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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속히 나빠지지 않도록

<월간 채널예스>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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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품고 다니는 무사처럼, 나는 겨우 도장이나 가지고 다니는 사람인 것 같다. (2018.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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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아름답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에게 가족은 그저 하나의 단위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한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나는 습관처럼 그날의 배우자를 후배와 동격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 그날의 주인공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며, 역시도 절대 모르는 영역일 것이, 결혼한 사람은 파도에 몸을 실어야 하지만 그 주변의 사람은 여파에 몸을 흔들어야 하기 때문.

 

내가 어떤 식으로든 한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끌림과 시간의 쌓임에 의해 벌어진 절친한 관계이겠지만, 그 사람이 맞이한 남편 혹은 아내 혹은 아이까지 포함한다면 그것은 쉽지 않다. 그전처럼 혼자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내와 아이까지 만나야 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힘들고 만다. 어렵게 만든 시간인데 뭔가에 집중한 것도 아닌데다가, 이것저것 신경 쓰다보면 만신창이가 되는 형국.

 

‘가족’하면 우선 떠오르는 두 개의 일화가 있다. 물론 아주 힘이 들었던 경우였다. 동년배 작가의 시상식 뒷풀이 자리였다. 문단에서는 문학상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어지는 경우가 100%. 술집의 상황에 따라 테이블은 떨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테이블에 따라 이야기는 각양각색으로 이어지기 마련. 물론 술자리의 테이블 사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엉망이기 마련인데, 그날 주인공인 작가의 아내로 추정되는 처음 본 사람이 나에게 호통을 친 것이다. 문제는 그날 수상작이 실린 책 한 권을 모든 하객들에게 증정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고 내가 대화를 하던 중에 수상작품집을 꺼내 보다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이 두 번째 문제라면 문제. 맥주 피처에서 흘러내린 물기에 그 책 표지가 젖은 걸 보고는 작가의 아내가 불쑥 다가와 하는 말은 이랬다.

 

“아니, 이 책이 어떤 책인데… 책이 다 젖었잖아요.”
“아, 미안합니다. 제가 모르고 그만…”
“조심하셨어야죠. 오늘 문학상 받은 수상작이 실린 책이잖아요.”

 

내가 잡아 든 책을 그녀가 다시 잡아채더니 자신의 옷소매로 한번 닦은 뒤, 받으려고 내민 내 손을 무시하고 내 옆 자리에 던지듯 놓고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마음이 급속히 나빠졌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날이 되어서야 작가의 아내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저러려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니, 이 책이 어떤 책인 줄도 알고 당신 남편이 대단한 것도 알고 상금이 많은 것도 알겠는데, 난 여기 올 시간이 안 되는데도 애써 축하해 주려고 왔어. 그러니까 나는 노력 중인 거라고. 책에 뭐가 묻었든 그 책은 내 책이잖아. 당신 남편이 상을 받은 것이, 이렇게 당신 남편보다 못 쓰는 나 같은 작가가 있어서 나 대신 남편이 상을 받기도 한 것이니 그렇게 당당하게 나를 꾸짖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따위의 구린 감정을 참느라, 그럼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느라 고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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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음악하는 남자 후배의 아내에게 연락이 온 것인데 몇 번 같이 어울리긴 했었지만 대뜸 ‘한번 보자’는 거였다. 후배가 출장중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후배가 돌아왔나 싶어 후배도 동석을 하는 건지 확인을 할까 하다가) 내게 직접 연락한 것을 존중하자 싶어 의무를 앞세워 그냥 나갔다. 만나자는 이유는 단지 ‘시인하고 술 한잔 해보고 싶었어요’ 라는 것.

 

헛… 음… 이 역시도 존중할 부분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심은 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싶어 시 이야기를 조금 꺼냈지만 내가 후배에게 전해준 시집은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것 같았고,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시인도 화장실에 가냐’며 전근대적인 흉한 질문을 하길래 질식할 것 같아 한숨만 쉬다가 자리를 급히 마무리했던 기억. 보통의 사나이들은 이런 경우, 집에 돌아오면서 벽에다 주먹을 친다는데 나는 내 손이 아까워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

 

결혼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파문을 일게 하는구나. 이전과는 달리 감당해야 할 것들이 관계의 뿌리를 뻗어나갈 수 없게 만들고 마는구나. 그 후로 그 두 사람만 보면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아내의 얼굴들과 마주 앉은 기분이 들면서 큰 새가 부리로 심장을 콕콕 쪼는 듯했다. 나는 그 일로 (무시해도 된다면 아내는 빼고) 나와 직접 연관된 두 사람의 점수를 약 60점이나 깎아내렸다. 그렇게까지 하는 나라는 사람도 참 10점도 안 되는 인간이구나 싶은 것이, 나는 어떠한 사람하고도 살지 말아야겠구나 싶은 것이, 약속을 한 사람이 갑자기 가족 때문에 못 나오겠다고 하면 마음이 쓰라린 것이, 예민하고 명민하던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부터 감각을 어디 도둑맞기라도 한 것인지 갑자기 곰처럼 둔해져버린 사람을 못 참겠는 것을, 고개 끄덕이며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글쎄… 나는 나를 곰곰 생각하다가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결혼하지 않아서겠는데. 그전엔 전혀 안 그랬던 사람이 가족을 만들고 나서 연락이 없거나 연락조차 끊어버리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래, 단지 삼각구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 원해서 삼각을 만드는 경우는 없다.

 

삼각만큼이나 관계에 있어서의 수직도 싫다. 관계에 있어 감정의 비율 또한 ‘나란히’가 좋다. 감정의 비만도 싫다. 그러니 나는 내 옆에 나란히 무엇을 두어야 할까.

 

칼을 품고 다니는 무사처럼 나는 겨우 도장이나 가지고 다니는 사람인 것 같다. 그 도장으로 내가 만나야 할 사람임을 정하고 사랑할 사람인가를 리스트 안에 들여놓기도 하지만, 그 도장을 사용해 더 이상 피로감 때문에라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구분하고 떼어낸다. 하지만 그런 도장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진 도장의 인주가 특별히 조금 진한 것일 뿐. 그것이 나의 ‘위태롭지만 달콤한 혼자만의 시간’을 지키기 위한 철학나부랭이쯤이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세상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뿐이다(I’m just trying to see the world from different angles)’ 라고 했던 닉 나이트(Nick Knight)의 말은 나에게 “나는 단지 세상을 좀더 지독한 혼자로서 바라보는 것뿐이다”로 바뀐다. 지독한 혼자라서 하늘이 유난히 푸르게 보일 것이고, 음악이 저릿저릿하게 들려와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것이고, 자유는 무자비하게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랄 맞은 혼자인 채로 혼자가 아닌 세상 모든 이들에게 왜 혼자가 아니냐는 물음은 참을 것이다. 그 어떤 결과를 바라서는 아니겠지만 나는 이 가을을 좀더 잔혹하고 괴팍한 외로움으로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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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병률(시인)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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