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만은 안되는 겁니까? - 마광수 교수
마광수 문학은 “‘문학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고 강준만 교수가 추천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즐거운 사라』는 마땅히 한국 사회의 문화적 문맥 안에서 읽혀져야 했으나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한 숙명을 타고난 『즐거운 사라』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글 : 김정희
200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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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즐거운 사라』를 읽으면서 처음엔 언어의 천박함에 놀랐다. 그러나 당시 마광수의 구속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내가 마광수에 대해 의외로 무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 난해하기까지 한 문학평론을 잘 쓰는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에 좀 어려운 말 몇 마디 집어넣거나 말을 이리저리 비비 꼬고 돌리는 따위의 수사법을 사용해 좀더 철저하게 문학을 위장하지 않았는지 나는 뒤늦게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천박하게 생각될 것이 틀림없는 상스러운 직설법만을 사용했던 이유는 일부 문인들이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는 ‘문학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광마잡담』에 대한 강준만의 추천사에서-


마광수 문학은 “‘문학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고 강준만 교수가 추천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즐거운 사라』는 마땅히 한국 사회의 문화적 문맥 안에서 읽혀져야 했으나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한 숙명을 타고난 『즐거운 사라』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마광수 교수는 적어도 현재의 모습과 많이 달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26살이라는 청춘 시절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28살에 홍익대 교수로, 33살에 연세대 교수로 취임되는 탄탄대로 일색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그는 지금 말쑥한 정장을 입고 있지도, 사회적 존경과 인정이 만들어내는 만족스런 미소도 짓고 있지도 않다. 그의 말마따나 『즐거운 사라』로 “사십대가 없어져버린” 교수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상태로 우울증과 합병증인 당뇨로 여전히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제 다시 세상에 발언하기 위해 기지개를 펴고 있다. 해냄에서 출판된 두 권의 책 『광마잡담』『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을 들고…. 그 방증인 양 교수의 음성은 우렁차고 칼칼하다.

인터뷰어 :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마광수 교수(이하 교수) :책 내느라 정신 없죠. 해냄에서 『광마잡담』,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가 나오고, 오늘의책에서도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라는 에세이집이 나왔어요. 『윤동주 연구』의 개정판이 또 나왔고. 5월에 나온 책만 4권이에요.

인터뷰어 : 지금 복직은 된 상태인가요?

교수 : 재작년에 복직이 되었어요. 1992년 10월 29일에 잡혀가서 12월 29일에 집행유예로 풀려났거든요. 학교에서 직위해제를 시켰어요. 강의도 못했지요, 2년 동안…. 그 후 시간 강사 자격으로 강의를 하면서 대법원 판결이 1996년에 유죄로 나면서 해직이 되었어요. 그랬다가 1998년에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사면복권이 되었어요. 그때 복직을 했는데 2000년에 재임용에 탈락을 했지요. 그 때 울화병을 얻어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잖아요. 너무 화가 났거든요. 그때 내가 학교에 사표를 냈는데 그래서 내 방에 책이 없어요. 그 때 책을 다 집에 가지고 왔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내 사표를 반려했지. 그래서 복직을 하게 된 거죠.

인터뷰어 : 2000년 재임용 탈락으로 충격을 상당히 받았을 거 같아요.

교수 : 사라 사건 때 한번 받고, 재임용 탈락 때 또 받고…. 재임용 탈락은 동료들과 후배들이 시킨 거니까 더더욱 충격이 컸어요. 『즐거운 사라』 때문에 십 년은 썩었어요. 모두 그 여파에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벌써 진급해서 왕고참이 되었을걸요.

인터뷰어 : 소설 『광마잡담』 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교수 : 예전에 낸 소설 중에 『광마일기』라고 있어요. 『광마잡담』『광마일기』처럼 옴니버스 스타일인데… 그것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죠. 중국의 『요재지이』(중국 청초에 나온 문어체의 괴이소설집)에 나온 4-5개의 이야기를 패러디한 작품이 있기도 해요. 『광마잡담』 은 일종의 전기(傳奇) 소설이에요. 저는 전기 소설이 동양문학의 전통으로 보거든요. 그 전통을 현대에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런 이야기를 작가의 말에도 썼는데, 이번 소설은 좀더 본격적인 전기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잡담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소설이 별거냐라는 거죠. 소설은 잡담이다,라고 작가의 말에 쓰기도 했어요. 소설은 리얼리즘이든 낭만주의이든 현실 참여가 아니라 현실 도피에서 나오는 거라 생각해요. 사람들이 재미 있으려고 책을 읽지 공부하려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나라는 공부하려고 책을 읽어. 또 공부하려고 써요. 이런 것에 절대 반대해요. 소설은 엔터테인먼트이고, 도락이며 여가 선용이에요. 심심하니까 읽는 거야. 원래 잡담이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엄숙주의, 문학 경건주의, 신성주의… 그런 거예요. 강준만 교수도 추천평을 그렇게 썼는데… 문학 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아주 잘 본 거죠.

인터뷰어 : 꾸준하게 소설을 쓰시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교수 : 역시 대리배설이지요. 제가 시로 출발해서 1989년 서른 여덟에 소설로 데뷔를 했어요. 겁도 없이 장편 『권태』로 데뷔해서 장편 소설만 썼어요. 저는 이렇게 비유해요. 시는 변비증 걸린 사람이 쓰는 대변과 같고, 소설은 설사와 같다…. 시원하게 쫙쫙 뽑아내려면 역시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시는 말을 함축해야 하잖아요. 답답해요. 내 시를 욕하는 사람은 없어요.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제목 때문에 욕을 먹었지만…. 시는 함축을 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야해질수가 없어요. 도저히 묘사가 안되요. 소설은 성묘사가 가능하니까 신나게 묘사한다는 거지. 하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성묘사를 『즐거운 사라』처럼 하진 못했어요. 그렇겐 못했지. 자기 검열이 생긴 거죠.

인터뷰어 : 소설에서 성 묘사를 자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교수 : 왜 성만은 안되냐는 거예요. 살인, 이런 것은 자세히 묘사를 하거든요. 재판에서도 제가 했던 말이 소설에서는 완전범죄의 살인을 묘사해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성 묘사는 왜 안되나?는 거였어요. 막말로 사라가 누굴 죽였는가…. 사라를 잡아갈 법이 없다구요. 프리섹스를 했을 뿐인데, 강간한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묘사해도 되고, 섹스는 묘사하면 안된다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이상한 점잔주의 또는 양반주의죠, 못된 전통이라고 생각해요. 성 문학이 국산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국산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지요. 아닌게 아니라 수출도 했어요. 『즐거운 사라』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거든요. 나한테 상을 줘야죠. 수출했으니까. 오히려 잡아갔죠.

인터뷰어 : 성 묘사로 인해 그렇게 고통을 당하셨는데도, 여전히 그런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교수 :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섹스라고 보니까요. 성에 대한 이론도 제가 제일 먼저 썼어요. 『문학과 성』이라는 책도 썼고, 『성애론』도 냈고…. 한국에서 그런 책은 처음이었어요. 아무도 그런 얘길 하지 않아요. 뒤늦게 몸철학이니, 라깡, 푸코 베끼고 있죠. 국산품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인터뷰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야함’에 대한 선생님만의 생각이 있으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 : 사전에는 ‘야함’이 ‘천박하다’로 나와요. 전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연의 본능에 솔직한 사람을 야한 사람이라고 보는 거죠. 그놷 면에서 제가 쓰는 야함은 좀 달라요. 그걸 강조하기 위해 괄호 안에 들 야(野) 자를 쓸 때가 많아요. 동물적인 사람이 야하죠. 동물은 본능대로 행동하니까. 인간만이 도덕적 위장을 해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많이 팔리기도 했지만, 욕도 엄청 먹었어요.

인터뷰어 : 에세이집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서의 구절을 뒤집은 거잖아요. 제목이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교수 : 1980년대부터 학생들에게 얘기했던 거죠. 자유를 누려야 진리를 발견한다…. 진리를 먼저 정하면 도그마, 편견이 되기 쉽거든요. 전 항상 나는 자유주의자라고 말해왔어요. 예전에 제가 해냄에서 낸 에세이집이 『자유에의 용기』에요… 그 다음 에세이집이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인데... 이번에도 제목에 자유가 들어갔지요. 원래 ‘진리케 하라’는 문법에 맞이 않는 말이에요. 이런 말은 없는데 한번 써 본거에요.

인터뷰어 : 자유를 얘기할 때 항상 수반되는 것이 책임이잖아요.

교수 : 내가 항상 얘기하는 건데 자유를 주면 자율이 생긴다라는 거죠. 이 책에도 청소년 문제 해결책에 대한 글이 많이 들어 있는데, 먼저 자유를 주어라, 머리도 마음대로 기르게 하고 염색도 하게 하고 피어싱도 하게 하고…. 그러면 자율이 생긴다라는 거죠. 그런데 교복도 없앴다가 부활시켰잖아요. 그런 식으로 자유를 안주니까 애들이 일탈로 가는 거예요. 보통 우리가 자유하면 방종을 연상하거든요. 자유는 그렇지가 않아요.. 제대로 자유로와지면 결코 방종해지지 않아요. 그 점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인터뷰어 : 선생님은 독특한 미의식으로도 유명하시잖아요.

교수 : 1980년대에 페티시즘이라고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 알아요. 내 소설에는 대부분 피어싱, 페티시, 염색이 나와요. 그 때엔 다 욕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네일 아트가 대 유행이잖아요. 제가 먼저 얘기한 셈이죠.

인터뷰어 : 타고나신 건가요?

교수 : 타고 난 것 같아요. 여자들의 손톱에 집착한 것은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어. 누나 메니큐어 몰래 훔쳐다가 열 손가락에 발라보고 그랬어요. 일종의 나르시시즘이었지. 내 손가락이 좀 길거든. 여자 볼 때 손부터 보는데 나르시시즘의 투사죠. 긴 손가락에 손톱까지 길면 더 길어 보이거든. 거기에 굉장히 집착을 했죠.

인터뷰어 : 학창시절에는 어떠셨나요?

교수 : 완전히 모범생이었죠. 4년 계속 장학금을 받고 다녔으니까요. 항상 1등만 하고. 그래도 연애는 많이 했어요. 대학 땐 연애를 세 번 했어요. 『광마일기』에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즐거운 사라』이후에는 연애를 한번도 못해봤어요.

인터뷰어 :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삶을 사셨는데, 되돌아보시면 어떠세요?

교수 : 가정적으로도 불행했죠. 하지만 『즐거운 사라』 이후 책을 많이 냈어요. 일년에 한번 꼴로 냈어요. 그래야 먹고 살 수 있죠. 책이라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거든요. 저서가 스무 권이 넘어요, 문학이론서도 많잖아요, 참 억울하죠,, 저처럼 많이 쓴 사람이 없어요. 시, 소설, 에세이, 논문, 그림까지…. 그런데 안 알아줘. 문단에서 완전히 차가운 감자야. 하지만 젊은 평론가들은 조금씩 나에 대해 쓰더라구요. 권태론이 나온 것도 봤고, ‘몸’ 시로는 마광수가 처음이다라는 평가도 나오고…. 조금씩 재평가가 되고 있는 거 같아요.

인터뷰어 : 요즘 활동을 좀 더 활발하게 하시려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교수 : 예. 미발표작 장편 소설이 두 편 남았어요. 야한 거거든요. 겁이 나서 미루고 있어요. 에세이는 엄청 많죠. 두 세권 분량이 있어요. 그리고 금년에는 시집을 내요.

인터뷰어 : 선생님의 인생관을 한 마디로 말씀해주신다면요?

교수 : 전 자칭 쾌락주의자라고 하죠. 쾌락은 행복과 동의어다,가 제 주장인데 우리나라는 쾌락을 나쁜 뜻으로만 봐요. 향락, 음란을 연상하는 거 같아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철학자가 에피쿠로스 같은 사람이에요. 쾌락주의자죠. 그 사람은 고통은 악이고, 쾌락은 선이다라고 말했는데 아주 맞는 말이에요. 국민소득 올려야 하는 것도 결국 쾌락 추구를 위해서 그런거 아니겠어요? 우리나라는 소득은 높아졌는데 그 소득에 걸맞게 쓸 데는 없어요. 돈을 쓰게 해줘야 경제도 활성화되요. 개인의 쾌락을 위해서 말이죠. 쾌락 추구가 더 음성화되고 있는데 쾌락 추구를 양성화 시켜야 해요.

인터뷰어 : 결혼 계획은 없으시나요?

교수 : 하고 싶어요. 그런데 너무 늙어서 올 여자가 없을 거 같아요.

인터뷰어 : 너무 외로우실 것 같아요.

교수 : 예. 외로워요.

#마광수
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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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vhee

2005.09.29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인지 다른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왜 저사람을 높이사는지 이해할수 없다. 사회적으로 지도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려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자신의 생각만큼의 가치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심야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마광수 교수라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대접 좋아하는 겉멋든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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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

2005.06.28

문학이, 인식이, 지금까지 그렇게 진일보해오지 않았습니까? "이게 진일보하는거 맞니?" 라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을겁니다. 글쎄요. 그러고보니, 저도 그게 진일보하는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과학이 발전한다, 문화가 발전한다, 문명이 발전한다, 하는데, 달리보면 오히려 죽어가는 걸수도 있고.. 근데요, 저는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네요! 사람들, 앞으로도 꾀나 오랫동안 잘들 살아남을 것 같거든요. 저도 한동안은 세상이 비관적으로만 느껴졌었는데요, 지금은 다시금 긍정쪽으로 약간더 기울었습니다. 저렇듯, 인간들의 사유와 의식들이 살아서 꿈틀대는게 느껴지지 않나요? 제 어설픈 직관, 함 믿어볼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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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ia

2005.06.17

십수년 전 지방의 초라한 학교로 강연을 오셔서 그야말로 일자무식한 학생들과 교수들을 모아두고 자신의 작품을 대변하면서 '성'에 대한 사회적 강박증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때 단순한 호기심으로 세미나에 들어갔다가 다른 학우들이 '불순한 질문'을 퍼붓는 통에 얼굴이 다 화끈거린 생각이 난다. 그 때 잘 주의 깊게 들었더라면, 마교수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성행위'가 아닌 '강박증으로서의 성'이었는데, 모두들 '성행위'의 묘사에 집착한 질문들만 해댔던 것이다. 그 날 마교수 님은 어떤 '성적인' 발언을 하시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 날 이후로 교수님께 대표로 사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숨어 있던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단지 내 자리에서 살아 남기 위해 분주하고 있는 동안 마교수 님이 사회를 상대로 홀로 투쟁하고 있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부끄럽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런 말을 하는 것 뿐이었다. "마교수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니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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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독서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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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나와 「윤동주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25세에 대학강의를 시작으로 28세에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낸 후 1984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92년 10월 『즐거운 사라』필화사건으로 전격 구속되어 두 달 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95년 최종심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연세대에서 해직되고 98년 복직됐으나, 2000년 재임용탈락, 우여곡절 끝에 연세대학교 교수로 복직했고, 2016년 8월에 교수직에서 퇴직했다. 2017년 9월 5일 타계하였다. 1977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그는 시, 소설, 에세이, 평론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35권이 넘는 저서를 쏟아냈다. 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꼬리표가 채 식기도 전에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구속당한다. 마광수는 분명 화제를 몰고 다니는 저자 중의 하나이다. 그의 긴 약력은 마광수의 글들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모았는가를 보여준다. '구속', '수감', 항소심' 등이 말이 등장하는 마광수의 이력은, 마치 무슨 민주화 운동가의 이력을 보는 듯할 만큼 극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광수가 정작 자신은 자신을 '무슨 운동가'로 규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물론 마광수가 자신을 규정하는 사회적 주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광수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자신은 자신의 하고싶은 말, 옳다고 생각한 말을 했을 뿐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은 처벌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광수는 무슨무슨 운동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수의 글과 생각은 그것이 발표될 때마다 일종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마광수의 생각이 가지는 일종의 '솔직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마광수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체면에 관계없이 과감하게 발언한다. 이것의 그가 대중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동시에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는 지탄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글로 인해서 옥고를 겪거나 했지만 마광수는 유난히 많은 문제를 겪었다. 재직하던 학교에서 해직되어서 시간 강사로 일하기도 했으면 재판정에 나가야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광수는 행복한 저자이기도 하다.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이 마광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책을 써냈기 때문이다. (『마광수는 옳다』) 사회적 논란을 가져온 많은 저자들이 있었지만 그를 옹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마광수는 옹호자를 가진 행복한 저자이다. 마광수가 이름을 알린 것은 분명히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거침없는 발언들이다. 그러나 그 주제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마광수는 한국 사회가 가지는 '관용의 정신'이 어느정도인가를 시험하는 일종의 잣대이기 때문이다. 보통 음습한 곳에서만 이야기되던 개인의 성적 취향을 사회의 토론장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 마광수에 대한 비판의 주된 근거들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서 마광수는 자신만의 주제와 글쓰기 스타일에 머무르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주요한 논제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마광수는 아직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생각이 없으며, 동시에 한국 사회 또한 마광수에 대한 비판을 멈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을 쓸 때 문장에 가장 신경을 쓴다고 토로한다. 가장 친근감 있고 가벼운 문장이 되도록 애쓴다는 것이다. ‘성해방’과 ‘표현의 자유’를 뺀 ‘진보’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라며 반문하는 그는 작가란 모름지기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마교수는 소설은 허구이기에 ‘그럴듯한 거짓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나 소설에서만큼은 에세이나 평론과는 구성이나 문체상 거리를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교양주의나 교훈주의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창작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