고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니 분열하기 시작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불면증과 인격장애 등과 같은 정신적 질환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승훈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승훈과 전혀 무관한 것일까. 가해자로 비치는 정 노인도, 피해자로 보이는 전처도, 이를 조사하는 전직 형사 출신의 남자도, 한강 위에 떠오른 머리 없는 여자 시체도 모두 승훈을 구성하는 조각난 형태의 총합이 아닐까. 그렇다고 승훈이 <23 아이덴티티>의 주인공처럼 다중 인격을 가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승훈은 결국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영혼을 잠식당하고 있는 대다수 우리이기도 하다. 연쇄살인 사건은 그런 불안정한 감정이 폭발하여 드러난 최악의 케이스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안이 괴물을 양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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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허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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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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