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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일을 믿지 않기

그가 누구인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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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울고 싶어진다. 내겐 언제나 좋았지만, 누군가에겐 악마처럼 폭력적이었다는 사람. (2018.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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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술자리에서 그는 진지했다. 그리고 웃겼다. 진지하다가 웃기고 웃기다 진지했다. 그는 극 연출을 하는 사람, 쓰는 사람, 몸을 사용해 무대를 거니는 사람이었다. 셋 중 두 가지는 나도 경험해 봤으므로 우리는 잘 통했다. 독일 무용가 피나 바우쉬에 관해 대화할 때는 특히 좋았다. 나는 피나 바우쉬 때문에 취미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고, 그는 피나 바우쉬에게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아본 사람이었기에 대화가 즐거웠다. 우리는 예술가를 지원하는 레지던스에 입주한 작가로 만나 세 달 동안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친해졌다. 군인들처럼 같은 시간에 모여 밥을 먹었다. 산책을 하고, 이따금 맥주를 나눠 마셨다. 술에 취해 기분이 한껏 좋을 때면 나는 다리 찢기(스트레칭)를 보여주기도 했다(이것은 내가 흥청망청 취했을 때, 좋아하는 친구들 앞에서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것 봐요, 어때요? 일자로 찢어졌나요? 잘하죠? 지금 생각하면 취한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 낯이 뜨거워지지만 그는 ‘진지하게’ 잘한다고, 아주 잘한다고 말해주었다. 그곳에서 만난 시인, 소설가, 동화작가, 번역가, 극작가, 만화가들과 친분을 나누는 일은 마냥 재미있었다. 나는 그들과 우정을 나누는 틈틈이 산문집 ‘소란’의 초고를 썼다.

 

세 달은 금세 지나갔다.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후 그곳에서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고 몇 달 뒤 책을 냈다. 어느 날 레지던스에서 함께 지내던 작가가 그에 대한 소식을 전해왔다. 나쁜 소식이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했던 작가 중 한 명에게 나쁜 짓을 했다는 얘기였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레지던스에서 퇴소한 후 나는 그와 거의 연락하지 못했지만, 곧 올린다는 공연을 보러 가기로 약속해놓은 상태였다.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로 그가 연출한 공연을 관람했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서로의 눈빛에서 의혹과 괴로움, 불안감을 읽었을까? 그 공연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보지 않았다. 3년 전 일이다.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두려웠다. 그가 그토록 어둡고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봐, 혹은 알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척도는 무엇일까? 보지 못한 것을 믿어도 될까? 들은 것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있다면, 진실은 어느 정도 훼손되는 걸까?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어느 정도 온전한 걸까?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울고 싶어진다. 내겐 언제나 좋았지만, 누군가에겐 악마처럼 폭력적이었다는 사람. 그는 내게 절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동작을 직접 보여주었다. 자신의 용기 없음으로 깨진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레지던스에서 며칠씩 방문을 걸어 잠그고 묵언수행을 하고, 산책길에 농담을 던지고, 퇴소하는 날(그는 며칠 일찍 퇴소했다) 남은 이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남겨놓고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에 떠났다. 나는 그를 수도승 같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다. 맑음, 정의, 선의, 동정, 바름도 있지만 욕망, 악의, 질투, 폭력성, 치졸함, 비겁함, 두려움도 ‘같이’ 있다.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가 누구인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다만 믿어지지 않는 일을 믿지 않을 자유가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겨우 생각할 뿐.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지 않기로 하고, 지금까지 종종 앓을 뿐이다. 앓는 이유도 모르면서. 어쩌면 믿음은 거짓까지 믿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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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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