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만큼 우리나라 문단에서 이색적인 기록을 많이 보유한 작가가 또 있을까?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최연소 신문 연재 소설가,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 책 표지에 사진이 실린 최초의 작가. 타이틀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21세기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작가, 세계를 겨냥해 제작될 영화에 이야기와 상상력을 제공한 최초의 한국 작가. 그의 화제작 『상도』는 올 가을 MBC에서 <허준> 제작팀에 의해 만들어져 방영될 예정이다. 스타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가 최인호를 논현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계적 감각, 새로운 인물상
빨간 스웨터와 감색 마이를 차려입은 모습에서 뿜어 나오는 만년 청년의 생동감이 눈가의 주름에서 보여지는 깊이와 멋지게 앙상블 된 그와의 만남은 8월 1일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海神>으로 시작된다.
“<海神>은 우리나라 역사상에 해상왕이라고 알려져 있는 장보고에 대한 소설입니다. 2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소재였어요. 중국과 일본에서 자료조사를 해 보니까 알려진 것에 비해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더라구요. 장보고는 일단 뛰어난 무장이고 무역왕이지만 진짜 매력은 그 당시에 당나라, 일본, 한국, 저 멀리 페르시아까지 상권을 연결한 국제인이었다는 거예요. 난 그게 좋았어요. 세계인이라는 것.”
작가 최인호가 보는 21세기는 경제의 시대이다. 경제의 시대에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좁은 한반도에서 아웅다웅하며 살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한 마디로 세계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장보고는 우리 나라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계인이었다. 작가는 장보고를 미래의 인물상으로 젊은이에게 보여주고 제시하고 싶어 한다. 『상도』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본받을 만한 역사적인 상인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기업인들에게 들으면서 `상도'를 몸소 실천하는 인물 임상옥을 부활시켰다.
`세계적 감각'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달콤한 인생』에 수록된 단편 「몽유도원도」로 이어진다. 「몽유도원도」는 지난 7월 첸 카이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고 발표된 바 있다. 첸 카이커는 장이모와 함께 중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중국 5세대' 감독의 선봉장이며, 1992년 <패왕별희>로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거장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감독. 음악은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 음악상을 함께 수상한 일본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기로 했다. 작가는 한, 중, 일의 예술가들이 모여 “탈아시아”적이며 “세계적인 감각”을 가진 작품을 만든다는 것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가에 불을 붙이며 “첸 카이커 감독, 눈빛이 아주 예리하던데요?”라고 말하고,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내친 김에 『상도』 이후 작가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것 같다고 운을 띄어 본다. 『상도』의 성공, 20년 만의 소설집 출간, 새로운 소설 집필 시작, 작품의 드라마화와 영화화.... 작가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다며, 겸손해한다. 하지만 봄이 되어야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불교의 시절 이론을 말하는 모습에서 열심히 씨를 뿌렸을 그의 봄 시절을 떠올려본다. “하다 보니 이렇게 갑자기 열매를 많이 맺게 되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작가는 지금 문학 청년이었을 때보다 글에 대한 열정이 더 강해졌고 글을 쓰는 즐거움도 더 많이 느끼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열심히 글을 쓸 거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소설집 『달콤한 인생』
『별들의 고향』으로 70년대를 평정하고, 이후 『길없는 길』『왕도의 비밀』『상도』 등 연이은 안타와 홈런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작가가 되었지만 사실 그는 「타인의 방」「깊고 푸른 밤」등의 빼어난 단편으로 문단에서 촉망 받는 작가였다. 그의 말마따나 “『별들의 고향』이 작가의 팔자가 되어” 이후 마라톤을 주로 띄어 온 그가 모처럼 100m 스프린터가 되었다.
『달콤한 인생』에 실린 여섯 작품 중 「이별 없는 이별」은 죽은 누이에게 보내는 헌사로서 100% 자전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저주 받은 운명이다. “관찰자며 일종의 아웃사이더이고 이방인”인 작가는 어떤 상황에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그 곳에 끼여들 수가 없다. “누나가 죽었다고 작가가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면 그건 작가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라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작가의 그러한 운명은 비극이자 특권이기도 하다. 내 누나의 죽음에 마냥 슬퍼하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겠지만 또한 누나를 통해 사람들이 자기 누나를 한번쯤 생각해보고 가슴 뭉클해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소설은 성공한 셈이며, 그 자체가 작가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달콤한 인생」은 제목이 좋아 표제작으로 냈다. 원래 제목은 <아름다운 인생>이었는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이탈리아 영화에서 제목을 따왔다. 작가는 대하소설에 해당하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단편소설에 담아보고 싶었다. 아무리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인생이라 하더라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지하철 몇 정거장, 그 정도 스쳐 지나갈 만한 낯선 풍경에 지나지 않”으며, “고통은 쓰라리지만 한 발자국 물러나 보면 달콤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지금 연재하는 <海神>과 집필 예정인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일대기를 마무리하면 다시 중,단편을 쓰고 싶어요.” 문학평론가 우찬제의 말처럼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갱신하며 소설의 깊이를 추구”해 온 작가 최인호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씨 뿌리기 작업을 하고 있다.
최인호의 진면목
1986년 『잃어버린 왕국』을 시작으로 『길 없는 길』『왕도의 비밀』『상도』 등 역사소설을 계속 써왔지만 사실 작가는 “역사에 관심이 없었고 역사소설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작가가 말하는 자신의 특징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를 떠나 본 적이 없는 `도시 작가'라는 것.
“사실 우리나라에는 도시 작가가 드물어요. 보통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구. 그들은 서울에서 타인이라구. 항상 그들에게 서울은 묘사되고 있지만 그들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그러니까 하숙생의 눈으로 서울을 보는 거라고. 나는 아니야. 나에게 있어 서울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도 아니고 그저 삶 자체라고. 그 점은 『별들의 고향』에서부터 나타나죠. 경아는 서울에서 산다고. 골목에서 살다가 골목에서 죽어나지. 「타인의 방」을 쓸 때만 하더라도 서울에 아파트가 마포아파트 하나 밖에 없었어요. 난 그 때 아파트에 살지는 않았지만 아파트에서의 삶을 썼다?. 그 소설을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가 않아. 왜냐하면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아파트 생활이니까. 나에게 있어 광화문, 나에게 있어 남산, 나에게 있어 한강은 말하자면 삶의 근원이라고.”
도회성의 장점은 균형감각이며, 그것은 일면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의 도시적 감각은 『달콤한 인생』에 수록된 「이상한 사람들」에도 잘 보여진다. `포플러' `침묵은 금이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 그리고 이번에 새로 삽입한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로 이루어진 「이상한 사람들」 전편은 마르케스적인 몽환성과 환상성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진면목이에요. 내 소설이 사실 모두「이상한 사람들」처럼 몽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상도』에도 그런 면이 있어요. 내가 리얼리즘적인 작품을 쓴다고 하더라도 거기엔 어쩔 수 없이 몽환적인 면이 들어가 있어요. 「깊고 푸른 밤」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은 내 작품의 체질적 특징이니까. 그게 바로 최인호의 특징이에요. 매력일 수도 있겠고.”
작가 최인호의 도시적 감각이 소설에는 초현실적인 면모로 등장했다면 그의 인생에서는 개인주의라는 정치적 입장으로 나타났다. “너에게 관여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한테 관여하지 말라”를 주장하는 개인주의자 최인호는 1970년대의 문단에서 반체제와 체제 간의 싸움이 있었을 때 철저히 `비체제'로 일관했다. 그것을 그는 작가적으로 손해를 본 부분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비체제라는 것이 체제 쪽에서 보면 퇴폐주의자이고, 반체제에서 보면 기회주의자이자 상업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자적 면모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특징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 몸을 의탁할 `적'이 없이 항상 혼자 떠돌 수 밖에 없어 외롭지만 대신 외로움은 정신적 자유를 주었기에 그는 행복하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는 100% 자유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 작가는 “그것은 아주 위대하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을 때 그럴 수 있지. 정말 도통해야지” 하며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린다. 그리고 가늘게 눈을 뜨고 창문 밖 먼 산을 바라본다. 나는 비밀을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예의 그 장난기 어린 웃음을 역시 입가에 머금고 말이다.
작가는 요즘 아침 6시에 일어나 근처 청계산에 다녀온 후 작업을 하고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드는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진다”며 30년 동안 함께 살아온 “마누라와 텔레비전 보고 탤런트들 욕도 하며” 둘이서 논다고 한다. 컴퓨터로 작업한 글은 “마치 기계로 만든 칼국수” 같고 왠지 “정형 수술한 느낌”이 들어 지금도 원고지 위에 한 글자, 한 글자씩 새긴다. 가슴팍에 베개 두어 개 괴어넣고 엎드려서 “처절하게” 글을 쓴다고 말하며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이 “혼자 흥에 겨워 곡조도 없이 콧노래 부르며 설거지 하는 아낙네”처럼 마냥 신나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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