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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무모한 희망에 관하여

그간의 우정을 담아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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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입은 너무 소극적인 표현 아닌가요?”라고 당신은 또한 물었지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2019.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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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입하는 편집자. 그러니까 오늘부터 쓰게 될 이 길고 지루한 편지의 주제는 바로 그 무모한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수현,

 

“세상과 출판산업의 비관과 모순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랑하고 열망하여, 편집자란 업業과 편집자의 삶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이들을 초대합니다.”

 

새로운 지평이라니, 이런. 다시 꺼내 읽어 보니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불과 한 문장에서 비관과 모순과 절망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지평의 가능성으로 마무리되는, 한껏 경도된 선동에도 불구하고 ‘틈입하는 편집자’라는 제목의 이 강좌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4주간의 모임이 끝나고 또 다른 이들과도 비슷한 주제로 두어 차례 더 진행했으니까요. 당신과의 우정은 그때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한 출판사에 입사했다고,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후 당신이 만든 첫 번째 책을 들고 찾아온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날들, 당신의 표정들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다시 3년이 흘렀고 당신과의 우정은 조금 더 견고해졌습니다. 그새 저는 한 차례 이직을 했고 당신은 이제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3년차 편집자입니다. 얼마 전 제가 퇴사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가장 먼저 찾아온 것도 당신이었지요. 드디어 밥을 살 기회라고 하면서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은 우리네 업과 삶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책, 오로지 그것”이라고, 제가 당신에게 말했다고 했지요. 그날 늦은 밤, 당신이 내게 보낸 메일에 그 문장을 다시 적어놓은 덕분에 그 문장을 저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말은 비관 섞인 푸념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당신들에게, 우리네 업과 삶에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날은 그런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푸념하며, 그러니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건 기껏 우리가 만들어낼 책밖에 없으리라는 비관이었지요. 당신은 저의 비관을 호기로운 낙관으로 바꿔 읽었지요. 즉 편집자란 직업과 편집자의 삶은 여전히 비관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책에는 희망을 걸 수 있다는 것.   

 

틈입하는 편집자. 그러니까 오늘부터 쓰게 될 이 길고 지루한 편지의 주제는 바로 그 무모한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의 전복은 대체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자이면서도, 언젠가 도래해야 할 세상은 끝내 긍정해내는, 그리하여 내가 만든 책으로 세상에 작은 균열을 내고자 하는 틈입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틈입하는 편집자’ 모임을 마친 늦은 밤이면 꼭 메일을 보내왔었는데, 첫날의 메일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대한 강의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첫 시간부터 저는 좌절하고 있어요.” 아마 저는 여러 비관적 지표와 전망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을 겁니다. 책의 연간 발행 종수와 판매 추이, 출판사 대비 신간 발행 종수, 1인당 구매력 같은 숫자들을 나열하며 출판산업의 비관적 전망을 보여준 후, 출판 노동자들의 연봉 수준과 빈번한 이직률, 열악한 노동환경, 후진적인 출판 유통 시스템, 비상식적인 경영자들 사례, 내가 만든 책의 지향과 내가 처한 노동 현실 사이의 괴리감, 사십 대 편집자의 소멸과 1인 출판사의 등장 원인, 1인 출판사의 현실과 미래, 프리랜서 편집자들의 노동단가 등을 아주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게다가 천연펄프 생산량과 ‘2초마다 사라지는 축구장 만한 면적의 원시림’을 들먹이며, 무고한 나무들의 희생을 담보 삼아 꼭 책을 만들어야겠냐고 애꿎은 당신들의 죄책감을 자극했었지요. 그러고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산업직종을 찾아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날의 메일에서 “나의 희망이 모욕당한 것 같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모욕을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해내야 편집자로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저는 다행이라고 회신했지요. 당신과 나의 우정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가능했을 겁니다. 모욕당한 자의 연대야말로 무시무시하거든요.

 

“'틈입'은 너무 소극적인 표현 아닌가요?”라고 당신은 또한 물었지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단어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회를 타서 느닷없이 함부로 들어가다.” 기회를 엿보는 것은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가능성이나 확률로 바꿔도 되겠지요. 대체로 우리는 희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제 사랑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간혹 마음이 아파옵니다. 저들의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재잘대는 미래의 희망은 대체로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편집자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무지 희망을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를 엿보아야 합니다. 기회를 엿본다는 것은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막연한 낙관론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숫자로 계수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기회를 엿본다는 것은, 기회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하고도 부지런한 의지이기도 합니다. 기회를 만들어내는 자들은 숱한 모멸을 견디면서 무수한 비관의 확률을 계산해낸 이들입니다. 비로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놓치지 말고 우리는 ‘느닷없이’ ‘함부로’ 실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망해왔던 희망들을 말입니다.

 

수현, 오늘의 편지에 당신이 어떻게 응답할지 궁금합니다. 이제 비관에는 제법 익숙해졌으니 3년 전 했던 이야기들의 반복은 이제 식상하다고 웃을 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지금쯤 당신은 비관을 이겨내고 있는데 저의 비관은 도리어 점점 짙어지고 있으니, 이젠 당신이 저를 자극하고 견인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명민한 편집자라는 것을 잘 압니다. 당신은 이직을 고민하는 3년차 편집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진심으로, 그간의 우정을 담아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요. 더 늦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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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진형(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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